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직도…… 루벤이 처소에 들지 않니?”
테스티의 걱정 어린 말에 나람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람은 루벤의 비로, 사막 국가 한스팀 출신이었다.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이다. 사근사근하게 잘 구슬려 보렴.”
“하지만…….”
나람이 울먹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예 처소에 들지 않는 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아들을 낳아야지. 루벤의 나이가 이미 꽤 많아. 얼른 후계를 공고히 해야 해. 네가 직접 루벤의 궁에 가는 건 어떠니?”
“몇 번 가 보았지만…….”
나람은 이야기하면서도 비참한 듯했다.
“대놓고 귀찮아하셔서요…….”
“왕이 되면 또 달라질 거다.”
테스티가 달래듯 차분히 말했다. 나람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람의 손을 토닥여 준 그녀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 달 안에…… 완성 가능한 거지?”
“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가장 까다로운 재료는 그제 준비가 되었어요. 나머지 재료만 준비되면 ‘최종 재판’ 전까지는 간당간당하게 가능해요.”
“그렇구나……. 제펠탄이 조금만 더 버텨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좁은 길이 이어지니 다행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것’이 필요하니?”
“네.”
나람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녀의 표정이 견디기 힘들다는 듯 무너졌다.
“다니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여자의…… 피요.”
“그래. 알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자연사까지 가능해요…….”
테스티는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영애들이 다니엘을 모두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차였다. 이번 무도회에서 그중 골라서 피를 얻으면 될 것이다. 왕위에 정신이 없는 다니엘이 누군가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중 가장 반응이 좋은 여자가 있기는 할 테니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연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나람은 가까스로 말을 잇고 훌쩍이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내가 내 아들을 아는데, 그 녀석은 당차고 꼿꼿한 여자를 좋아해.”
테스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울먹이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
나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테스티는 왜 루벤이 그녀에게 끌리지 않는 건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거칠고 불과 같은 루벤의 마음을 잡기에는 애초부터 역량이 되지 않는 여자였다. 그래도 루벤에게는 정말 필요한 아내였고, 나람이 루벤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천지신명이 도운 일이었다. 테스티는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람의 궁을 떠났다. 참 자식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왕이요? 당연히 되고 싶죠.”
루벤은 어젯밤 키득대며 말했다. 테스티는 그의 눈에 스며든 광기를 확인하고 살짝 몸을 떨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제 그것뿐인데요.”
“루벤.”
“어차피 너무 멀리 왔습니다. 저는 끝까지 갈 겁니다.”
그는 거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테스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깟 회의 한번 참여 안 한 것이 뭐 어떻다고요? 어차피 어마마마가 저를 위해 피로 물든 왕도를 닦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 * *
“르엘라가 6년 전 화재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르엘라의 죽음도 재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카이든은 서류 가방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메모를 펼치며 말했다. 리젠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사실 수사국은 사람이 죽은 건 당연히 열심히 수사하지만, 음…… 미친 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나 봐.”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잠옷 차림의 리젠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미 잘 시간을 넘긴 상태였다.
“약제국의 일개 직원이 그냥 미쳤는데 그걸 수사국에서 왜 조사하겠어. 날짜도 맞지 않아. 우리 고모는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6개월 뒤에 미치기 시작했으니까.”
“증상이…… 어땠어?”
“그냥 유순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 말하는 법을 잊고…… 온종일 누워 있거나 과자를 먹었어. 돌보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러다 어느 날 조용히 잠들었고, 그 이후에 깨어나지 않았어.”
“정말 전형적인 광증이네.”
“그래, 그냥 흔한 광증이야. 너무…… 흔하지.”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막다른 길에 접어드는 것은 수사를 할 때면 언제나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런 경우 정보가 필요했다. 더 발로 뛰어 더 작은 단서라도 잡아내야 했다.
“사실은 그때 사파엘 교수님이 왔었어.”
“뭐?”
“고모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알렸을 때 혼비백산해서 뛰어오셨어. 그리고 여러 가지 시약 반응을 미친 듯이 했던 기억이 나. 내가 그렇게, 정말 평온하게 돌아가셨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으셨어.”
“……결과는?”
“자연사였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파엘 교수님은 뭔가를 알고 계셨던 것 같아. 자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나 봐.”
“사파엘 교수님께 여쭤 보는 것이 좋겠어.”
“절대 말씀 안 해 주실 것 같던데. 몇 번 내가 운을 띄워 봤지만 칼 같으셨어.”
리젠이 입술을 내밀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막 퇴근하고 와서 검은 제복 차림의 카이든은 리젠과의 대화를 정갈하게 메모에 정리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야, 넌 너희 집처럼 편해 보인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리젠의 말에 카이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는 밤늦게 퇴근하며 리젠의 집을 찾아온 터였다. 이 정도도 일찍 퇴근한 거라면서, 퇴근길에 르엘라에 대하여 조사해야겠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그를 내쫓을 수는 없었다. 리젠은 바닥에 앉아 있다가 카이든이 몸을 소파에 기대는 바람에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남자한테 문 열어 주지 말라니까…….”
“그래? 그럼 얼른 나가.”
“조금만, 조금만 쉬다가. 나 어제도 두 시간밖에 못 잤어.”
그 두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젠이 잠들었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젯밤 꿈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다니엘과 이런 대화를 할 때가 있었어.”
“무슨 대화?”
리젠이 또다시 하품을 참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상대는 100명 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왕비……. 그땐 왕마저도 철저하게 왕비의 편이고…… 과연 수사국 말단인 나와, 왕위 계승권에서도 멀었던 다니엘이 뭐라도 할 수 있을까…… 윌리엄이 왕위에 오를 때만 기다려야 하는 무력감…….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은 아닌지…….”
리젠은 지쳐 보이는 카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애써 봐도 안 되면 어쩌나, 우리가 뭔가를 한다고 다짐했던 건 10대의 치기가 아니었나. 뭐가 되기는 하는 건지…… 아무리 걸어도 암흑이고 아무리 다니엘과 등을 대고 있어도 외로웠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이든의 손을 잡았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카이든의 무릎에 엎드려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다른 어둠 속을 꿋꿋하게 혼자 걸어가는 너를 봤어.”
카이든은 미동도 없이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혼자 걷는 그 모습이 너무 빛이 나서…….”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겼다. 리젠은 그의 느리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자꾸 보고 싶더라.”
‘자면 안 되는데…….’
“……같이 걷고 싶더라고.”
리젠은 그의 무릎에 엎드려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 여기 오랜만이다.’
대학의 체력단련실이다. 리젠은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언젠가 체력단련실에서 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카이든과 제대로 대화를 나눈 첫날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든이 도복을 입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도가 옆에 구르고 있는 것을 봐서 미친 듯이 검도 훈련을 하고 난 뒤인 것 같았다. 카이든의 검은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운동 열심히 했네. 나, 나는 옆방으로 갈게.”
그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휙 낚아챘다.
“악!”
리젠의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부상을 면했다. 그녀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뒤이어 카이든의 팔이 그녀를 거세게 안아 버렸기 때문에 결국 카이든의 몸 위로 엎드린 형상이 되고 말았다.
“야! 뭐 하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서.”
“뭐?”
“꼼짝도 하기가 힘들어서, 지쳤어.”
그가 그녀를 안고 쿡쿡 웃었다. 리젠은 그의 몸 위에 엎드려서 그녀가 비치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턱 선과 깊은 눈매, 짙은 눈썹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는 새삼 현실에서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뜯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곱상하고 귀공자 같은 얼굴이라면, 카이든은 성숙하고 선이 굵은 남자다운 얼굴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어?”
“너처럼…… 되고 싶었는데.”
“뭐가?”
“그냥, 뒷모습만 봐도 괜찮은 거.”
리젠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카이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게 잘 안 돼.”
눈을 동그랗게 뜬 리젠의 얼굴을 보며 카이든이 힘없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게 난 너무…… 힘들어.”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리젠은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이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나? 그럴 수 있었다. 카이든이라고 좋아하는 여자가 없을 리 없었다. 그냥 리젠은 당연히 카이든은 복수하느라 바빠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을 거라고 예상한 것뿐이었다. 리젠의 머릿속에 카이든과 그래도 대화를 줄곧 잘 나누었던 여학생 이름들이 둥둥 떠다녔다.
“내가 좋은 동료라면…… 그 여자 누구인지 말해 줘.”
리젠과 카이든의 시선이 얽혔다. 리젠은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느리게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리젠의 수줍은 혀가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쓸었다. 카이든은 눈을 감고 그녀의 왼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