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안 그래도 막내인데 요새 고양이 손까지 빌리고 싶은지라 너무 많이 부려먹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잘 되었군요. 데리고 가서 바람이라도 쐬어 주시지요.”
루카스의 부드러운 말에 다니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국장실을 나가 뚜벅뚜벅 걸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카이든의 자리에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단정한 검은 제복 차림의 그가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산책 가자. 국장님께 허락 받았으니까.”
“네.”
카이든이 천천히 일어섰다. 다니엘은 일을 해도 변하지 않는 그의 무표정을 보며 씩 웃었다. 좀 반가운 표정이라도 지어 주면 어디 덧나나. 처음 만나는 날부터 지금까지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수사국이 더 바빠질 거야.”
수사국을 나서, 숲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기 시작하며 다니엘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정식 조사서를 의뢰했거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너 아니어도 윌리엄 태자님의 급사는 조사할 사안이야.”
카이든은 둘만 있을 때에는 반말을 쓰라는 다니엘의 말에 주저 없이 반말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루벤이 왕위에 올라서 조사를 멈추라고 하면 멈췄겠지.”
다니엘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눈에 힘을 주고 중얼거렸다.
“6년 전, 그 화재처럼.”
“진실 앞에 객관성을 유지할지라도, 수사국은 어쨌든 왕궁 산하기관이니 무조건 왕의 명령을 따르니까.”
“카이든.”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네가 준 명단, 몰래 왕궁 출입 마법사들의 기록과 대조해 봤어.”
카이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당시 후궁이었던 테스티의 왕궁에 엄청나게 드나들던 마법사가 있어. 캐서린이라는 여자인데 테스티의 사촌 동생이야. 작은 마법 약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특이 사항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점이야. 나도 몇 번 본 것 같아. 무도회란 무도회에는 온갖 보석을 두르고 항상 참석하거든.”
“캐서린. 조사해 볼게.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나는…… 가능하다면 ‘최종 재판’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어.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도, 6년 전의 화재도. 마음 놓고 조사할 수 있는 지금,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다 밝혀내자. 윌리엄 형이 왕이 되기까지를 기다렸지만, 최악의 경우 루벤이 왕이 되면 영영 기회를 놓칠 거야.”
다니엘이 머리카락을 흔들며, 장식으로 짤랑이는 소매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번 사건으로 느낀 게 있어.”
“뭔데?”
“나중으로 미루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즉시 움직여야 해. 윌리엄이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 당장, 즉시…….”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엘을 따라 걷다가, 흠칫 놀라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약제국.”
다니엘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약제국에도 정식 수사 의뢰를 맡겨야지.”
“약제국의 협조는 수사국이 알아서 구해. 거긴 2차 기관이라 연구 결과만 전해 줄 뿐이야. 네가 직접 갈 필요 없어.”
카이든은 자신이 왜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말했다. 다니엘은 카이든의 약간 못마땅한 듯한 어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한마디 말을 하는 거랑 안 하는 거랑 다르겠지. 간 김에 리젠도 좀 보고 올까?”
“…….”
어제 카이든은 또 리젠의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니엘과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라는 내용의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는 도대체 꿈속에서 자신이 왜 그렇게 리젠을 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리젠은 다니엘을 좋아하고, 다니엘은 파혼했기 때문에 짝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이제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처지도 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고 복수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살기로 결정했는데. 그때까지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그렇게.
“수사국과 약제국에 우수한 친구들이 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다니엘이 카이든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카이든은 차마 그를 보고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약제국장은 출타 중이었다. 카이든의 말대로 약제국은 2차 기관이고, 직접적인 왕궁의 의뢰를 받기보다는 수사국에게 증거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니엘의 등장에 꽤나 당황한 듯했다. 약제국장이 출타했는지라, 다니엘의 접대는 그를 직접 대학에서 가르쳤던 사파엘이 맡았다.
“왕자님, 이런 전례를 만들까 봐 무섭습니다. 앞으로는 약제국에 되도록 발걸음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실례가 되는 일인지 몰랐습니다. 교수님께서 이토록 당황하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왕자님의 선의와 안타까움은 당연히 짐작하는 바지만…… 이런 사건에 있어서 약제국은 사실 수사국에 자문을 해 줄 뿐이고, 원래의 설립 목표는 국가 경쟁력을 위한 신약 개발과 각종 불법적인 약물 단속입니다.”
“……그렇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매정하다 생각되더라도 왕국 산하기관에서는 원칙을 가장 중시 여기는 것이 기본 윤리이므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파엘이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때의 제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네.”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르엘라의 영향이 있어서, 제가 약제국을 너무 친근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르엘라는 왕족들에게 기본적인 약초학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했었다. 르엘라의 이름이 나오니 사파엘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연구원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왕족의 이해관계와 얽혀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가 없었습니다.”
사파엘에게 인사를 하고 약제국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책임감이 없는, 왕위에서 멀었던 왕자 시절에는 몰랐다. 예전에는 가볍게 했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제국 뒤의 정원으로 향했다. 약제국은 왕궁과 가까운 위치에서 숲에 둘러싸여 있어 바람을 쐬고 산책을 하기에 좋았다. 카이든에게 리젠을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얘기했었는데, 과연 작은 벤치에 리젠과 카이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네 아직도 안 친해졌냐?”
그래도 마음 편한 것은 옛 친구들뿐이라, 그는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들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 리젠과 카이든은 이상하게 서로를 의식하며 친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내외하는 거야?”
“왕자님, 오셨습니까.”
리젠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리젠, 제발 편하게 해. 너무 어색해. 너마저 그러지 마.”
“그럴 수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다니엘이 공손하게 모은 리젠의 두 손을 보고 서운한 듯 허허 웃었다.
“심려가 크시지요. 지난번 아셰 왕녀님의 궁에서 뵈었을 때에는 위로도 못 건네 드렸습니다.”
“슬퍼할 틈도 없어.”
다니엘이 그들의 맞은편에 놓여 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슬퍼하는 건 ‘최종 재판’이나 끝나고. 사실 윌리엄 형이 죽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은 안 나지만. 어쨌든 고마워, 리젠.”
그가 리젠을 보며 환히 웃었다.
“네 덕분에 아셰의 감금이 풀렸어. 어차피 결정적 증거가 없어 체포까지는 못 했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혐의가 풀렸다는 게 어디야.”
다니엘이 리젠의 어깨를 다독였다.
“정말 고마워.”
리젠의 볼이 살짝 상기되는 것을 보며 카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리젠은 하나로 묶은 머리를 괜스레 매만지다가 슬쩍 카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아, 왜 어젯밤 꿈에 그런 얘기를 해 가지고…… 괜히 사람 어색하게…….’
다니엘을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당연히 없다! 다니엘은 정말로 고귀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어떻게 불순하게,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 뻔한 남자를 대상으로 낯 뜨거운 상상을 한단 말인가. 물론 카이든과는 너무 꿈을 자주 꾸니까 몇 번 해 본 적이 있지만…… 리젠은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상한 잡생각들을 멈추려고 애를 쓰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감금이고 말고가 있나요. 어차피 아셰는 궁에서 그대로 사는데.”
“그래도, 유력 용의자라고 지목되는 것보다는 낫지. 군인들의 감시에서도 벗어나고.”
다니엘이 금붙이로 번쩍거리는 재킷을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아셰와 함께 르엘라랑 산책 많이 왔었는데.”
“여기요?”
“보통 여기서 멈췄지. 조금만 더 가면 루벤의 궁이 나오니까. 약제국 위치가 워낙 궁하고 가까워서.”
“아…….”
“리젠.”
“……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머뭇거리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리젠이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윌리엄의 죽음에 대해 수사국의 의뢰를 받아 조사하다가, 이상하거나 묘한 일이 있으면 꼭 내게 말해 줘. 약속해 줄 수 있어?”
“당연히 국장님께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저 같은 막내에게 그런 중요한 일까지 오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나 카이든이 네게 뭔가 약물적으로 자문을 구하면 꼭 알려 줘. 윌리엄의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네.”
리젠이 밝게 웃었다.
“카이든하고는 이미 좋은 동료인데요.”
좋은 동료……. 카이든은 이상하게 씁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