소설리스트

26화 (26/256)

26화.

“또 비공식적인 건가요?”

“왕비한테 들킬까 봐 공식적인 요청을 할 수가 없어…… 지금 내 계획은 이래. 윌리엄 시해 사건을 조사하는 척 모든 곳을 들쑤셔 놓고 뒤로는 6년 전 화재를 조사하는 거지. 투트랙이야.”

“그리고…… 카이든이 발굴해 온 유골의 성분과 비교하면 되겠군요.”

“역시 리젠이야.”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너무 똑똑해서 설명할 것도 없네.”

“카이든에게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바쁘실 텐데, 괜히 눈에 띄게.”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다니엘이 살짝 당황하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사실 자신도, 카이든에게 시키면 될 걸 굳이 그녀를 보러 온 것이 스스로도 머쓱하던 차였다.

“카이든은 지방에 출장 갔어. 내일 와. 하루하루가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더니 지방 출장이 있었구나. 리젠은 순간 출장에서 다녀왔다며 팔에 긴 상처를 안고 돌아온 카이든의 모습이 생각나 입술을 깨물었다. 다니엘은 리젠이 ‘그렇게 하루하루가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말을 할까 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리젠.”

“네?”

“내일 무도회 온다며.”

그러고 보니 내일이 왕궁 무도회였다. 리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씩 웃었다.

“아셰가 너랑 같이 간다고 얼마나 기대에 차 있는지 몰라.”

그의 파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춤 신청하면, 받아 줘야 해.”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매끄러운지,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리젠은 숨이 막혀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 저, 저 춤 잘 못 추는데요…….”

마치 학교 다닐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니엘에게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긴장했던 바로 그 어린 시절로.

“그럼 잘 출 때까지 내가 가르쳐 주지, 뭐.”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다시 구름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 다니엘의 금발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의 파란 눈도 투명하게 빛났다. 리젠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앉아 있을 동안, 카이든은 어느 사지에서 헤매고 있는지 마음 한편으로 계속 걱정이 되었다.

4. 무도회

“거봐요, 왕녀님.”

리젠은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저는 평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 이렇게 화려한 옷도 안 어울리고, 속눈썹도 짧아서 화장도 잘 안 먹어요.”

“아냐. 못 찾은 것뿐이지 정답은 있을 거야. 일단 이건 벗자. 파란색은 진짜 아니다.”

아셰는 온갖 옷과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고민 중이었다. 역시 권력 없는 왕녀라고 해도 왕족이라 사치품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리젠은 처음엔 좀 기대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았지만, 화려한 옷들을 입으면 입을수록 왜 그동안 그녀가 단순한 옷만 고집했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슬슬 지쳐 갈 무렵 아셰가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드레스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귀엽게 생겨서 사랑스러운 스타일이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옷이랑 따로 노네. 아예 다른 쪽으로 가자. 섹시한 연구원!”

“이건 노출이 심한데요. 게다가 라인이 너무 붙어요.”

“한 번 입어 보기라도 해 봐.”

리젠은 몸에 달라붙는 붉은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보았고 그제야 아셰와 리젠의 얼굴이 펴졌다. 레이스나 화려한 장식이 없는 드레스가 의외로 잘 어울렸던 것이다.

“다니엘 진짜 깜짝 놀라겠다.”

아셰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액세서리를 고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 악바리 리젠이 이렇게 우아하고 섹시할 줄 몰랐을걸?”

“왕녀님도 너무 예뻐요.”

“나야 이런 무도회가 처음이 아니니까 나한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고. 어때, 아메탄의 유일한 왕녀 체면은 서겠지?”

아셰가 프릴이 화려하게 달린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빙글 돌았다. 아메탄 왕족 특유의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오늘 목적이 있어.”

“목적이라뇨?”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남자들이 많이 올 거 아니야? 혹시 아니? 좀 호구 같은, 권력 암투 같은 거 없는 나라의 왕자나 공작쯤이라도 낚을 수 있을지. ‘의심의 기간’ 끝나고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을 때 청혼 시켜 볼까 싶기도 하고.”

“많은 남자들의 눈에 띌 것 같아요.”

리젠이 진심으로 말했다.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정말로.”

“난 그래도 리젠이 부러워.”

아셰는 그녀에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며 속삭였다.

“한 명, 단 한 명에게만 예쁘게 보여도 되는 삶 말이야.”

리젠은 ‘단 한 명’이라는 말에 왠지 마음이 무거워져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의 ‘단 한 명’은 다니엘이 맞을까? 어젯밤 꿈에는 카이든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제때 잠을 자지 않았다는 얘기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던 밤이 생각나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니엘이 반할 수밖에 없을 거야. 교복 입던 그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

아셰가 직접 고른 흰색 하이힐을 그녀의 발밑에 놓아 주었다.

“내가 봐도 너무 매력적이니까, 리젠. 앞으로 실험복에 운동화 끌고 다니지 말고, 이런 스타일로 입어.”

“너무 불편한데요. 다리가 요만큼밖에 안 움직여요.”

리젠이 씩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왕녀님. 덕분에 이런 비싼 옷도 입어 보고, 생전 해 보지 않았던 보석도 걸쳐 보고, 이렇게 예쁘게 꾸밀 수 있다니. 정말로 귀족 영애가 된 것만 같아요.”

“기죽지 마. 가면 귀족 영애들끼리 기 싸움이 엄청 날 거야. 되도록 처음엔 내 옆에 붙어 있어.”

그녀가 리젠의 손을 꼭 붙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차기 왕비가 될 수도 있는 몸이라고.”

리젠은 어설프게 웃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도회는 정말 화려했다. 이 정도만 해도 국상 중이라 소박하게 많은 절차를 생략했다고 하니 평상시에는 얼마나 화려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셰의 마차를 타고 함께 입장한 왕궁에서는 어딜 가나 좋은 냄새가 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으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정말 상상도 못한 세상이네요.”

리젠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핑거푸드를 먹거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셰와 리젠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와인 잔을 부딪쳤다. 

“리젠 하카트의 꿈만 같은 밤을 위해!”

아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무도회는 모든 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꿈이야. 예쁘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남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는 것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꿈이네요.”

리젠도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재미있어요. 여기 있는 것만 해도 즐거워요.”

그녀들이 쿡쿡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사람들 틈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다니엘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 리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니엘이 그들의 테이블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기다렸어.”

“춤은 많이 췄어?”

아셰가 묻자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최대한 피해 다녔어.”

그가 리젠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춤을 가르쳐 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리젠의 볼이 자신도 모르게 발갛게 물들었다. 다니엘은 정말로, 저런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할 때에는 ‘달콤하다’라는 형용사가 너무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셰가 키득대며 리젠의 옆구리를 찔렀다. 리젠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향이 좋은 와인만 한 모금 마셨다.

“리젠, 오늘 정말 예쁘다.”

다니엘 역시 흰색 정장이 몹시 잘 어울렸고, 거의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꽂힐 정도로 수려했다. 그는 왕위 계승권자 후보가 된 이후 더 외모에서 빛이 났는데,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만큼이나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멀어 느껴졌다.

“저기, 아셰 왕녀님 아니십니까.”

그들 사이로 흰 피부에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다소 왜소한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한스팀 왕국에서 온 지한이라고 합니다.”

“아…… 지한 왕자님?”

아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전에 혼담이 들어왔던 사막 국가의 남자였다. 다만 제국의 황제에게서 청혼이 겹쳐 들어오면서 흐지부지되었다가 ‘의심의 기간’ 중 다 없던 일이 되었던 것이다. 아셰는 한때는 결혼할 뻔했으나 얼굴은 지금에서야 처음 보는 젊은 남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입니다.”

아셰는 천천히 일어나 아주 우아한 손짓으로 인사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춤추는 것 같은 살랑거리는 몸짓에 리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 한 곡…… 청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아셰가 리젠에게 눈을 찡긋했다. 잘해 보라는 의미의 윙크를 날린 그녀가 한쪽 손을 지한에게 맡기며 사뿐사뿐 걸었다. 약간 얼떨떨해하는 리젠의 표정을 보며 다니엘이 푸하하 웃었다.

“왕녀로서 당연한 거야. 두 얼굴을 가지는 건 왕족이라면 어쩔 수 없어.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럴걸.”

“그런가요? 목소리부터가 제가 알던 아셰가 아닌 것 같아서…….”

“리젠도 내가 알던 리젠이 아닌 것 같은데.”

“네?”

“너무 예뻐서.”

“아…….”

리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제 생각에도요. 제가 꾸미니까 또 꽤나 괜찮더라고요?”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능청을 떨며 키득거리고 한술 더 떴다.

“이제 월급 받아서 옷 사고 보석 사는 데 쓰려고요. 매일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다면 돈 버는 보람이 있겠어요.”

“역시 리젠이야. 지금이 무도회 와서 제일 유쾌했어.”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하다가 아셰를 흉내 내어 한쪽 손을 얹었다.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춤…… 가르쳐 줄게, 잘 출 때까지. 약속했으니까.”

“네. 걱정 마세요. 아마 잘할 거예요.”

리젠이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저는 잘 못하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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