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56)

12화.

“너 다니엘 좋아하잖아.”

리젠은 아셰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감정을 못 숨겼나 보다. 아주 옛날에, 카이든도 대놓고 다니엘을 좋아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안 될 사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네게 물어보지도 않았어. 네가 가끔 다니엘 뒷모습 보면서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그러면서도 내가 다니엘을 보러 가자고 하고, 그럴 때 자꾸만 데려가고.”

“왕녀님, 그게 왜 저한테 미안한 일인가요?”

“그땐 그게 현명한 건 줄 알았는데……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어차피 다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할 거, 그때만큼이라도 감정에 충실할 걸 그랬어.”

아셰가 리젠의 손을 잡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때, 네 고민도 들어주고, 다독여 주고, 같이 슬퍼하고, 그럴걸.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몰랐어. 모르는 척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네가 날 편하게 대하고, 정말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정과 사랑을 논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다시는 안 오는데…… 그때의 널 혼자 둬서 미안해……. 르엘라를 생각해서도 그러면 안 됐는데.”

“왕녀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그게 현명한 결정 맞아요.”

리젠이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펄쩍 뛰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아서, 그렇게 괴롭지도 않았어요. 짝사랑하면서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왕녀님 덕분에 다니엘 곁을 맴돌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왕녀님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해요. 그리고 고모도…….”

그때였다. 밖에서 재빠르게 달려오는 발자국이 들렸다. 리젠과 아셰는 대화를 멈추고 벌컥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무슨 일이야?”

아셰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장이 털썩 엎드리며 고했다.

“왕녀님, 전하께서, 전하께서…….”

아셰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리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으흐흐흐흑…….”

왕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은 다들 짐작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어의도 최대 1년은 더 사실 수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펠탄의 죽음에 테스티는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왕족들이 다들 장례식을 준비하며 국상을 선언할 동안 왕국의 직속기관들 역시 충격에 휩싸였으면서도 일을 시작했다. 재무국은 국상을 치를 금전적 계산을 시작했고, 행정국은 윌리엄을 중심으로 차기 왕의 호칭을 정하고 모든 문서와 책들의 연도 및 호칭을 다시 지정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서들이 각자의 일로 바쁜 와중에 수사국과 약제국도 바빴다.

“리젠, 오랜만이야.”

“그러게.”

사실은 어젯밤에 꿈에서 만났지만, 카이든과 리젠은 실제로는 꽤 오랫동안 못 만났다. 특히 카이든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들은 출퇴근길에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카이든은 충혈된 눈을 비볐다. 거의 3일을 밤샘 근무하고 오늘 사실 며칠 만에 받은 휴가였는데, 왕이 서거하며 긴급히 출근한 것이다.

“엄청 피곤해 보여. 일이 많은가 봐.”

“그러게. 너무 바빠.”

“여기, 약제국의 의견서야.”

리젠은 카이든이 왜 약제국에 온지 알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당연히 수사국에서는 혹시나 계획된 암살은 아닌가 조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약제국과 의료국에 협조를 구하는데, 약제국에서는 독극물에 의한 암살이 아닌지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자세히 읽어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약에 의한 암살은 아닌 것이라고 결론 냈어.”

“……의료국에서도 자연사 같다고 하던데.”

“시약에 의한 암살은 반드시 어떠한 증거를 남겨. 우리는 알려진 모든 시약 반응을 다 해 봤는데…… 독에 관련한 건 그 어떤 것도 안 나왔어. 자연사야.”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국에서도 원래부터 자연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지금 시기에 왕이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익을 보는 사람을 따지자면 윌리엄이었는데, 호시탐탐 그의 태자 자리를 노리던 테스티가 왕을 부추겨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테스티가 윌리엄 대신 자신의 아들 루벤을 왕위로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은 수사국 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 왕이 죽어서 가장 패닉에 빠진 사람은 아마 테스티와 루벤일 것이다.

어쨌든 윌리엄의 알리바이는 확실했고, 아직 조사 중이지만 윌리엄을 따르는 신하들도 그런 것을 계획할 정도의 야심가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카이든은 리젠이 건넨 의견서를 받아 대충 읽고는 서류 가방에 챙겼다.

“리젠.”

수사국의 제복을 입은 그는 교복을 입었던 작년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약제국은 흰 실험복을 입는다. 그녀가 커다란 실험복의 앞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잘 되어 가고 있어?”

“음, 그래야 할 텐데.”

리젠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른 해결하려고 노력 중인데, 어려워. 약제국 일도 많은 편이라 내 일 하기도 벅차고.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

리젠은 그녀의 꿈 연결 시약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아주 조금만이라도 언급하니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가 사실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카이든에게 ‘너는 어때?’라고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밝힐 것이 있어 수사국에 반드시 들어가겠다는 것은 꿈속의 어린 카이든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카이든은 한 번도 현실의 그녀에게 목적이 있어 수사국에 들어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리젠은 꿈과 현실을 혼동하면 정말로 큰일 난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수사국 생활은 어때? 한때 내 꿈이었는데.”

“삶의 질 최악이야. 네가 이런 걸 왜 꿈꿨는지 모를 정도로.”

“조금 위안이 되네.”

리젠이 환히 웃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들의 수면 패턴이 같았기 때문에 매일 밤 그의 꿈속에 들어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간헐적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아셰와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해서 그런지, 옛날의 학교 다니던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웠다.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카이든과 이야기하는 지금도 꼭 옛날 생각이 나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동기랑 얘기하니까 좋다. 옛날 생각나고.”

“몰랐는데, 학교 다닐 때가 좋았지.”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사실 어젯밤 꿈에 네가 나왔어.”

쿡쿡 웃고 있던 리젠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을 뻔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카이든은 이제 수면 시간이 불규칙해져서 잘 때마다 리젠이 나오지 않는 것뿐인데, 정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오늘 우연히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아, 아하하, 맞아. 그, 그랬나 봐. 무슨…… 꿈이었길래?”

리젠은 자신이 정말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기도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지난밤 꿈에서도 꽤나 깊게 키스했던 것 같은데…… 카이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깨고 나니 별로 기억은 안 났어.”

“그렇…… 구나. 신기하네.”

다행히 카이든은 그녀의 연기력에 넘어간 것 같았다. 하긴, 그 어떤 사람도 꿈 연결 시약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을 테니 상상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잘 지내.”

카이든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리젠은 쿵 내려앉은 심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환히 웃었다.

“그래, 잘 가.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 연락…….”

“리젠! 리젠!”

저 멀리, 약제국에서 선배가 하나 뛰어오고 있었다. 리젠은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약제국은 급할 것이 없는 부서다. 갑자기 저렇게 리젠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큰일이 났다는 말이었다. 카이든 역시 뒤를 돌려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지트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지트는 붉은 머리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는데, 안경이 비뚤어졌는데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원, 지원 나가야 돼. 얼른 들어와. 일손이 너무 부족해.”

“무슨…… 일손이요?”

“윌리엄 태자님이 돌아가셨어.”

리젠과 카이든은 동시에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윌리엄이? 왕이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뭐, 뭐라고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 나라의 국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나라를 물려받아야 할 태자가 죽었다. 

“급히 주요 시약 반응을 했는데, 시암 반응이 양성이야.”

“……그렇다면…… 약물에 의한 시해일 가능성이 있군요.”

“맞아. 그래서 지금 용의자들을 긴급 체포했는데…….”

연달아 들리는 참담한 소식에 리젠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침에 아셰 왕녀님 궁에서 차를 드셨다네. 일단은 아셰 왕녀님과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하녀들이 감금당한 상태야.”

“말도 안 돼…….”

카이든도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리젠을 일으키려고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그녀는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야.”

그녀가 카이든에게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아니야.”

“리젠.”

“윌리엄한테 도움이 된다며 제국으로 가겠다고 했던 애야. 내가 오늘 아침에 들었단 말이야.”

지트가 그녀의 앞에 섰다.

“리젠, 왕녀님과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지금 얼른 가야 해. 정신 차려.”

리젠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다리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카이든을 향했다.

“밝혀 줘, 카이든.”

카이든과 그녀의 시선이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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