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56)

11화.

2. 의심의 기간

“아직 뭘 조사해 볼 수조차 없어.”

카이든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잠도 제대로 못 자. 수사국이 일이 많다더니 진짜였어. 훈련도 진짜 장난 아니야.”

“당연하겠지.”

그의 옆에서, 다니엘이 느긋하게 웃었다. 그들은 지금 다니엘의 별궁에 있는 정원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카이든이 지금 퇴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만남도 일주일 만에 성사된 것이었다. 카이든이 워낙에 바빴기 때문이다.

“원래 수석은 승진 빨리 시키려고 일도 몰아주잖아.”

“그러니까. 아메탄 왕국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어디 작은 지방 영주 아들이 바람난 것까지.”

별로 징징거림이 없는 카이든인데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가 보다. 다니엘이 쿡쿡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수사국 신입인 카이든은 입사한 한 달 동안 잠을 50시간도 못 잔 것 같다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이 어느 커다란 음모의 일부일 수 있으니…… 다 정리해 놔야지.”

“마음 천천히 먹어.”

다니엘이 씩 웃었다.

“우리는 6년 가까이 기다렸어. 조바심 갖지 말자.”

6년 전, 서쪽 지방 히람궁에서 일어난 엄청난 화재에서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카이든은 그 화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국에 들어간 것이다. 다니엘의 진심 어린 다독임에 카이든은 한숨을 쉬며 피곤한 눈을 비볐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냐?”

“제국에서 아직 상대가 안 정해진 모양이야. 황제의 오누이인 황녀가 자그마치 12명이라고 하니…… 7황녀 아니면 8황녀라는데, 또 6황녀라는 말도 있고. 그래도 다음 달에는 식을 올릴 거야.”

“아셰는?”

“걔는 더 복잡해. 원래 사막 국가인 한스팀 왕국에 갈 예정이었는데, 지금 제국에서 동시에 혼담이 또 들어왔어.”

“……제국에서 또?”

“황제가 아직 정정한 모양이야. 심지어 황제의 비로.”

카이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제국의 황제는 이미 황비가 있으므로 후궁 자리일 것이다. 아무리 후궁 자리라고 해도, 아셰가 후궁의 딸인데다가 아무런 배경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조건이다. 제국의 후궁이라면 한스팀 왕국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마 아셰는 그 자리에 가면 윌리엄과도 동등해진 위치로 대접받을지 모른다.

“성사된다면 아마 내 결혼은 좀 미뤄질 거야. 아무래도 황제의 국혼에는 비할 바가 아니니까.”

“그렇군.”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연애라도 시작하지 그래. 잘못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걸. 수사국엔 그렇게 독신 부장님이 많다며. 일에 치여 여자를 못 만나서.”

“아직은 별생각 없어.”

“한창 나이에 왕립학교 다닌다고 여자 못 만나, 입사 후에는 바빠서 여자 못 만나. 너 그러다가 총각 귀신으로 죽겠다.”

“잘 시간도 없어. 여자는 무슨.”

“참한 귀족 영애 하나 소개시켜 줘?”

“난 간다. 잠이라도 자야겠어.”

카이든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다니엘이라도 꿈에 리젠이 나오고, 그녀를 자신이 미친 듯이 탐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요즈음은 밤과 낮이 바뀌어서 그런지, 쪽잠을 자서 그런지 옛날처럼 잘 때마다 나타나지는 않지만.

“다니엘.”

“왜?”

키득거리던 다니엘을 보며 카이든이 무언가를 휙 던졌다. 몇 개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였다.

“뭐야, 이건?”

다니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게 엄청난 화재를 인위적으로 낼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일 거야. 그 정도 화재라면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테고. 이건 그 이후 1년 안에 죽은 마법사들 명단이야. 특이 사항은 여기 동그라미 친 마법사들이 모두 같은 증상으로 죽었다는 거야. 마력 역류에 의한 급사.”

그가 메모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왕궁의 기록은 아무리 수사국이어도 내가 못 봐. 이 마법사들의 왕궁 출입 기록이나 연결 고리를 찾아봐 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현 왕비 테스티가 그 화재를 일으켰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추측이었다. 그 화재로 인해 지금 왕비로 올라올 수 있었으니. 다니엘이 씩 웃었다. 

“역시 카이든. 죽는소리하더니 할 건 다 하고 있었구나.”

“간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다니엘이 카이든의 등을 툭 치며 가볍게 말했다.

“이 정도 능력이면 여자도 잘 만나겠어.”

리젠은 출근 전에 아셰의 궁에 들렀다. 다과를 가져오라며 분주한 아셰의 옆에서 리젠은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어제 새벽에는 카이든과 꿈으로 연결이 되었다. 입사를 하고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꿈 연결은 자신과 카이든이 둘 다 잠들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수사국에 들어간 카이든의 수면 시간이 뒤죽박죽이었으므로 한참 동안이나 꿈에서 못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제는 꿈에서 카이든을 만났고, 삼 일 만에 집에 들어왔다는 카이든의 불만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연구가 주목적이라 언제나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약제국은 삶의 질이 좋은 편이었다.

“새로 우린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맛이 좋을 거야. 엄청 비싼 거거든.”

“지금도 이른데, 아침 일찍부터 누가 다녀가셨나요?”

“윌리엄 오라버니 혼담 때문에.”

“왕녀님, 이 정도면 됩니다. 너무 많아요.”

“아, 진짜!”

아셰가 도끼눈을 떴다.

“정말 왜 이래? 둘만 있을 땐 그냥 반말 쓰고 이름 부르라니까.”

“체통 떨어지십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여간, 이런 건 르엘라랑 똑같아.”

아셰가 볼을 부풀리며 짜증을 냈다. 달콤한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르엘라도 절대 나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당연한 겁니다. 나중에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하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요.”

리젠이 어른스럽게 타이르며 말했다.

“졸업식에서도 단단히 교육받았잖아요. 왕족들과 반드시 군신간의 예의를 지키라고. 제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싫은데.”

아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리젠 역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존대를 쓰니 어느 정도 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씁쓸함을 감추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여기 부탁하신 책.”

“고마워, 잘 볼게.”

“약초학을 좋아하신다는 건 알았지만, 웬 제국의 약초 책인가요?”

아셰는 르엘라에게 학교에 오기 전, 어린 시절에 약초학을 배웠다. 왕족으로서 약초학은 당연히 배워야 할 교육이다. 르엘라가 얼마나 재미있게 잘 가르쳤는지, 다니엘과 아셰는 학교에 와서도 약초학 성적이 다른 과목 성적보다 좋았다. 특히 아셰는 자신이 왕녀만 아니었다면 약제국에 들어갔을 것이라면서 늘 아쉬워하곤 했다.

“나 제국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리젠의 눈이 커졌다.

“제국?”

“혼담이 들어왔어. 황제의 아홉 번째 비 자리. 아까 윌리엄은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혼담이 들어온 지는 꽤 됐는데, 내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었거든.”

“세상에.”

리젠이 숨을 들이켜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이라면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메탄 왕국 또한 공물을 바치고 있는 나라다. 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하고 대단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윌리엄은 내가 갔으면 하는 눈치야.”

“당연하겠죠.”

리젠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게 보통 자리인가요? 만일 아드님이라도 낳으시면…… 그러다가 그가 황제라도 되시면…….”

“리젠,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약소국에서 온 후궁이 무슨 힘이 있겠어? 우리 엄마 봐. 테스티 눈에 띌까 봐 궁에 갇혀 살잖아. 외국에서 와서 친구도 없고. 게다가 황제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그래도 아메탄과 제국이 같나요? 게다가 혹시라도 황제가 아셰를 총애하게 된다면…… 정말 비할 바 없는 권력을 갖게 되시는 거예요.”

“윌리엄 생각이 바로 그거인 것 같아. 뭐, 나야 그렇게 해서 윌리엄의 힘이 되어 준다면 백 번이라도 가겠지만.”

“윌리엄의 힘이요?”

“테스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꼴은 못 봐. 테스티가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

“에이, 윌리엄 태자님이 강건하신데 무슨 그런 불손한 말씀을 하세요?”

“리젠, 왕위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악해지는데. 지금도 사실 윌리엄은 얼음길을 걷는 것 같을걸. 왕비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치적 노선이 달라서 루벤의 세력도 굉장히 강력해.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흠을 잡히면 정말 폐위당할 수도 있어.”

리젠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아셰는 다도에도 능해서, 그녀가 직접 끓여 주는 차는 정말로 맛있었다. 아마 제국의 황제도 아셰의 궁에 차를 마시러 오다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반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로맨스 소설 한 권을 쓸 동안 아셰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다니엘도…… 아마 다음 달에는 국혼을 할 것 같아. 황제의 여동생 중 하나라는데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고. 다니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야. 테스티만큼은 안 되어도 힘이 되어 줘야지.”

“……그렇군요.”

리젠이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했다. 아셰는 속눈썹을 길게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리젠, 미안해.”

“네?”

“나 사실…… 알고 있었어.”

“……뭘요?”

“너 다니엘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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