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
리젠의 단호한 말에 카이든도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따라 나섰다. 리젠은 그의 팔을 끌고 성큼성큼 걸어가 도서관 앞 분수대에 섰다. 시초왕의 거대한 동상이 물을 뿜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저녁, 바람이 기분 좋게 한 번 불자 낙엽이 춤을 추며 떨어졌다.
“내가 약제국을 쓴 게 뭐 어떻다고 이 난리야?”
리젠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카이든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내 팔 좀 놓을래?”
“아, 미안.”
그녀가 여전히 잡고 있던 그의 팔목을 흠칫 하며 놓았다. 매우 부자연스럽게 그들의 손이 떨어지고, 카이든은 다소 어색한지 두 손을 교복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리젠은 순간 꿈을 꾸나 싶었다. 매일 밤 꿈속에 함께 있다 보니 이제는 단둘이 있으면 꿈만 같았다.
“나는 네가 수사국을 쓸 줄 알았는데.”
카이든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약제국을 쓴 거야?”
“응.”
리젠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왜라니?”
“넌 약제국은 전혀 생각도 안 한다고 들었어. 3지망 안에도 없다고 분명히 그랬다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약제국이야? 5년 내내 수사국 지망이다가 일주일도 안 남은 기간에 약제국을 들어간다는 게 말이 돼?”
“사람 적성이야 바뀌는 거잖아. 르엘라 하카트 몰라? 우리 고모, 고모의 뒤를 이어볼까 해서 사실은 예전부터 고민이었어.”
“거짓말.”
카이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파엘 교수님이 네게 아무리 약제국을 권해도 고모의 재능은 못 따라간다며 단칼에 거절했던 게 너야. 근데 이제 와서 고모의 뒤를 잇겠다고?”
“너 참 이상하다.”
리젠이 팔짱을 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속마음을 감추고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을 택한 리젠은 새초롬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수사국 안 쓰면, 네 수석이 확정되는 거잖아? 근데 왜 좋아는 못할망정 추궁하듯이 이래?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피엔딩이잖아. 너는 수사국 수석, 나는 약제국 수석. 둘 다 윈윈이라고 볼 수 있지.”
“리젠 하카트.”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국 수석을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너와 승부를 겨뤄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동안 우리는 성적으로 엎치락뒤치락만 했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련 한번 안 해 봤으니까.”
거짓말. 첫날밤 꿈에, 당연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면서 거만한 모습을 보일 땐 언제고. 리젠은 튀어나오려는 빈정거림을 꾹 누르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승부를 떠나서 함께 근무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카이든이 시선을 돌렸다. 머쓱한 것 같았다. 그가 괜히 발끝으로 땅을 쿡쿡 찼다.
“너처럼 에너지가 넘치고…… 삶을 열심히 사는 애랑 동료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리젠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 선과 쭉 뻗은 콧날이 꿈에서 본 것처럼 조각상 같다. 그의 무의식은 그녀와 붙어 있으면 무조건 덮치기 일쑤였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이처럼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 그녀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그가 낯설면서도 새로워서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수사국으로 와.”
“……카이든.”
“나한테도……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은데.”
“미안해.”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시약의 해독제를 얼른 만들어 내려면 왕국 최고의 시약 연구기관인 약제국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제국에서 하는 것이 약초를 연구하고 온갖 시약을 만들어 내는 일이니까,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도 잔뜩 있다고 들었으니까 열심히 하면 해독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약제국의 사람들은 거의 다 르엘라를 기억하고 있으므로 지내기도 편하고 흔치 않은 약초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하고 싶은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동안 열심히 책을 뒤지며 안 사실인데, 이렇게 유효 기일이 영원에 가까운 시약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왕국 여성들이 많이 복용하는 시약 중 하루 동안 피부가 뽀얘지는 약이 있는데, 지속적으로 효과를 주는 약을 계속 복용하게 되면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지속해서 몸에 효과를 나타내는 유효 기일이 없는 약들은 해독제를 1년 안에 마시지 못하면 수명을 갉아 먹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리젠은 그녀가 카이든에게 먹인 시약이 카이든의 수명을 갉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너무 미안한 일이다. 반드시 1년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카이든에게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와 꿈속에서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또 그리고 나서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꿈에서 만날 텐데 뒷감당을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해독제가 만들어지면 그때 말할지라도, 지금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제국을 갈 수밖에 없거든. 너는……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리젠은 살짝 웃고, 터벅터벅 걸어 다시 도서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사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가장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가 벌인 일이고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다. 몇 년이 걸리든, 아니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녀의 손으로 시작한 일이니 그녀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리젠.”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가는 팔을 잡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뭐지?”
“응?”
“너처럼,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갑자기 전혀 열의 없던 진로를 선택하니까…….”
“그게 왜?”
“……네게서 생기가 사라질까 봐.”
리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나?”
“응, 없어.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야. 최선을 다할 거니까 걱정 마.”
리젠은 씩 웃었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길이 갈라진 라이벌으로서, 그녀의 생기를 보기 좋아했던 동급생으로서, 그리고 며칠간 꿈속에서 나타난 이상한 상대로서. 그리고 그는 그녀 때문에 수명이 줄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려 오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태어나면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 아빠는 나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고모에게 떠맡기고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나는 이미 탄생부터 두 개의 삶을 망가트린 애야.”
카이든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왜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고모가 그랬어. 부끄럽지 않게,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희생시키고 태어났으니까. 쉽지 않은 삶이니까 반드시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만큼 잘 살겠다고. 그러니까 난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약제국 가서도 엄청 열심히 살 거라고. 수사국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
아마 꿈에서 본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가깝게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카이든도 그러니까 자신에게 일부러 이렇게 말도 걸고 있는 것이겠지. 게다가 자신은 열일곱의 카이든을 보았다. 리젠은 그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하나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수사국이랑 약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래. 뭐 온갖 범죄에 약물은 기본이니 당연한 거겠지. 우리 각자 다른 부서에서 좋은 동료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자극이 필요하면 약제국의 동료를 찾아.”
“……그래.”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선선한 밤에 서로의 진로를 앞두고 카이든과 한 대화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이든, 네게도 수사국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리젠은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카이든 루스, 수사국에서 너도……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랄게.”
늦게까지 학생의 신분이었던 그들이 교복을 벗고 왕국 직속 기관의 일원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반쯤은 설렜지만 반쯤은 불안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한 시간과 아직 정착하지 못한 마음이 그들에게 작은 유대감을 주었다. 공교롭게도 각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모두 왕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분을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바보야.”
카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뭐…… 라고? 바보? 너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그랬니?”
“응.”
“잘난 척은 아닌데…… 나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거든?”
“잘 되지도 않을 사람을 열심히 좋아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데 바보 아니냐?”
“어이가 없네.”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뭐든지 똑 부러지게 해내는 리젠에게는 항상 ‘악바리’같은 별명이 붙었었다. 아마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성적에 부담을 갖지 않는 왕족인 아셰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멍청하다거나 바보 같다거나 하는 형용사와 거리가 멀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기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허허 웃고 말았다.
“혹시나 약제국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네 일이라면 내가 무조건 봐준다.”
리젠은 주먹을 말아 쥐고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친 뒤, 다시 뒤를 돌아 춤추듯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다. 카이든의 눈이 그녀의 희고 매끈한 오른쪽 목덜미와 날씬한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고모의 손에 컸고, 그 고모마저도 미쳐서 일찍 죽었고, 그래서 혼자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날 저녁, 체력단련실에서 지칠 때까지 몸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가 감명 깊게 다가왔던 것은 그녀에게 짐작하지 못할 슬픔이 있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