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56)

13화.

“약속해. 정말로 윌리엄 태자님을 죽인 사람을 밝혀내겠다고. 약속해 줘.”

“그건 당연한 일이야.”

리젠이 카이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지트를 향해 이제 가자고 말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빠르게 추스르고 얼른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카이든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그녀 역시 아셰의 결백을 밝혀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약제국에서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카이든은 그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꿈을 꾸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관찰해 왔기 때문이다.

리젠이 감금되어 있는 아셰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다니엘이 그녀와 함께 있는 상태였다. 왕녀이기 때문에 감옥에 가둘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궁에 남을 수 있었으나, 외부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아셰의 작은 궁 전체에 군인들이 서 있었다. 리젠은 자신을 대학에서 가르쳤던 스승이자 약제국의 부장 중 하나인 사파엘에게 부탁하여, 막내이지만 함께 올 수 있었다. 아셰와의 우정을 알고 있었던 사파엘은 사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그녀를 동행했다.

“리젠!”

리젠을 보고 아셰가 벌떡 일어났다.

“왕녀님, 괜찮으세요?”

“나야 뭐…….”

울고불고 매달릴 줄 알았던 아셰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멍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리젠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사파엘이 다니엘과 아셰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약제국에서 왔습니다. 약물 검사를 위해 온 것은 아시고 계시지요? 채취하고 가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먼저 혈액과 타액 채취가 있겠습니다.”

“네.”

아셰는 기꺼이 팔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은 사파엘을 도와 그녀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 장소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울컥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아셰가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루벤이 왕이야?”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윌리엄이 왕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다니엘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리젠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2왕자인 루벤과 3왕자인 다니엘, 그리고 후궁 소생인 아셰다. 아셰는 후궁 소생인데다가 여자이므로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멀지만 루벤과 다니엘은 다르다. 리젠은 채취한 아셰의 혈액을 실험관에 소분하며 다니엘의 고뇌에 찬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및 손톱 채취를 하겠습니다.”

사파엘이 표정 없이 채취를 계속하면서 말했다. 아셰는 이번에도 순순히 협조하며 두 눈은 다니엘에게 고정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니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했다. 리젠은 정말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은 두 오누이를 보며 때려 죽어도 왕족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게 왕비가 원하는 것이겠지.”

리젠은 다니엘의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는 항상 다정하게 웃었고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부정적인 언어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다니엘은 아셰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담고 있는 사파엘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분명 불리한 위치겠지만, 꿈틀이라도 해 봐야지. 아침에 있을 긴급 귀족원 회의에서 왕위 계승에 ‘의심의 기간’을 선언할 거야.”

리젠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아셰의 혈액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의심의 기간’이라면 왕위 계승이 꺼림칙한 경우에 왕위 승계를 미루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왕위 계승을 막는 것이므로 왕족 중 한 명이 선언할 수 있고, 귀족원들의 절반 이상 찬성표를 얻어 내야 성립할 수 있다.

“테스티의 편이 많다 해도 윌리엄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절반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 낼 수 있을 거야.”

“다니엘.”

아셰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다니엘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지? 나는 오빠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 후계자 후보에서 빠질 거야.”

어차피 아셰는 지지를 받고 있는 기반도 없고,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꼭 이겨서 왕이 되어야 해, 다니엘.”

“…….”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는 것 알아. 하지만…… 그래도 부탁해, 다니엘.”

“그래.”

리젠과 사파엘은 조용히 채취 기구들을 챙겨 일어났다. ‘의심의 기간’이 진행되면 일단 정사는 원칙적으로 왕비인 테스티가 맡는다. 윌리엄에게는 이제 두 살인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년이 아니어서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루벤, 다니엘, 아셰가 동등한 왕위 계승권자로 ‘의심의 기간’ 동안 상대에게 치명적으로 결정적인 증거들을 모으며, 귀족원뿐만 아니라 각 왕국 직속 기관 전원과 영지의 영주들까지 참석하는 공개적인 ‘최종 재판’에서 상대가 왕이 되면 안 되는 증거들을 모아 제출한다. 그리고 전체 투표로 왕을 결정한다. 그런데 아셰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다니엘의 편에 서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평안하던 왕궁에 정치 싸움이 일겠구나. 아주 크고 복잡한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리젠은 사파엘을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녀는 약제국의 막내일 뿐이고, 주어진 일에 그저 매뉴얼대로 최선을 다하는 직원일 뿐이었다.

“그래도 좋은 일도 있어.”

아셰가 리젠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의심의 기간’이 진행되면 우리 약혼은 자연적으로 다 파기잖아.”

리젠이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왕족들의 규칙들에 대해 세세하게 몰랐기 때문에 처음으로 아는 사실이었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범죄자로 갇힐지도 모르는데 어떤 나라에서 약혼을 감행하겠어? 특히나 우리는 관례적으로 외국인을 왕비 자리에 앉히지 않잖아. 그래서 ‘의심의 기간’에 들어가면 무조건 약혼 파기로 법이 정해 놨어. 상대 국가의 불이익을 감소시키기 위해 그 기간만 파혼이 아니라, 아예 파혼이야. 다시 결혼하려면 ‘의심의 기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아예 처음부터 혼담이 오고 가는 거야.”

아셰가 설명하듯 ‘의심의 기간’의 약혼에 대해서 읊는 것은 다니엘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리젠은 아셰의 얼굴에 살짝 걸린 미소를 보았다.

“다니엘, 왕이 되고 나서, 외교국의 일이 정지되었을 때 재빨리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해 버려. 오빠는 이제 굳이 외국의 여자랑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리젠은 사파엘을 따라 고개를 숙여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했다. 당장 오늘 밤도 아셰의 샘플을 파악하느라 흔치 않은 야근을 하게 되겠지만, 그것보다도 내일부터 불어 닥칠 왕궁의 정치 싸움과 그에 휘말릴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되었다.

다니엘이 왕이라고……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상대가 더 멀어지고 있었다. 아셰는 그녀에게 다니엘의 약혼이 파기되었다고 희망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리젠은 왕비라는 자리에 앉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다니엘은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만 가둬 두어야 했다. 그는 이제 왕위를 노리는 왕자가 된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왕궁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곳이니까.”

약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사파엘이 실험복을 여미며 말했다.

“왕녀님이 대학 시절 친구라고 해서 무조건 무고하다고 생각하지 마. 유력한 용의자일 뿐이고, 약제국은 사실에 근거해 사건을 파악해야 해. 어차피 무언가를 우려낸다는 면에서 차와 약은 한 끗 차이야.”

“하지만…… 왕녀님은 정말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요. 윌리엄 태자님하고 사이도 좋았어요.”

“약제국에 오래 있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돼. 산전수전 다 겪고 여러 경험을 하게 되면 ‘정말로 그럴 사람’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지. 나는 정말 르엘라가…….”

사파엘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잇다가 순간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리젠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사파엘과 르엘라는 약제국의 둘도 없는 동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젠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르엘라가요? 고모가, 왜요?”

“……그렇게 죽을지 몰랐다고.”

리젠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말실수를 한 것 같은 어조였다. 이런 말을 하려고 말을 멈췄을 리가 없다. 리젠의 미심쩍음을 눈치채고 사파엘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던 애가, 그렇게 미쳐 버리게 될지도 몰랐고.”

“…….”

“얼른 가자. 할 일이 많아.”

사파엘은 종종걸음을 치며 말을 돌렸다. 리젠은 확실히 수상함을 느꼈지만 지금 더 캐낸다고 해서 뭔가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르엘라에 관해 사파엘이 그녀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똑똑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약제국은 르엘라가 소속되어 있던 직장이다. 자신에게는 차분하고 좋은 고모였지만,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떨떠름해 보이는 사파엘이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것까지 주의 깊게 보았다.

“그 차…… 아침에 마셨다는 차가 문제인데…… 모든 특이한 성분 반응이 왕녀님에게도 똑같이 나오면 얘기가 복잡해지겠지. 같은 음료를 마셨다는 거니까. 그럼 최소한 태자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돌아가시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근데 또 왕녀님이 정말 범인이라면 그동안 해독제 같은 걸 마셨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정확한 성분 분석은 5년 후에나 할 수 있겠지만…….”

“잠시만요.”

리젠이 눈을 크게 뜨고 사파엘의 팔을 잡았다.

“그 차…….”

분명히 아셰는 찻물이 한 번 우려낸 것이어서 연할 수도 있다고 아침에 얘기했었다.

“……저도 마셨어요. 분명히 다시 우린 물로, 오늘 아침에.”

사파엘이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저도 검사해 주세요. 약제국에는 아무 해독제도 흡수가 되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잖아요. 그래서 시약에 중독되면 다들 약제국 밖에 나가서 해독제를 마시는데,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약제국에 있었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