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56)

19화.

“약제국까지 데려다줄게. 많은 도움이 됐어.”

“왜 이런 것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직접 행차까지 하시고.”

“카이든이 지방 출장을 가 버려서,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었어.”

리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꿈에 카이든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밤에 정상적으로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수사국은 출장도 많고 하루 일과도 엉망이라는데 아무리 튼튼한 카이든이라도 몸이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까 말한 마력증폭약…… 말인데, 그런 게 진짜 있을 수 있을까?”

“글쎄요. 불가능하다고 봐요. 마력은 위험한 힘이라서.”

리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고모의 연구 노트에서 꽤 많이 보이는데 시도하는 족족 실패해요. 부작용도 다양하고. 고모가 그 정도로 실패했으면 남들은 아예 근처에도 못 갔을 거예요.”

“그렇구나.”

다니엘이 팔짱을 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햇살에 그의 금발 머리가 반짝반짝 빛났고,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가 매끄러웠다. 약제국 입구가 보이자 다니엘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자신의 파란 눈을 맞추었다.

“리젠, 고마워.”

“뭘요, 이런 걸 가지고.”

“안경 잘 어울려.”

“……네?”

리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니엘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네…… 네! 왕자님도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힘내세요. 저는 고모가 돌아가시고…… 망가지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애를 썼어요. 혼자 서는 게 어려워도, 계속 노력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다니엘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나 보이던 다정한 눈동자가 아니라, 다소 놀란 눈동자였다. 리젠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왕자님 생각하는 사람들 생각하며, 이런 화려한 장식들이 너무 무거워도 힘내세요. 이런 거 원래 안 좋아하셨던 거 알아요.”

“……리젠.”

그가 조용히 웃었는데, 처음으로 조금 슬퍼 보였다.

“르엘라가 하늘에서 널 보고 있다면…… 정말로 자랑스러워할 거야.”

“당연하죠!”

리젠이 일부러 과장되게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나이의 르엘라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고, 약초학에서의 성과 빼고는 훨씬 뛰어난데요.”

다니엘이 그녀를 보며 쿡쿡 웃었다. 별로 웃기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렇게 순수한 유머를 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씩씩하게 걷고 있는 리젠을 보며 그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리젠.”

“네?”

“지금 여기, 약제국 뒤편의 정원에서 우리 처음 만난 거 기억나?”

리젠은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르엘라가 열세 살의 그녀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아셰는 새침하고, 다니엘이 웃어 주었던 그날.

“모든 순간이 다시는 안 와.”

다니엘의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직 아무런 의무도 없고, 모두가 살아 있고, 품어야 할 독기 같은 것도 없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하겠지만……. 리젠, 시간을 돌리는 약 같은 건 없겠지?”

“……없지만…… 연구해 보죠, 뭐.”

그녀는 가볍게 대답하면서도 순간 울컥했다. 열세 살 때, 고모는 미치기는커녕 너무나 멋있었고 처음 와 보는 왕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잘생긴 동갑내기 왕자님을 보고 감격에 겨웠던 그때가 새삼 생각나 그녀도 약간 서러워졌다. 그때는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슬픈 일도 많이 생긴다는 것을 몰랐다.

함께 옛날 생각에 잠겨 울적해진 리젠은 다니엘과 함께 약제국의 앞까지 왔다가 약제국 정문 앞에 있던 사파엘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다니엘을 공손하게 배웅한 사파엘이 그녀를 끌고 약제국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선 사파엘이 도끼눈을 떴다.

“왜 왕자님과 단둘이 있지? 그것도 직장에서?”

“아, 왕자님이 뭣 좀 물어보시더라고요.”

리젠은 숨을 삼키며 공손히 대답했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리젠은 재빨리 덧붙였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네가 수사국 지망이었다는 건 안다.”

사파엘은 다니엘과 리젠이 함께 있는 것만 해도 큰일이 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약제국의 사람이잖아.”

대학 시절 교수로 만났던 사파엘보다 직장 상사로 만난 사파엘은 훨씬 더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이었다.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훈계를 들었다.

“마법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약초학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어. 우리는 가장 매혹적이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거야. 왕족들의 정치적 싸움에 개입할 이유가 없고, 특히나 약제국 소속이라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심해야 해. 시끄러운 사건들은 수사국이 알아서 하라고 해.”

“죄송합니다.”

“학교는 졸업했어. 왕자님과 왕녀님은 너와 이제 아주 다른 사람이야. 옛날처럼 친구로 지내면 안 되고, 믿어서도 절대 안 돼.”

“네?”

“왕족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야. 얽혀서 좋을 일 하나 없어. 자기 자신도 도구로 쓰는 사람들인데, 남들은 오죽하겠니.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괜히 이용당하지 말고…….”

사파엘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인 것을 리젠은 놓치지 않았다.

“……왕족하고는 아예 어울리지도 마.”

리젠은 너무 극단적인 말에 눈을 깜빡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파엘이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를 돌았다.

“이건 상사가 직원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 조카한테 하는 말이야, 리젠 하카트.”

르엘라의 연구 노트는 체계도 없고 깔끔하게 정리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약초학 실력을 늘리는 데에는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리젠은 르엘라의 악필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어떻게 새로운 시약을 만들고, 해독제를 생각해 내는지 독창적인 방법을 많이 익혔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들을 보면서 그녀는 확실히 르엘라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약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르엘라의 시약 제조법은 이렇게까지 창의적이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제조법으로 등록하려면 굉장히 보수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 제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연구한 흔적들을 보면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엉뚱한 조합들이 많았다.

“나중에, 내가 해독제만 만들고 나면…….”

그녀는 집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녀의 집에도 여전히 르엘라의 연구 노트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약제국에서 대출한 책과 노트들을 대조해 가며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고모의 이 모든 메모들을 정리해서 책 한 권 써야겠다. 진짜 아메탄 왕국 약초학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천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내지?”

퇴근 후에도 르엘라의 악필을 보고 있자면 머리가 더 핑핑 돌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르엘라를 생각했다.

‘리젠, 시약은 신기하지만, 무조건 위험한 거야.’

르엘라는 어린 리젠을 안고 시약을 만드는 것을 보여 주면서 속삭여 주곤 했다.

‘우리가 시약을 잘못 만들면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무조건 열 배, 백 배 책임을 져야 하고.’

그녀는 르엘라에게 배운 대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카이든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끝도 없는 연구와 공부가 지겨워질 때면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래서 지금 혼기가 찼는데도 자꾸만 들어오는 소개팅조차 거절하고 있지만.

“내가 미쳤었지. 진짜 돌았었어.”

리젠이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놈의 짝사랑이 뭐라고……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그딴 짓을 하다니. 뭐에 홀려 있었지, 뭐. 사랑에 눈 뒤집히면 답도 없다더니…….”

오늘 아침에 만난 다니엘은 여전히 존재만으로도 빛이 났고,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이 밀려 들어왔지만 왠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마치 같은 교복을 입고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던 그때는 너무나 먼 과거 같고, 이제는 함께 산책을 한 것만으로도 직장 상사에게 호되게 혼나는 상대가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결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다니엘의 생각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벨소리에 깜짝 놀랐다.

[딩동, 딩동.]

리젠은 벌떡 일어났다. 리젠과 르엘라가 둘이 살던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벨을 누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리젠의 유일한 친구인 아셰는 왕궁에 살았으므로 이런 민간인의 집에 출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벨소리가 저런 소리인 줄도 몰랐던 그녀는 살금살금 걸어 문 앞에 섰다.

“누…… 누구세요?”

“나야.”

“카이든 루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등장에 그녀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흙투성이에 잔뜩 지쳐 보이는 그가 쓰러지듯 들어왔다. 리젠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여 재빨리 그녀의 옷이 잔뜩 쌓인 소파에 앉혔다.

“뭐, 뭐야?”

오늘 아침에 다니엘이 분명 그는 지방 출장 중이라고 했다. 그는 제복도 아니라 사복 차림이었다. 그가 재킷을 벗자 셔츠에 핏물이 보였다. 리젠은 비명을 삼키며 그대로 굳었다.

“……늑대 피야. 사람 피 아니야. 걱정 마.”

“일단 씻을래?”

“그럴 수 있을까.”

“욕실 저쪽이야. 어…… 우리 집엔 남자 옷이 없는데…… 어…….”

“괜찮아. 잠시 실례 좀 할게. 그 전에…….”

카이든이 재킷 주머니에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봉투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무심코 받아 들었다가, 느껴지는 무게감에 휘청거렸다.

“이거 시약 분석 좀 부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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