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56)

18화.

테스티는 차가운 표정으로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왕립종합대학의 졸업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길이 구불구불한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야무지게 살짝 미소를 지은 리젠의 흑백사진을 향했다.

“이 아이라고?”

“예.”

부하는 짧게 대답한 뒤 덧붙였다.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입니다. 약제국에 들어오자마자 시간만 되면 르엘라의 각종 연구물을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연구 기록뿐만 아니라 온갖 연습장이나 노트 같은 개인적인 자료도요.”

“없애 버려. 그런 르엘라의 개인 기록들은 못 없애?”

“그게…….”

부하가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약제국은 왕궁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2차 기관이고 기본적으로 연구를 위한 곳이라, 함부로 기록물을 없앨 수 없습니다. 후대의 연구를 위한 포석이 될 수 있으므로 절대 폐기하지 않거든요. 특히나 르엘라는 희대의 천재였기 때문에 약제국에서 모든 자료를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는 사명까지 갖고 있는 듯합니다.”

“루벤이 왕위에만 오르면, 그 거만한 왕국 산하기관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겠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

“객관성과 전문성은 무슨. 결국엔 왕궁의 심부름꾼 주제에 윤리는 더럽게 따진단 말이야.”

테스티가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르엘라의 자료에…… 혹시 뭔가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계집애가 뭔가 눈치채고…… 르엘라의 과거라도 조사하려는 건?”

“가능성은 있습니다.”

“계속 감시해. 특이 사항 있으면 당장 말하고.”

“오늘 다니엘 왕자님이 그녀를 찾아가셨습니다.”

“다니엘이?”

“동기니까, 아무래도 친한 사이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뭐, 입사 초기라서 뭣도 모르고 아직 친구로 알고 있나 보지. 1년만 지나도 서로의 주제를 깨닫고 멀어질 사이인데.”

“그런데 이 남자 말입니다.”

부하의 손가락이 테스티의 앞에 있던 졸업앨범 중 같은 페이지에 있던,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무표정의 잘생긴 남자를 찍었다.

“카이든 루스?”

테스티가 선이 굵고 마치 사진 밖을 노려보는 것 같은 강한 눈매를 지닌 청년을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이번 기수 수사국 수석이지요.”

“아…… 기억나. 제일 먼저 임명장 받은 그, 훤칠하고 자세가 곧던 애.”

“확실하지는 않지만, 6년 전 화재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뭐?”

“루스 지방의 영주도 그 사건 때 죽었지요.”

테스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좋지 않군. 아셰와 이 계집애가 친한 사이고, 다니엘과 이 남자가 또 친한 사이면, 분명히 이 르엘라의 조카와 루스 집안의 수사국 직원도 연관이 있을 테니.”

“그렇죠. 실제로 다니엘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에도 동행했다고 합니다.”

“유심히 지켜봐야겠군. 물론…….”

그녀가 부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불씨는 없애는 게 좋겠지.”

부하가 충성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테스티가 졸업앨범을 탁, 하고 덮었다.

“다니엘은 아직 애송이야. 수족이 뻔히 눈에 보이는군. 천천히 없애. 이쪽은 왕위를 오랫동안 준비해 왔어. 두 달 만에 뒤집힐 수는 없지.”

리젠은 퇴근하고 나서 혼자 이것저것 중얼거리며 낮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르엘라의 기일이다. 벌써 르엘라가 죽은 지 5년이다. 그녀가 수선화꽃 한 다발을 들고 작은 공동묘지로 향했다. 저 멀리에 르엘라의 소박한 묘지가 보였다.

“이번에도 있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르엘라의 비석 앞에 섰다. ‘차르티 수도원’에서 온 흰색 국화 바구니 하나와 붉은 장미 꽃다발. 르엘라의 기일마다 거짓말처럼 놓여 있는 꽃들이다. 차르티 수도원이라면 그녀의 친부가 있는 수도원이다. 리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옛날, 르엘라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수도원에 갈 때마다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거부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르엘라는 갔다 오는 길, 리젠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서 열 살이 된 이후에는 절대 데려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리젠은 아버지를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매년 르엘라의 묘지로 오는 꽃바구니로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엄마는 차르티 수도원 앞에 있는 바다에 화장하여 뿌렸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니 가 볼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사진도 없어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고모만큼의 애정은 없었다. 르엘라의 묘지 앞에 선 리젠이 붉은 장미 꽃다발 옆에 수선화를 놓았다.

“도대체 누구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고모, 장미꽃 가시 있다고 싫어하는데. 빨간 장미는 제일 싫어하고.”

리젠은 항상 매년 놓인 붉은 장미 꽃다발을 잘못 온 꽃으로 결론 내렸다. 르엘라가 정말 싫어하던 꽃이기 때문이다. 리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르엘라는 핏빛에 가시까지 있다며 붉은 장미를 싫어했다. 어딘가에서 자꾸 잘못 배달 오는 것이 분명했다.

“고모, 잘 지내고 있어?”

그녀가 묘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나는…… 해독제 만드느라 바빠 죽겠어. 고모의 그 악필 쳐다보느라 엄청 힘들어.”

르젠의 조곤조곤한 말이 조용히 묘지에 울렸다.

“가만히 앉아서 연구만 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급하고 절실하니까 그렇게 되긴 하더라. 그래도 꽤 많이 만들었어. 어젯밤에는 거의 성공이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니까.”

날씨가 좋아서 리젠의 길게 늘어트린 갈색 머리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리젠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왕궁도 난리야. 전하도 저하도 다 돌아가시고, 다니엘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시겠다고 하고 있어. 나한테 다니엘이라고 말 편하게 하라며 빙긋 웃어 주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왕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것 같아. 요새는 더 빛이 나시는 것 같고……. 에이, 혼자 말하니까 역시 재미없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물을 슥슥 닦고 코를 훌쩍였다. 멍하니 앉아서 파랗게 높은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혼자만의 침묵을 깨고 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카이든 루스라는 애가 있는데…….”

또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우우……. 걘 너무 복잡해. 어쨌든, 고모, 난 이제 갈 거야.”

리젠은 깨끗하고 빛이 나는 묘비를 다시 한 번 닦으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고모가 날 이렇게 잘 키워서 나 되게 잘 살아. 고모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서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책임지고 걸을 수 있어. 해독제를 다 만들면 휴가 겸 긴 여행을 떠날 거야. 그리고 또 어떻게 잘 살아볼지 고민해야지.”

그녀의 시선이 나란히 놓여 있는 꽃바구니와 두 개의 꽃다발로 향했다. 그녀가 비뚤게 놓인 장미꽃 다발을 바로 하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곳이 제자리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일단 우리 고모 것이니 딴생각하지 마라. 이름 모를 분, 어쨌든 감사해요. 내년에도 봐요.”

3. 좋은 동료

리젠은 출근길에 다니엘을 만났다. 다니엘은 왕궁 산책을 하다가 약제국까지 왔노라고 황급히 둘러댔지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의아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을 보고 다니엘이 어색하게 말했다.

“이,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한데…….”

리젠은 감지 않고 대충 묶고 나온 머리와, 처음부터 쓰고 나온 동그란 안경이 신경 쓰였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아…… 네. 10분 정도만이요. 늦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녀는 이것이 꿈인가 싶어 천천히 걸었다. 생각해 보니 다니엘과 단둘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늘 카이든이나 아셰가 곁에 있었다. 다니엘은 ‘의심의 기간’ 중 점점 더 화려한 옷을 입었고, 실제로 이제 더 이상 별다른 권력이 없는 왕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곱상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귀티가 나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그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니엘이 은근슬쩍 물어왔다.

“리젠, 네 선택 과목이 마법이었잖아.”

“네.”

“화염 마법의 경우…… 어느 정도의 불꽃이 나오지?”

“얼마 안 돼요.”

리젠이 공중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리젠의 손바닥에 조그마한 불씨가 생기더니 화르륵 탔다.

“마력 자체가 많이 줄어서, 고대 기록처럼 산을 태우고, 뭐 그런 건 불가능하죠.”

“마법사의 실력의 문제가 아니고…… 마력의 문제인가?”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순수한 마법 그 자체는 점점 더 쇠퇴해 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선택 과목이 마법이 아닌 이상 마법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자연 상태의 마력을 자신의 몸에 갈무리하고, 그 마력을 쓰는 것이 마법 실력이죠.”

“그럼 마력이 엄청나게 많으면, 큰불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없는 마력을 어떻게 많이 모으겠어요? 마력증폭약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리젠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고마워.” 

다니엘이 씩 웃으며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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