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56)

20화.

“이거 시약 분석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시약 분석?”

“시체 다섯 구에서 얻은 유골이야.”

리젠은 가라앉은 눈으로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오래된 뼈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험한 거 보게 해서 미안해…….”

“웃겨. 왕년의 수사국 지망생을 뭘로 보는 거야? 근데…… 수사국 일이면 바로 약제국에 정식으로 의뢰하지 그래? 원래 그게 원칙이고, 우리 집엔 아주 최신 시약은 거의 없어서…….”

“비밀리에 조사하는 거라 그래. 부탁해.”

“알았어. 씻고 와. 간단한 반응만 좀 보고 있을게.”

그녀는 능숙하게 핀셋으로 유골 조각을 들어, 르엘라의 노트로 가득 차 있던 테이블을 대충 치우고 기본적인 시약 분석에 필요한 약물들을 챙겼다. 보통 집에는 이런 실험 기구들이 당연히 없겠지만, 르엘라는 집에서도 온갖 시약 연구를 했던지라 약제국 못지않은 도구들이 남아 있었다.

머리를 올려 묶고 잠옷 차림 그대로 시약 반응을 검사하고 있다 보니, 카이든이 씻고 나왔다. 옷이 없어 리젠의 목욕 가운을 입은 그는 살짝 우스꽝스러웠지만 작은 가운 사이로 보이는 잔근육 때문에 리젠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단단한 것 같은데…… 그녀는 생각을 들킬까 봐 그의 눈도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옷이 마를 때까지만 신세 질게.”

“그, 그래.”

그녀가 일부러 분주하게 실험 도구들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수사국에서 모르는 건 없어.”

“이렇게 수사국 정보를 사적으로 써도 되는 거야?”

“난 직업윤리가 없어서.”

카이든이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리젠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물었다가는 카이든이 곤란해질까 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원래는 이렇게 함부로 시약 분석을 남들에게 해 주면 안 되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쨌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리젠은 그에게 큰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리젠이 날카로운 눈으로 시약 반응을 보며 말했다.

“지금 전부 시암 반응을 보이는 걸 봐서, 시약에 의한 죽음일 가능성이 있어. 5년이 넘은 오래된 유골이라면 성분 분석도 가능해.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이런 시약 반응은 한계가 있어. 뭐든 다 알려 주지는 않아.”

“성분 분석까지…… 가능해? 5년 정도는 된 듯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원한다면 해 보지, 뭐.”

카이든은 바쁘게 움직이는 리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젠은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거겠지? 아셰의 누명을 벗기는 일일 테니까 최대한 도와줄게.”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음…… 이제 성분 분석까지 하려면 세 시간 정도 더 있어야 돼. 옷도 말릴 겸 좀 쉬다 가.”

“고마워, 바보야.”

“바보한테 도움 받을 생각하는 너는 뭔데?”

리젠이 살짝 발끈하자 카이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더 하려다가, 카이든의 팔에 깊숙이 난 상처를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이건 뭐야?”

“별것 아니야.”

“기다려.”

그녀가 오도도 뛰어 어디론가 향하더니, 붕대와 약병을 하나 가지고 달려왔다. 목욕 가운을 걷어 올리고 그녀는 그의 팔에 붉은 색깔 약을 잔뜩 바르고 붕대를 야무지게 감았다.

“수사국 살벌하네.”

리젠이 씩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안 가길 너무 잘했는데.”

“맞아.”

카이든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넌 그냥 약제국에 가길 잘했어.”

“뭐래? 왜 약제국 썼냐며 도서관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땐 언제고.”

민망한지 그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가 딴청을 부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냥, 위험한 건 하지 마. 생각보다 험한 꼴 많이 봐. 넌 바보 같아서 안 돼.”

“아무래도 수사국 쓸 걸 그랬네.”

리젠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아주, 종합 시험 대련에서 널 완전히 꺾어 버리고 수석으로 들어갈걸. 감히 네가 바보의 바 자도 못 꺼내게.”

그가 소리 낮춰 웃었다. 그의 눈이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 엉망인 리젠의 거실을 훑었다.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는 도대체 언제 적부터 쌓여 있는지 모를 옷들이 뭉텅이로 뭉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뭐라고 알아볼 수도 없는 글자로 뒤덮인 노트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시약 반응 중인 유골들이 있는 테이블 위에는 온갖 책들이 쌓여 있었다.

“너 이러고 사냐?”

“왜?”

“너 지저분한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다.”

“내가 뭐가 지저분해?”

“네 책상은 도서관에서도, 약제국에서도 정신 사나웠으니까.”

“그래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다 알거든?”

“내가 나중에 이거 다 치우고 만다.”

“야, 그거 건들지 마!”

옷 더미를 살짝 집어 올리는 카이든의 팔을 재빨리 잡으며 리젠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에 속옷 있다고.”

“……아, 진짜.”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나른한 눈으로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네.”

“뭐가?”

“내가 한밤중에 이 꼴로 너희 집에 와도…… 5년 된 유골을 들이밀어도…….”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넌 안 놀랄 거라고 생각했어.”

“놀랐는데?”

“왠지…… 편안할 것 같더라.”

“난 불편한데?”

부루퉁하게 대답하는 리젠의 머리를 카이든이 꾹 눌렀다. 리젠은 기운을 빼고 앉아 있다가, 속으로 새삼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만일 꿈이었다면, 이렇게 단둘이 있는데 카이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현실에서는 그저 좋은 친구이자 동료일 뿐이다. 좋은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학창 시절에 추억이 없지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카이든이었다.

“……리젠.”

“왜?”

“옛날에…….”

“어.”

“네게…… 다니엘은 포기하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걱정이나 해. 수사국에 그렇게 싱글인 부장님들이 많다며. 연애할 시간도 없어서.”

“넌?”

“난 할 일이 많아.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 없어. 연애도 사랑 놀음도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지.”

카이든의 검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맞아.”

“너도 글렀어. 너한테 여유라는 건 고등학생 때부터 안 보였으니까.”

“제대로 봤네. 왕년의 수사국 유망주다워.”

리젠은 카이든의 눈에 걸린 웃음에 살짝 기분이 이상해졌다. 꿈속에서 카이든이 종종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곤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저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면, 정말로 그와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더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기 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핫초코라도 타 올 테니까.”

“먼지 쌓인 머그컵에 주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어? 제일 더러운 머그에 줄 거야.”

그러나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다시 그녀가 거실에 왔을 때에는, 카이든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머그잔을 내려놓고 지쳐 잠든 카이든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성격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자는 그의 얼굴과 살짝 풀어진 가운 사이의 몸을 바라보는 리젠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던 그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항상 혼자만 있던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좋았다. 그녀는 르엘라가 죽은 이후 자신이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채울 수 없던 허전함이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녀는 조용히 카이든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르엘라의 노트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잠든 카이든은 리젠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리젠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 정도로 지친 그에게 괜한 꿈을 꾸게 하기 싫어서 그녀는 졸음을 참으며 공부를 계속했다. 이런 연구와 공부만 하는 삶이 지겨워서 약제국에 들어가기 싫었는데 정말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카이든은 곤히 잠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깨지 않았고, 그녀는 잠이 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책에 눈을 고정했다. 눈을 비비던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유골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성분 분석을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래…… 글자 보지 말고 차라리 성분 분석을 하자.”

리젠은 시약을 잔뜩 가져와 이런저런 성분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성분 분석은 죽은 지 5년 이상 된 유골에서 개인의 마력이 빠지고 난 뒤 이질적인 성분을 추출해 내는 실험으로, 인위적인 성분을 분리해 낼 수 있어 혹시나 시약에 의한 죽음일 경우 그 성분을 추론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 이거……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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