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테스티가 화려하게 빛나는 다니엘의 금색 장식을 부채로 툭 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녀는 복도를 걸어 나가며 뒤를 따르던 호위 무사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루벤은? 대체 얘는 왜 오늘 회의에 안 나타난 거야?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오늘 비가 옵니다.”
호위 무사의 엉뚱할 수도 있는 대답에 테스티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이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테스티는 도도하게 걸음을 걸어 왕비궁으로 향했다.
“왕궁 무도회요?”
“그래.”
아셰가 빛나는 눈으로 리젠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이번 주말이야. 국상 중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우니 축소만 할 뿐 그대로 열린대. 우리는 그동안 학생 신분이어서 참여하지 못했잖아.”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무도회가 열린다는 건 약제국에서 들었던 것 같아요.”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고작 그 말을 하려고 하녀까지 시켜서 퇴근길의 그녀를 급히 불러온 것인가 싶었다. 사파엘이 워낙에 그녀가 왕족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만나러 오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 왜…… 다들 예쁘게 차려입고 음악에 맞추어서 춤추는…… 어…… 그런 거 말씀이시지요? 맞죠?”
“뭐, 비슷해. 맛있는 것도 많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행사들도 많고.”
아셰는 왠지 몹시 흥분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리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잘 다녀오세요.”
“응. 난 당연히 갈 거고…… 너도 갈 거야.”
“……네?”
리젠은 뜬금없는 아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약제국에서도 왕궁 무도회가 계획대로 열린다는 말은 돌긴 했지만 그 누구도 딱히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리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약제국장님을 귀족과 왕족들의 들러리를 서 주러 간다며 불쌍해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왕녀님, 제가 거길 왜 가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고모도 그런 데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서 어린 시절에도 가 본 적이 없어요. 귀족도 아니고, 고위 관료도 아니고 꼭 갈 필요도 없잖아요.”
“리젠.”
아셰가 한숨을 폭 쉬었다.
“무도회가 그냥 춤만 추는 데인 줄 알아? 그럼 그냥 살롱에서 맘 맞는 사람들끼리 스텝이나 맞출 것이지 그런 거대한 행사는 왜 열겠어? 다 숨겨진 목적이 있는 곳이라고.”
“……숨겨진 목적이요?”
“그렇게 젊은 남녀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 삼삼오오 모여서 인맥을 만들기도 좋고,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잘생긴 남자들 구경하기도 좋고. 그러다 마음에 든 상대랑 간질간질한 분위기 만들어 가면서 춤도 추고 말이야.”
“아…….”
리젠이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말했다.
“저는 그중 하나도 관심이 없어요, 왕녀님.”
“넌 계속 약제국에서 연구만 하다가 혼자서 늙어 죽을 셈이야?”
아셰가 쏘아붙였다.
“약제국은 얼마 안 되는 자율 복장인데 맨날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맨날 안경 쓰고 머리는 질끈 묶고 다니고! 넌 어떻게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안 꾸미고 다니는 거야? 나이가 아깝지도 않아? 너, 2년에서 3년만 지나면 노처녀 된다고.”
“그럼 2년에서 3년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되겠네요.”
“꾸밀 수 있을 때 꾸며야 해. 리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아. 내 짧은 인생 도중 느낀 건 그거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돼.”
“전 할 수 있는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무도회에서 바보같이 있기 싫어요. 저는 인맥이 아니라 성과로 말하는 연구원이 되고 싶답니다. 방방곡곡의 잘생긴 남자는 더더군다나 관심 없고, 춤은 단 한 번도 배우지 못했고요.”
“하아…….”
아셰가 안 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을 놓은 아셰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리젠.”
“네?”
“너는 사교계의 동향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이번 무도회에서 모든 영애들의 관심이 누구인지 알아?”
“글쎄요.”
“다니엘 오빠야.”
리젠은 잠시 놀라서 얼굴이 굳었다. 아셰가 그것 보라는 듯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차기 왕이 될 수도 있는 남자야. 윌리엄 오라버니가 워낙에 의문스럽게 죽었으니, 수상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뒤에 서려고 해. 그런데 지금 오빠는 약혼녀가 없는 완벽한 싱글 상태고.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의심의 기간’ 동안 약혼녀가 없다는 건, 그의 옆에 누구나 설 수 있다는 거야. 특히나 왕이 되면 외국인하고 결혼도 안 해도 돼.”
“……뭐, 그건 그렇죠.”
“그건 그렇다니! 그런 반응을 할 게 아니야. 이번 무도회에서 온갖 여자들이 다니엘의 곁에서 눈길 한 번이라도 받아 보려고 난리일 거야. 가만있을 수는 없어.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리젠, 엄청 예쁘게 꾸미고 완벽한 성인 여자의 모습을 다니엘에게 보여 줘. 또다시 뒤에서 바라보는 짝사랑으로 만족할 거야?”
“왕녀님, 저는 일개 연구원일 뿐이에요. 왕자님이 차기 왕이 되신다고 하면 더더군다나 제가 곁에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지금 왕궁 산하기관들이 이렇게 독립성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윤리를 갖게 된 게 언제부터인데? 100년 전 카를 왕이 행정국의 직원하고 결혼하면서잖아. 그 이후로 내가 보기엔 훨씬 더 왕궁은 합리적으로 변했어.”
아셰가 결정했다는 듯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고압적으로 말했다.
“가자, 리젠. 옷도 보석도 화장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왕녀님, 저는 별로 내키지가 않아요.”
리젠은 전혀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그녀는 왕궁 무도회란 정말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정치적인 힘이 필요한, 화려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고 그 시간에 그녀는 그냥 연구나 더 하고 싶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리젠을 보며 아셰가 어조를 바꾸어 말문을 열었다.
“리젠, 나는 남자와의 사랑 같은 건 어렸을 때부터 생각도 안 했어. 아마 왕족이라면 거의 다 그럴 거야. 당연히 정략혼을 해야 하고, 괜히 사랑 같은 것에 빠지면 파란만 일어나. 나는 이 모든 일이, 아바마마가 테스티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왕족이라면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해. 그냥 주어진 대로 의무를 다 해야 해. 아마 다니엘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야.”
“…….”
“내 입장은 여전히 바뀐 게 없어. 난 왕이 될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외국으로 가야겠지. 내가 결혼에 대해 꿈꾸는 유일한 것은, 다니엘 오빠가 왕이 된 뒤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그냥 제일 가깝고 우리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공국의 젊은 귀족한테 보내 주는 거야. 그나마 자유가 좀 있고, 이런 암투 같은 것과 상관없는 곳. 우리 엄마처럼 존재만으로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 가서 숨통 트고 사는 거지.”
“왕녀님……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하지만 내가 지금 사랑을 해 보겠다고, 어떤 남자랑 눈이라도 맞으면 다니엘 오빠에게 고민거리만 될 뿐이야. 어차피 나는 원칙상 외국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데, 다니엘 오빠가 나를 억지로 외국에 보내면 마음이 어떻겠어?”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리젠, 너라도, 자유로운 너라도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 나는 그것조차 금지되어 있어. 마음껏 누구를 좋아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그 두근거림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데.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것만 해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네가 부러워. 이건 정말……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학교 다닐 때 모른 척하고 괜히 다니엘에게 끌고 다니며 네 마음 흔든 건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는 네게 질투가 나서였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아요, 왕녀님. 이해해요.”
“다니엘이 널 안 좋아할 수도 있어. 나도 억지로 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하지만 그래도 한 번도 다가가 보지 못한 네가, 한 번쯤은 노력해 볼 수 있는 거잖아. 한 번쯤은, 한 번쯤은 그래도 춤 한번 춰 보자고 좋아하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 기회 정도는 가져도 되지 않니? 나는 내 누명을 벗겨 준 유일한 친구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어.”
“……생각해 볼게요.”
아셰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젠은 가까스로 그 정도의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셰가 정말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혼란스러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분명 어린 시절 내내 그를 좋아했다. 연습장에, 책에, 자신도 모르게 다니엘의 이름을 끄적이고 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가 말을 걸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몰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강의실에 함께 있으면 아셰와 대화를 하더라도 그에게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훔쳐보며 혼자 견뎌야 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다니엘은 너무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반짝거리고, 여전히 동경하는 사람이지만 곁에 서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엄두도 못 낸 상대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오히려 비틀거리며 그녀의 집 문 밖에 서 있던 카이든을 근래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었나.
“……가야겠다.”
궁을 나서며 카이든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리젠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카이든의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다니엘에게 쓰이는 마음이 줄었다. 그러나 카이든이 생각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실수로 꿈이 얽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실도 아닌, 그저 꿈에서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고 감정을 헷갈리는 건 그녀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가자. 가서 확실히 하자.”
아셰 말대로, 다니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때만큼은 카이든을 신경 쓰지 말고, 다니엘에게 품은 마음을 다시 확인해 보자. 여전히 그를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지, 아니면 첫사랑으로 이미 아스라이 멀어졌는지. 그녀는 마음을 먹고 크게 심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