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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256)

22화.

리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 먹지 못한 샐러드만 바라보았다.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너무 큰일이다. 고작 수사국 말단이 왕비를 겨냥한 수사를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니. 물론 뒤에 다니엘이 있는 듯했지만 다니엘도 이제 막 왕위 계승권자에 이름을 올린 기반 없는 왕자일 뿐이다. 리젠이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 동안, 카이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의심의 기간’ 중에 왕족은 공식적으로 수사국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할 수 있어. 다니엘은 수많은 수사국들의 경력자들을 제치고 협조 조사원으로 나를 지목했어. 나는 윌리엄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다니엘의 비호 아래 자율권을 얻은 김에 6년 전 화재도 조사하는 중이야.”

“아…….”

“마법에 의한 화재라고 가정하고, 당연히 사주한 사람이 다음으로 할 일은 증인을 죽이는 거겠지. 그래서 화재 이후 같은 사인으로 죽은 마법사들의 명단을 찾아봤어.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한 약초상의 고객이었고, 그들 중 다섯 명의 유골을 골라 온 거야.”

“……사인이 뭐야?”

“마력의 역류.”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있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고모의 자료들을 보면…… 고모가 굉장히 열심히 개발하려다 실패한 시약이 있어. 그런 시약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정말로 많이 연구한 시약.”

“……뭔데?”

“마력증폭약.”

카이든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계속 실패한단 말이야. 계속해서, 엄청난 부작용이 나타나서 결국엔 개발해 내지 못했어. 어제 아침, 다니엘 왕자님이 찾아와 소수의 마법사들이 큰 화재를 낼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 건 그것 때문이야. 마력증폭약 같은 건 없어. 자연을 거스르는데 어떻게 개발이 가능하겠어.”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그중 하나의 부작용이…… 마력의 역류에 의한 사망이야. 수천 개도 넘는 고모의 낙서같이 널브러진 메모 중 하나지만,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매일같이 들여다본 나는 알아. 아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왕국에 나뿐일 거야. 고모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약물을 만들어 내던 사람이니까.”

리젠은 카이든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르엘라는 약물에서 생길 수 있는 조금의 부작용도 걱정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를 발표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르엘라가 개발해 낸 불완전한 약이 100명을 넘는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르엘라가 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아니, 만약 르엘라가 누명이라도 쓴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할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너무 명확하잖아……. 고모가 개발한 마력증폭약을 먹은 마법사들이 화재를 냈고, 부작용으로 죽었어. 아마 부작용에 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겠지. 마법사들이란 마력에 미친 사람들이니 분명 미심쩍은 약이어도 먹었을 테고.”

“리젠.”

카이든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고모…….”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를 카이든이 천천히 감쌌다. 현실에서는 처음으로 느껴 보는 그의 단단한 품이 따뜻해서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연사는 맞을까?”

아무 말 없이 안아 주는 카이든의 품에 안겨 그녀는 엉엉 울었다. 

“……정말로, 연구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건 맞을까?”

카이든은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르엘라가 죽고 나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한 번도 이렇게 울어 보지 않았다. 르엘라는 항상 말해 왔다. 결핍된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굳게 잡고, 밝고 곧게 자라야 한다고. 어지럽고 나쁜 생각들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도록 뭐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엄마가 나 때문에 죽고, 그런 나를 아빠는 버리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내 인생까지 망가트리지 말라고. 

그래서 르엘라가 죽고 나서도, 그럴수록 흐트러지거나 망가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았어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펑펑 우는 것보다 책 한 페이지를 더 보는 것이 르엘라의 가르침이었다. 펑펑 울어 봤자 달래 줄 사람도 없으니까.

“리젠.”

카이든은 문득, 아주 예전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정말 아주 옛날에, 열일곱 살의 그를 리젠이 안아 주는 꿈을 꾼 적 있다. 그때의 그처럼, 르엘라를 잃고 세상에 혼자가 된 그녀를 안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히끅, 아까 전만 해도…… 히끅, 날 어떻게 믿느냐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그런 애한테 안겨서…… 히끅, 뭐 하는 건지…….”

리젠이 훌쩍이며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품이 따뜻해서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미안해.”

“미안하면, 너.”

그녀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네 개인적인 조사에 끼워 줘.”

“……뭐?”

“그 개인적인 조사, 나도 함께하겠다고. 진실을 밝혀야 할 것 아니야. 고모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나도 관계자야. 관계없는 사람 아니야.”

“리젠, 상대는 왕비야. 난 사실 죽음까지 각오한 사람이야.”

“나도 각오하는데.”

리젠이 눈을 비비고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난 수사국 지망이었던 에이스야. 방해가 되지는 않을걸.”

“이건 그거랑 달라.”

“너처럼 수사국에서 이런저런 출장 다니는 척하며 발로 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약속해, 나도 끼워 주겠다고.”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카이든은 그녀의 작은 손을 보며 망설이기만 했다.

“얼른. 언제까지 혼자서 그러고 있을 거야? 다니엘 왕자님이 네 편인 건 알겠지만, 왕족은 왕족이야. 동료가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 되지 않겠니?”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부어오른 두 볼을 감쌌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툭 하고 떨어졌다. 

“리젠.”

그녀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있잖아. 요새는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좀 덜한데, 옛날에 한때 네 꿈을 꽤 자주 꾼 적이 있었어.”

“……어?”

그녀의 몸이 굳었다. 카이든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땐 너한테 관심도 없었을 때인데, 왜 이렇게 자주 꿈에 나오나 싶었어. 도대체 왜 그런가 싶었지.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잘 믿지 않지만…….”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어떻게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꿈에 나왔나 보다.”

“어…….”

“어둡고 외롭고 힘들던 길에…… 누군가 손 내밀어 줄 사람이 있다고…….”

그가 리젠의 볼에서 손을 떼고, 어설프게 내밀어져 있던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려고 꿈에 나왔나 봐.”

리젠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아프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숨겨야 한다는 욕구가 너무 강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숨겨야 한다. 이제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말했을 때의 카이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다.

* * *

“물론, 개국 기념일 연회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많은 서민들의 삶에 직결되어 있고요. 그렇지만 국상 중입니다.”

테스티는 귀족원 회의에서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국왕과 태자가 하루 만에 다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개국 기념일 연회를 평년과 같이 여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얄궂게도 아메탄 왕국의 개국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개국 기념일은 몇 안 되는 아메탄의 성대한 행사였다. 개국 기념일에는 각 영주들이 여러 지역의 풍토를 반영한 축제를 열고, 가장 화려한 성을 열어 무도회를 개최했다. 개국 기념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설레는 밤을 기도하는 처녀 총각들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들뜬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하루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농수산물과 의류산업, 각종 예술계의 공연팀 등이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 온 터였다.

“하지만 연회를 취소한다면 백성들의 상심이 너무 큽니다. 준비된 행사이니 손해도 막심하고요. 연회까지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안에 모든 것을 취소하라고 하면 연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손해가 너무 커요.”

귀족원들의 반대가 이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다니엘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아무리 국왕이 백성의 어버이라 할지라도, 왕족의 급작스러운 변고가 개인의 삶을 망가트려서는 안 됩니다. 국상이라는 대의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그 어떤 개인도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니엘.”

테스티가 어이없다는 듯이 끼어들었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왕궁의 무도회는 최대한 소박하게 축소하되 그 나머지 지역의 축제는 계획대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귀족들은 각자가 관할하고 있는 영주들의 여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론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스티는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릴 만큼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연회를 열지 못하는 것에 잠시 슬퍼하면서 정숙하고 슬픈 부인인 척한 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위해 양보하겠다는 듯한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중간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이미 계산된 것 같은 다니엘의 행동에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형과 아비가 죽은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어디 한번 계집애들 손을 붙들고 웃으며 춤을 춰 보려무나.”

그녀는 회의실을 나가며 다니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네가 그토록 앞에 나서고 싶어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미가 돼서 그 정도도 몰랐다니 면목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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