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56)

21화.

“어…… 이거…… 뭐지?”

성분 분석의 결과를 하나하나 적어 가며 리젠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다섯 구의 유골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그 성분 분석의 결과가 몹시 의외였기 때문에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아니야.”

백 명의 약제사에게 이 성분 분석의 결과를 물어본다면 백 명 전원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조합이며, 시약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토록 시약의 정석에 따른 조합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예 엉뚱하고 일반적인 시약 제조법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만한, 아주 기괴한 성분들만 모여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이 세상에 이러한 조합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르엘라의 노트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짐작조차 못한 채로 카이든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옹송그리고 카이든이 잠든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왠지 추웠지만 무언가 덮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쳐 잠든 카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든은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깜짝 놀랐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곤히 잠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수사국에 몸담은 이후로 세 네 시간 이상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을 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뿐한 몸에 놀라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

그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부엌에서 리젠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은 이미 다 마른 어제 빨아 놓았던 옷을 입고, 왠지 머쓱한 기분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발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한숨도 못 잤는지 리젠의 얼굴이 까칠했다. 별다른 제복이 없는 약제국은 출근 복장이 자유로웠는데, 라인이 예쁜 청바지에 흰 니트를 걸치고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그녀는 어제 잠옷을 입었을 때랑은 또 다르게 어려 보였다.

“이 정도면 되지? 내가 요리엔 소질이 없어서.”

“너무…… 민폐 끼치고 가네.”

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살짝 탄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막 내린 커피가 굉장히 지저분한 식탁에 어울리지 않게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부엌 창가에 잔뜩 늘어선 화분에서 이런저런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만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출근 늦은 거 아니야?”

“수사국은 정해진 출퇴근 시간 같은 거 없어. 그냥 눈 뜨면 출근이야.”

리젠은 샐러드를 식탁 중간에 턱, 하고 놓은 뒤 자신의 빵에 잼을 바르며 이상한 기분에 피식 웃었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아침을 같이 먹는다. 카이든 역시 어색한지 연신 커피를 마셨다.

“생각해 보니까…….”

리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모 돌아가신 이후에, 이 집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처음이야.”

“그러고 보니, 너 말이야.”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남자한테 벌컥벌컥 문 열어 주고, 그러면 안 돼.”

“뭐?”

“이렇게 막, 하룻밤 재우고, 그러면 큰일 나.”

어이가 없어서 리젠의 눈이 커졌다. 카이든이 마치 여동생을 혼내듯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남자가 벨 누르고, 그러면 집에 없는 척해. 용건은 꼭 집 밖에서 말하라고 하고.”

“이봐요.”

그녀가 허허 웃으며 그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댁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문 두드리고 와서 잠까지 잤는데요?”

“그건 나니까 되는 거고.”

“뭐라고?”

“대다수의 남자들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나처럼 절제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리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꿈속에 있을 때 틈만 나면 낯 뜨거운 짓 일색이었던 카이든이 저런 말을 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리젠에게 더 잔소리를 하려던 카이든의 말을 그녀가 막았다.

“어제 성분 분석도 다 해 봤어.”

“……그래?”

“다섯 명 다 같은 성분이 나왔어. 만약 시약 때문에 사망했다면 같은 시약일 가능성이 높아.”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성분을 보여 달라고 말하려는 차에, 리젠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평온하게 말했다.

“이 다섯 명의 죽음을 왜 조사하고 있는지 말해 줄래?”

“……굳이 알 필요 없어.”

“성별도, 나이도 다 다른 사람들이던데. 다만 마법사인 것 같았어. 아직도 유골에 마력이 남아 있더라고.”

“내 개인적인 조사야. 너까지 낄 필요 없어.”

“그럼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네가 분석하라고 하면 분석만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런 뜻 아닌 것 알잖아.”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건이야. 널 굳이 끼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어차피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관계있을 것 같아서 그래.”

리젠의 표정에서 드디어 웃음이 사라졌다. 감정을 숨기겠다고 그렇게 밤새 다짐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또 울컥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지금, 옛날에 르엘라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물론 가능성일 뿐이지만, 이 다섯 명의 마법사에게서 검출된 시약이…….”

그녀는 말을 끊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말해 줘. 도대체 뭘 조사하고 있는 거야?”

“진심이야?”

카이든의 표정 역시 굳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그동안 그가 얼마나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 대다수의 학교생활에서 카이든은 이런 날카로운 무표정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야, 카이든 루스, 지금 무슨…….”

“물론 너를 믿기에 비밀리에 시약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모든 일을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야. 미안하지만 안 돼.”

그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 이미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면 하나만 묻자.”

리젠이 다리를 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 사이에 어제의 편안한 기류와 비교가 되지 않는 긴장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시약의 제조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예측해?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다섯 명 이상을 죽인 사람이야. 그것도 남들의 눈을 피해서. 당연히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이겠지. 약물에 의한 살인은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비겁하고 계획적인 범죄야. 보통 악한 사람 아니면 할 수 없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예상했던 바였지만 카이든의 망설임 없는 얘기를 들으니 더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약의 성분…… 물론 확실한 건 없지만, 고모의 연구에 자주 나왔던 배합이야.”

“……뭐?”

“하지만 고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 고모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대체 고모가 왜 전혀 연관성도 없는 마법사들을 죽여? 연구 윤리로 치자면 사파엘 교수님만큼이나 꼿꼿한 사람이었다고.”

“수사국에 있으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카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럴 사람’ 같은 건 없어. 한 길 속도 모르는 게 사람이야. 단언하지 마.”

“그러니까 말해 줘.”

정말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에 눈물이 고여서 그녀는 손으로 눈을 거칠게 비볐다.

“무슨 일인데? 네가 조사하는 게 어떤 일인데? 무슨 배경인데? 고모가 잘못했으면 그 잘못을 밝혀야 하는 것도 내 일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 고모가 누명을 쓰면 어떡해? 모든 정황이 고모를 가리키는데, 고모는 이미 죽어서 변론도 못해. 나, 나는 진실을 알고 싶어. 이대로 고모의 흔적이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어.”

“…….”

카이든은 복잡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그들의 식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모의 손에 자랐다고 들었다. 게다가 원래가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 아니라, 르엘라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6년 전에 서쪽 별궁 연회에 화재가 있었어. 그때의 왕비였던 다니엘과 윌리엄의 어머니, 스잔나가 그 화재로 죽고 100명 넘는 서쪽 영주들이 죽었지.”

“……알고 있어.”

“이상하지 않아? 새로 지어진 별궁 전체에 그토록 빠르게 큰 화재가 난 것도, 조금의 진압이 안 되었다는 것도,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고 모두 다 죽었다는 것도. 자연적인 화재라면 분명히 화재 경보 시설이 작동했을 텐데. 마법일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마법으로는 그만한 불을 일으킬 수가 없어. 어마어마한 마법사의 수가 필요할 테고, 그 정도의 마법사가 움직였다면 분명히 문제가 되었을 거야.”

“그래서 수사가 미궁에 빠졌지. 게다가 그때 선왕이 수사를 중지하고 빠르게 지금의 왕비를 그 자리에 앉혔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그때 돌아가신 100명이 넘는 영주들 중 하나야.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노해서 수도인 아메니티로 올라왔어. 직접 수사해 보려고. 그리고 다니엘을 만났지.”

“…….”

“아무리 선입견을 버리고 사건을 냉철히 보려고 해도, 결론이 명확해. 테스티는 그 화재로 인해 왕비 자리에 앉아 루벤을 두 번째 왕위 계승권자로 밀어 넣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다니엘에게도 승계 순위가 밀렸겠지. 그리고 귀족들을 포섭해 루벤의 편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 놓은 상태야. 윌리엄 태자 폐위까지 도모했다는 것이 수사국의 극비 정보 중 하나로 남아 있어.”

“세상에…….”

“나의 가설은 이거야. 모두가 루벤을 왕으로 앉히기 위한 일이야.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윌리엄 시해가 이루어졌어. 너무 눈에 보이는 암살이기는 하지만, 급했던 거겠지. 물론 가설을 함부로 세우지 않는 것이 수사국의 수사 원칙이지만…… 너무나 명확하잖아? 모든 것이.”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의 눈이 비통함으로 가라앉았다.

“왕. 그래, 되고 싶을 수도 있겠지. 권력의 정점에 서고 싶겠지. 다 이해해. 높으신 분들의 정치 싸움도, 왕위 다툼도.”

“카이든.”

“그렇지만 그 대단한 왕위 다툼을 위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 우리 부모님은 그저 개죽음 당한 거야. 자연스러운 왕비의 죽음을 위해, 누구에게 희생되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어. 그런 사람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 나는 그건 너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해. 밝혀낼 거야. 밝혀내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