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56)

15화.

카이든은 긴 다리를 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만큼이나 검은 제복과 어울려서, 그의 분위기는 더 차갑고 딱딱해 보였지만 학생 때와 다르게 성숙한 남자의 느낌이 확 들었다.

“다 퇴근했어. 수사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젯밤 우리 밤샘 근무했거든.”

“역시 삶의 질은 약제국이 좋구나. 우리는 밤샘이 일상이라 아무도 퇴근 못 했어.”

“우리는 의견서만 내면 되니까. 상황 판단은 수사국에서 하셔야지.”

“근데 넌 왜 퇴근 안 했어?”

“아…….”

그녀가 책상에 너저분하게 쌓인 연습장들을 황급히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개인적으로 뭐 좀, 공부하는 게 있어서.”

“그때 말한 그 일이구나.”

“그런 셈이지.”

그녀는 밀려오는 하품을 꾹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카이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바보 같네. 어제 같이 특별 근무한 날은 좀 쉬지 그랬냐.”

“그렇게 하루하루 핑계 대고 빠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이건 의지의 문제라고. 끝내 실패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으면 안 돼.”

“……아쉬움.”

“이렇게 해도 안 될 수도 있겠지.”

리젠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아쉬움이 없잖아. 나중에 실패할 때, 지금의 나를 원망하긴 싫어.”

카이든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그저 악바리같이 뭐든지 열심히 하는, 그냥 성취 지향적인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갈수록 생각보다 부정적인 애다. 이 아이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성공보다 실패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꼭 성공해야지, 라는 마음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인 듯했다.

그래서 전혀 잘될 가능성이 없었던 다니엘도 그렇게 열심히 좋아했었나. 

“근데 여긴 웬일이야?”

“일 때문이야.”

그가 서류 가방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며 말했다.

“조사하러 왔다가 너만 있어서 좀 놀랐고, 너무 곤히 자길래 못 깨웠고.”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볼게.”

카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펜을 돌렸다. 편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리젠은 흠칫해서 그의 어깨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야, 왜 이래? 무섭게.”

“아무리 동기라도 조사 대상자야. 수사국 원칙상 예외를 둘 수는 없어. 너뿐만 아니라, 그게 설사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수사국 참 대단하네.”

차갑게 이어지는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긴, 카이든의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정말 누구보다도 수사국에 잘 어울렸다. 무정하고 무뚝뚝하며 차갑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던 그를 생각하며 그녀가 물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 올렸다.

“어제 왜 아침에 아셰 왕녀님의 궁에 방문했지?”

“왕녀님이 제국에 갈 수도 있다고, 제국의 약초 책을 부탁했어. 종종 약제국에 있는 희귀 서적을 빌려 달라고 하셨으니까. 알잖아, 왕녀님은 원래부터 약초학을 좋아하셨다고.”

“거기서 차를 마셨나?”

“응, 윌리엄 태자님이 나보다 먼저 다녀가셔서, 이미 한 번 우려낸 차라고 하셨어.”

“그리고 얼마나 거기에 있었지?”

“30분 정도?”

“무슨 대화를 했어?”

“그냥, 혼담이 들어와 제국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 옛날이 그립다는 얘기…….”

“또?”

“또라니?”

“30분 동안 그런 얘기만 했을 리 없잖아.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말해 줘야지.”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

“말하지 않는 건 자유지만, 그래도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너는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유일한 단서야.”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말해, 리젠. 그게 나아. 어차피 수사국에서 조사해서 안 나오는 건 없어.”

리젠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카이든이 조용히 기다렸다. 

“……학창 시절에…….”

못 말할 건 또 뭐야. 리젠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꺼냈다.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다르다. 게다가 꿈에서 카이든과 별짓을 다했지만 꿈속에서라도 서로 좋아한다는 말은 한 적 없었다. 그저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에 현실을 자꾸 혼동하면 안 된다고 그녀는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다니엘 왕자님 좋아하는 거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카이든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마음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슬퍼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리젠은 이상하게 카이든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어차피 카이든도 그녀가 학창 시절 때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게 다야. 그러다가 전하의 승하 소식을 들었어.”

“……그래.”

카이든이 메모지와 펜을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피곤해서 까칠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리젠이 한숨을 폭 쉬었다.

“카이든.”

“왜?”

“커피 마시고 갈래? 약제국에서 끓이는 커피,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다?”

리젠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민망한 기분을 잊으려고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온갖 실험 기구들을 이용하여 현란하게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여러 비커와 증류기관을 거쳐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실험관에 담아 건네며 그녀가 씩 웃었다.

“이거 쉽게 마실 수 있는 커피가 아니야. 영광으로 알아.”

“그래.”

“나중에 약제국 와서 달라고 하지 마. 아무도 없으니까 한 잔 줄 수 있는 거야.”

“어.”

그녀가 대화를 시도해 봐도 카이든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 이래서 내가 얘랑 5년 동안 친해질 수가 없었지. 원래 이렇게 말이 짧은 애였으니까. 다만, 꿈속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조금 친밀해진 것 같았던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마시니까 잠도 깨고 좋다. 나도 오랜만에 밤새웠거든. 이제 옛날처럼 밤이 꼴딱꼴딱 안 새지는 것 같아. 수사국 갔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침묵이 민망하여 리젠의 말이 길어졌다. 카이든이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급히 시험관을 받아 든 그녀의 뒤로, 카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젠.”

“……어?”

“다니엘 파혼했더라.”

“아, 응. 뭐.”

카이든은 천천히 일어서서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리젠이 그의 뒷모습에 대고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뭐. 어차피 ‘의심의 기간’ 후에는 다시 결혼할 텐데.”

“만일 루벤이 왕이 된다면, 다니엘은 그를 위해 외교의 장기말로 쓰이지는 않을걸.”

“음…….”

“다니엘이 왕이 된다면…….”

“카이든.”

리젠은 그의 말을 자르고 싱긋 웃었다.

“……잘 가.”

카이든은 약제국 문을 나서며, 자신이 고작 이런 대화를 하려고 극도의 초과 근무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을 받아 리젠을 조사하는 일에 자원했나 싶었다. 정리 정돈을 잘 못 하고 난장판인 그녀의 책상은 여전히 너저분했고, 엎드려 잠든 그녀의 몸에 덮인 실험복은 몸집에 비해 너무 헐렁하여 마치 이불 같았고,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 위에 늘어진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밟혀 그는 눈을 문질렀다. 겉으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가진 작고 큰 빈틈들, 그 의외의 빈틈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 긴 하루였다.”

리젠은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서 잠이 들었는데, 카이든도 마찬가지로 퇴근하여 잠에 들었는지 꿈에 그가 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없이 쌓인 서류들, 각종 시체가 찍힌 흑백사진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와중에 카이든의 책상만 깔끔했다. 모든 서류와 자료들이 철저히 정돈되어 규칙적으로 철해져 있었다. 리젠은 혼자 서류를 보고 있는 카이든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 이 변태 같은 자식……. 이건 뭐야?’

그녀는 실험복 차림이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하얀 실험복을 꽁꽁 여미며 리젠은 볼을 붉혔다. 입사한 후부터 그를 만날 때마다 실험복 차림이었다. 아마 그의 무의식은 이런 것을 상상했나 보다.

‘이딴 생각을 하면서…… 내 앞에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고. 하여간 인간미 없다, 카이든 루스.’

“분명히 무언가가 있거든.”

카이든이 그녀를 흘끗 바라보고, 확인하던 서류에 볼펜으로 표시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잡히지 않는 큰 화재라면 마법인데, 마법도 이 정도의 마법사 수로는 절대 안 돼. 적어도 이 숫자의 열 배는 있어야 돼.”

“카이든.”

그녀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물었다.

“6년 전, 서쪽 지방의 화재 말하는 거야?”

“그래.”

꿈속의 그는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평소에 온갖 신경이 그 화재에 쏠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찬찬히 보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일 확률이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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