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안 돼.”
리젠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리젠은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는 내가 나타나니까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놓고 마음속에서는 다른 여자를 품어? 그래 놓고 좋은 동료? 그러니 이렇게 단둘이 우리 집에 있어도 제정신일 때에는 내 몸에 손끝 하나 안 건드리는구나. 약간의 짜증을 품은 그녀의 손길이 과감해졌다. 오기가 생긴 그녀가 왼쪽 손을 억지로 풀고 그의 허리를 감았다.
“……알고 싶어.”
그녀가 도복 바지를 천천히 벗기며 크고 단단한 그의 중심을 두 손으로 잡았다.
“왜 안 알려 주는 거야?”
“리, 리젠…… 제발…….”
“동료끼리는 비밀 같은 거 없어야 되는데.”
그녀가 말할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간질거려 카이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나도 다니엘 좋아하는 거, 네게 다 말했잖아.”
“……안 돼.”
그의 단호한 말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서 그의 남성을 쓸었다.
“누구야, 그 여자애?”
“있어.”
옅은 신음 소리를 뱉으며 그가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았다.
“엄청…… 지켜 주고 싶은 여자.”
“……뭐?”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
[따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허리가 아팠다.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카이든 역시 그 자세 그대로 잠들었었는지, 소파에 앉아 기댄 그 자세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안 돼. 진짜 절대 얼굴 못 보겠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분명히 카이든도 꿈의 잔상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펴려다가, 바로 눈앞에 잔뜩 커진 그의 중심을 보고 숨을 삼켰다.
‘아, 말도 안 돼…….’
카이든 역시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토끼처럼 커진 리젠의 눈을 보고 민망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건…… 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지난 꿈에서 직접 카이든의 바지를 벗기며 저 커다란 것을 만졌다. 분명히 카이든도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리젠 역시 같은 꿈을 꿨고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정말 죽어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음…… 남자는 원래…… 아침에 일어나면…….”
“아, 알아!”
리젠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 나도 알아. 별거 아니잖아. 음…… 건, 건강하다는 뜻이지?”
그의 귀가 빨개졌다. 리젠은 어쩔 줄 모르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목을 가다듬고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정말 미, 믿음직스럽다. 이렇게 건강한 남자가…… 음…… 좋은 동료라니!”
“……바보야.”
그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해.”
“역시 수사국 남자들은 몸이 튼튼……. 음…….”
“그만하라고.”
“뭐, 곧…… 작아질 거잖아. 그렇지? 이건 뭐, 자연스러운…….”
“리젠 하카트!”
“어어어! 나, 난 먼저 씻을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리젠은 화들짝 놀라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쾅 닫은 그녀가 문 뒤에 기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 세상에……. 최악이다.”
리젠답지 않게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을까. 사람 유골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는데,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을 보고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그녀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누구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지키고 싶은…… 바보 같은 여자?”
둘 다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선택 과목인 마법까지 포함하여 카이든과 일대일로 대련을 하면 막상막하일 것이라는 동급생들의 평가를 받아 왔다. 온갖 범죄의 온상을 캐고 다니는 수사국 지망이었던 그녀를 도대체 누가 지키고 싶단 말인가. 게다가 바보 같다는 표현은 더더군다나 그녀에게서 멀었다. 세상에서 그녀가 똑똑하지 않다면 누가 똑똑하다는 것인가? 오히려 백치미라고는 전혀 없어 남자애들이 가까이 힘들어하던 그녀였다.
늘 아셰에게 ‘너처럼 빈틈없이 완벽하게 굴면 남자들한테 인기 없어.’ 같은 말이나 듣곤 했다.
“……누구지?”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리젠은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자리에 있는 쪽지를 하나 보고 숨을 삼켰다.
[11시에, 약제국 뒤편 정원을 죽 가로지르면 나오는 정자에서 봐. - 다니엘]
분명 왕궁의 사람이 몰래 둔 것이 분명했다. 몇 번이고 훔쳐보았던 다니엘의 필체가 확실했다. 그녀는 흘끗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사파엘을 보았다. 사파엘은 약제국의 직원들이 왕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았고, 사실은 그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었다. 산하기관의 가치중립성은 분명 몹시 중요한 윤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왕궁 산하기관마저 왕족들의 정치 놀음에 놀아나게 된다면 어떤 조작이 벌어질지 몰랐다. 사파엘이 염려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쪽지를 받은 것만 해도 정말 잘못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그래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11시가 되기 직전에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몰래 약제국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어떤 정자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정원을 죽 가로지르면 나온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약제국은 왕궁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산책로가 몹시 잘 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비가 툭,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맙소사.”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약제국 안으로 우산을 가지러 들어가기엔 들킬 것 같아 무서웠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실험복을 뒤집어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그 정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외진 데에 있는지 정원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도 나오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두꺼워지고, 그녀가 짜증을 내며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지붕이 있는 정자가 보였다.
“저긴가?”
연구할 때만 쓰는 안경을 그대로 쓰고 나와, 그 안경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시야가 흐렸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와, 왕자님, 늦었어요. 죄송…… 해…… 요?”
정자에 들어와 덮어쓴 실험복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자, 금발 머리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 정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 넓은 정원에 정자는 여기뿐인 것 같은데?
정자에 미리 와서 앉아 있던 금발 머리의 남자는 자세히 보니 다니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렇게 화려한 옷, 왕궁과 함께 쓰는 산책로, 선왕을 그대로 닮은 금발 머리. 2왕자인 루벤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르엘라?”
그녀가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그녀가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그…… 그 사람은 제 고모인데요.”
“…….”
루벤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르젠이냐?”
“……리젠이요.”
“아, 맞아. 그랬지…….”
“저를…… 아세요?”
“꼬맹이일 때 봤었지.”
루벤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그녀를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뜯어보았다.
“많이 컸네.”
리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코만 훌쩍거렸다. 인사하기에도 타이밍을 놓쳤고, 친근하게 대하자니 여러 가지 사정이 걸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카이든의 가설에 따르면 이 남자와 왕비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 아닌가.
“갈색 머리 빼고는 생각보다 르엘라를 닮지는 않았구나.”
그건 칭찬 아닌가, 리젠은 코를 긁적였다. 르엘라는 객관적으로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 비쩍 말라서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은 항상 퀭했고, 항상 짧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녔다. 리젠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젠에게 무슨 일이야?”
다니엘이었다. 우산이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 잔뜩 경계심을 품은 상태였다. 루벤이 읏차, 하며 일어섰다.
“뭐야, 밀회라도 약속한 거야? 쪼끄만 것들이…….”
“가, 가시게요?”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루벤의 날카로운 눈이 그녀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다니엘과 그녀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우산도 없이 빗속을 저벅저벅 걸어 사라졌다.
“뭐래?”
다니엘이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뭘 캐냈어? 혹시 협박했어?”
“아, 아니요…….”
그녀가 천천히 정자에 앉으며 젖은 머리를 꾹 눌러 짰다.
“별말 안 했어요. 저도 이제 막 와서요.”
“미안. 우산 가져오느라 늦었어.”
그들은 나란히 정자에 앉아 토독토독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정원에 비가 내려 시야가 깨끗하고 예뻤다. 리젠이 그녀를 바라보며 ‘르엘라’라고 중얼거리던 루벤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데, 다니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리젠, 사실 부탁이 있어.”
“네…….”
“약제국에서, 불법 약물 단속 때문에 약초 유통 경로를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어. 맞아?”
“네.”
리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망설이며 메모지 하나를 내밀었다. ‘캐서린 얀슨’이라고 적힌 이름과 약초상 가게의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외울 수 있어?”
“네.”
그녀는 메모지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다 외우고 나서 간단한 마법으로 바로 메모지를 불태웠다. 다니엘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야무지고 똑 부러진 여자애다. 학생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여기 들어간 약초들 유통 경로를…… 추적해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