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56)

8화.

‘카이든이 도서관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리젠은 화들짝 놀라 가방을 재빨리 챙겨 도서관 문을 나섰다. 그제야 여학생들이 왜 그렇게 많이 몰려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들 카이든을 보러 몰려온 것이다. 카이든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꽤 좋았는데, 그동안은 다니엘에게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꿈속에서 가까이 보고 나니 왜 그렇게 카이든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무뚝뚝하고 다소 건방진 면이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보듬어 주고 싶은 면도 있다. 왠지 자꾸 보니까 눈도 살짝 우수에 차 있는 것 같고, 검은색 머리카락도 왠지 시크해 보이는 것 같고.

“무슨 미친 생각이야, 리젠 하카트.”

리젠은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더 도서관을 뒤져 봐야 하겠지만, 만일 끝까지 해독제에 대한 단서를 못 찾으면 어떡하지? 결국은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지기만 했다.

왕립마법대학의 서고로 해결이 안 된다면, 시약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숨이 안정되셨으니 이제 푹 주무시면 당분간 괜찮으실 겁니다.”

아메탄의 23대 왕, 제펠탄은 가느다란 숨을 고르며 누워 있었다. 어의의 침착한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나는 전하의 옆에 있겠다.”

왕비인 테스티가 도도하게 앉아 말했다. 제펠탄의 총애를 여전히 한 몸에 받고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늘씬한 여자였다. 원칙대로라면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제펠탄이 태자 시절부터 연인 관계였던 테스티를 변함없이 사랑했던 제펠탄은 온갖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시죠. 그러면 저희들은 물러나겠습니다.”

윌리엄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제펠탄의 또 다른 후궁인 샤틴은 감기를 핑계로 오지 않았지만, 테스티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 때문에 거의 왕궁의 꽃병 수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연무장에 가겠다.”

왕의 침실을 나오자마자 테스티의 유일한 아들, 루벤이 선언하듯 말하고 그들과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쪽 복도로 걸어갔다. 그는 윌리엄과 다니엘, 그리고 아셰와 평소에도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윌리엄은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요새 이런 일이 느는군. 아바마마의 병환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형이 워낙에 정사를 잘 돌보니 다행이지.”

다니엘이 듬직한 형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태자인 윌리엄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며 거의 대다수의 정사를 보고 있었다. 윌리엄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좋아 훌륭한 왕의 재목이라 평가되었는데, 과연 왕의 빈자리에 혼란이 없도록 꼼꼼하고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이번에 세금의 자유도를 높인 거, 평가가 진짜 좋아. 학교에서 다들 칭찬하고 있어.”

아셰가 부드럽게 동의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엄마한테 가 봐야겠다! 아마 직접 못 왔어도 궁금해하시고 계실 거야. 윌리엄 오라버니는 고생하시고, 다니엘, 내일 봐!”

길고 곧게 뻗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셰가 복도를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학교와는 달리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학교에서만큼은 일반인처럼 휘젓고 살 수 있었지만, 왕궁에서는 그저 힘없는 후궁의 딸일 뿐이었다. 샤틴은 외국에서 외교 목적으로 얻은 후궁으로, 제펠탄과는 그다지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답게 샤틴은 거의 외부에 나오지 않았고, 딸인 아셰만 참새처럼 왔다 갔다 하며 이곳저곳의 소식을 물어다 줄 뿐이었다.

그래서 복도에는 다니엘과 윌리엄만 남게 되었다. 전 왕비 스잔나의 소생인, 배가 같은 유일한 형제였다.

“형, 힘내. 다 예상한 시기였잖아.”

다니엘은 윌리엄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말했다. 둘 다 예상하고 있었다. 왕은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다. 왕조가 시작한 뒤 계속해서 반복하여 온 일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왕이 죽고 그의 후계자가 왕이 된다. 윌리엄은 장남이자 적통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군의 재목이라 칭송받아 왔기 때문에 안정된 후계자였다.

“물론 테스티가…… 얌전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을 거야. 내가 힘이 되어 줄게. 제국의 황녀가 오면 그것만으로도 큰 상징이 될 거야.”

테스티는 정치적인 여자여서, 내각 관료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태후가 된 그녀도 문제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바가 짐작이 가기 때문에 그 또한 문제가 됐다. 모든 후궁이 꿈꾸는 것,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 게다가 윌리엄과 루벤은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루벤파 귀족들의 수가 상당했다.

지금 루벤 역시 후궁의 자식에서 왕비의 적통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계승 2위이다. 윌리엄이 버티고 있는 한 아무런 정당성이 없었지만. 왠지 쉽지 않을 것 같아 다니엘은 일찌감치 제국의 황녀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았을 때 바로 승낙했다. 아무리 아메탄이 독립된 왕국이라 해도 군신의 예를 맺은 제국의 눈치는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이 되면…….”

다니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재조사해 줘.”

“…….”

“알잖아. 서쪽 별궁의 화재.”

전 왕비 스잔나는 서쪽 별궁의 연회에 갔다가 화재로 죽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 사건은 말 그대로 대참사였다. 그러나 아주 괴이쩍은 부분들이 많았는데, 왕은 더 이상의 조사를 멈춘 채 테스티를 왕비로 앉혔다. 이 일련의 일들로 이익을 얻은 사람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의심은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렵겠지만…….”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희생자들이 많아. 나도 마찬가지의 마음이고.”

“그래.”

윌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바마마가 조금만 더 버텨 줬으면 좋겠군.”

다니엘과 똑같이 닮은 그의 파란색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너와 아셰가 졸업하고,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왕궁의 조용한 밤이 깊어 갔다. 왕의 침실에서는 윌리엄과 같은 어조로 테스티가 거칠해진 제펠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아직 안 됩니다…….”

리젠은 며칠째 방과 후가 되자마자 도서관에 달려가 모든 약초학 책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에 빠지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매일 밤 그녀는 카이든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숨을 곳이 있어 보이는 공간이면 밤새 숨어서 카이든의 눈에 띄지 않았고, 숨을 곳이 없어 보이거나 처음부터 카이든과 붙어 있게 된다면 꿈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차 자신을 놓아 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점차 대담해져서 먼저 입을 맞추거나 그의 단단한 등근육을 스스로 만져 보곤 했다.

‘욕구 불만도 아니고, 진짜 뭐 하는 짓이야. 리젠, 너 정말 추하다.’

리젠은 눈을 문지르며 두꺼운 약초학 사전에 머리를 박았다. 정말 이러다가 정신 분열이라도 겪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눈은 다니엘을 좇는데, 밤마다 꿈에서는 카이든을 만난다.

‘이게 다 카이든 때문이지. 무의식이 뭐 그렇게 변태 같아서, 조금만 붙어 있어도 그 난리야?’

그녀는 입을 삐죽대 보았지만, 그 나이의 혈기 왕성한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았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꿈속의 자신이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리젠 하카트!”

조용한 도서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리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숨을 헉헉대며 카이든이 무릎을 짚고 어느새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너…….”

리젠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분노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댔으니 도서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눈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리젠은 심장이 쿵 떨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설마 들켰나?

얼음처럼 얼어 있는 그녀의 앞으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흰색 교복 블라우스가 반쯤 땀에 젖어 있었다. 답답한지 넥타이를 살짝 푸르며 그가 리젠이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 책상을 짚었다.

“카, 카, 카이든…… 지, 진정하고…….”

“어째서 약제국을 썼지?”

침을 꼴깍 삼키며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자리에도 못 일어나고 있던 리젠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수사국이 1지망이라고 했잖아. 왜 약제국을 1지망으로 썼어?”

“그, 그,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리젠은 천천히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얕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들킬 리가 없지. 그제야 도서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것을 느낀 리젠이 벌떡 일어나 그의 팔목을 잡았다.

“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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