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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256)

14화.

다음 날 새벽, 다니엘은 긴급히 귀족원 회의를 개최했다. 누구나 윌리엄과 루벤의 대립 구도만 생각했지,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의 다니엘을 왕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테스티는 무표정으로 고고하게 앉아 귀족원들을 내려다보았고, 그 아래에 루벤과 다니엘, 아셰가 나란히 앉았다. 귀족들은 하루 만에 일어난 얼떨떨한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둥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루벤 형님이 다음 왕위 계승권자임에 이의가 없겠지만…….”

다니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형과 아버지를 잃었지만 눈물을 흘릴 여력도 없어 보였다.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아주 특이한 상황임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가 예상외의 기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그날 밤에 건강하던 윌리엄 형님이 돌아가셨어요. 게다가 약제국의 의견서에 따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에 의한 암살이라고 합니다.”

이미 다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테스티와 루벤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바가 많은지라, 저는 왕족의 직계 일원으로서 ‘의심의 기간’을 선언하려고 합니다. 저는 정비 출생인 남자로서 루벤과 동등한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형님 윌리엄의 뒤를 이어 이 일련의 사태를 철저히 조사하고자 합니다.”

뒤이어 행정국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귀족원 투표가 이루어졌다. 찬성표가 과반이 나왔으므로, ‘의심의 기간’이 두 달 동안 운영되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두 달 후, ‘최종 재판’에서 그동안의 미심쩍었던 증거를 모아 발표하며 투표로 다음 왕이 결정된다. 다니엘은 두 달 동안 테스티와 루벤이 윌리엄을 암살한 증거를 찾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6년 전 서쪽 지방의 대화재를 가능하다면 엮어 보려고 생각 중이었다.

“루벤 시지프 아메탄 2세, ‘의심의 기간’ 중 왕위 계승권자 후보에 등록합니다.”

‘의심의 기간’이 결정되었지만 루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이었고, 야심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았다.

“원래의 왕위 계승권자였으므로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 이상 제가 왕위에 오르겠습니다.”

그가 한마디 덧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이 이어 일어섰다.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 3세, ‘의심의 기간’ 중 왕위 계승권자 후보에 등록합니다.”

다음은 아셰였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합니다.”

대다수가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귀족원들의 동요는 없었다. 그녀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니엘의 지지를 선언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어제 거의 잠을 못 잤음에도 불구하고 한껏 청초하게 꾸민 그녀는 귀족원 사이에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윌리엄의 편이었으니까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하루아침에 지도자를 잃은 윌리엄을 지지했던 귀족원들이 어디를 택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했다. 눈가를 살짝 훔치는 것으로 극적인 효과를 더한 그녀가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원칙대로, ‘의심의 기간’ 중 정사는 제가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귀족원 분들의 많은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테스티가 마지막으로 일어나 선언하고, 짧은 귀족원 회의는 끝났다. 이제 2달 후에 다시 ‘최종 재판’에서 왕이 결정될 때까지 그들은 이 커다란 회의장에 모일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밀물같이 빠져 나갔고, 천천히 테스티가 일어났다. 기록을 정리하고 있는 행정국 직원 외에 마지막까지 회의장에 남은 사람은 루벤과 테스티였다. 테스티는 루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의심의 기간’이 있는 편이 우리에게도 좋겠지. 나중에 다른 말 나오지 않도록.”

루벤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은 테스티를 닮았다. 행정국 직원이 나가는 것을 보며 테스티가 이를 갈았다.

“아셰, 이 여우 같은 계집애. 마지막에 윌리엄 얘기를 꺼내다니.”

“어차피 지금 윌리엄 시해 사건의 가장 큰 용의자입니다. 별로 영향이 없을 거예요.”

루벤의 말에 테스티 뒤에 있던 호위 무사 겸 정보원이 조용히 말했다.

“약제국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안에 무고가 밝혀질 듯합니다.”

“……왜?”

테스티가 조용히 물었다. 

“약제국 직원 중 하나가 아셰 왕녀님과 막역한 사이인데, 윌리엄 태자와 같은 차를 마셨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약제국은 해독제가 흡수가 되지 않는 곳이므로 아셰 왕녀님이 우려 드린 차가 독극성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조사 중이지만, 그 약제국 직원의 의견 자체에 워낙 확신이 있어서 아마 오늘 오후에 발표될 예정이라 합니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울리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구두 소리에 가려진 테스티의 낮은 목소리가 호위 무사에게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그 약제국 직원에 대해서 알아와.”

‘그 약제국 직원’ 리젠은 밤을 새고 자신의 자리에서 반쯤 졸면서 산처럼 쌓인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너무 바쁘고 피곤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녀는 약제국에 남아 있던 르엘라의 개인 연구 기록과 약제국에 남아 있는 희귀한 고대 서적 등을 뒤져 꿈 연결 시약의 해독제를 만들 단서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리젠, 퇴근 안 해?”

그녀의 옆자리이자 선배인 지트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일단 가서 한숨 자고 내일 퇴근해. 우리 의견서도 다 제출했고, 그다음은 남의 부서 일이야. 부장님들도 다 퇴근했잖아.”

“저는…… 조금만 더 개인적인 것들 보고 갈게요.”

“개인적인 거?”

“네.”

리젠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고모가 연구하던 것들이요. 보는 것만 해도 재미있어요.”

꿈 연결 시약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고모 핑계를 대는 것이 가장 그럴듯했다.

“그게 재미있어? 난 도대체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던데.”

지트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중얼거렸다. 약제국의 역사 자체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르엘라의 업적은 정말 대단해서 약제국 여기저기에도 르엘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르엘라는 워낙에 악필이었고, 누군가와 연구 결과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는지 전혀 체계 없이 끼적이던 쓸모없는 낙서 수준에 가까워 약제국의 사람들은 르엘라의 연구 노트들을 버리지 못해 모아 놓기만 하고 딱히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리젠이 르엘라의 조카였다는 것은 약제국 전체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르엘라의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하자 다들 ‘좋은 것 좀 찾아내서 실적 좀 올려라.’ 등의 반응이었고, 지트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럼 문단속 좀 부탁해. 난 들어갈게.”

“네, 들어가세요. 내일 봬요.”

리젠은 약제국에 혼자 남아 무거운 눈을 깜빡이며 르엘라가 휘갈겨 쓴 연습장을 노려보았다. 르엘라는 정말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겨 놓았다. 리젠의 집에도, 약제국에도. 뭐 그렇게 생각나는 약들이 많았는지. ‘꿈 연결 시약’처럼 독창적이고 생각하지도 못한 약들의 조제법이 여러 버전으로 휘갈겨 있었는데, 노트만큼이나 정돈되지 않은 걸 봐서 아예 틀린 조제법일 확률도 높았다.

“마력증폭약…… 이런 건 진짜 개발하기만 하면 마법사들한테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좀 잘해서 유산이나 팍팍 남겨 주지.”

그녀의 눈이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시야에 르엘라의 악필이 어지러이 펼쳐지면서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리젠은 엎드린 팔이 저려 눈을 떴다. 얼마나 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려다가 허리가 뻐근하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르엘라의 연습장 위에서 엎드려 잠이 든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꿈인가?’

근데 그러기에는 풍경이 완벽한 약제국인데. 카이든이 이렇게 완벽하게 약제국을 상상할 수 있었던가?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리젠을 보며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리젠은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비비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도 없는 약제국에 카이든과 단둘이 있는 것은 꿈만 같고, 꿈이라고 하기엔 약제국의 풍경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카이든에게 슥 들이댔다.

“뭐, 뭐야?”

카이든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슥 뒤로 밀며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리젠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제야 현실임을 확실히 알았다. 꿈이라면 카이든이 이렇게 멀어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키스를 하면 키스를 했지.

‘와, 나 이제 진짜 미쳤네.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왜 이래?”

미간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본 카이든이 쉽게 그녀의 옆에 오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네 무의식이 하도 변태 같아서 그렇다.’

리젠은 목을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미안.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서.”

“……나도 너밖에 없어서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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