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56)

6화.

“다섯 명? 1등이 나, 2등이 너, 3등이 카이든, 4등이 유진, 5등이 다니엘이었나? 나랑 카이든이야 수사국 지망이고, 다니엘이랑 너는 왕족이라 어쩔 수 없고, 유진은 행정국 쓴다고 들었어. 진짜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가 봐.”

리젠이야 이미 부서 희망을 예전부터 확고히 했던지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요즈음 학교는 학생들의 부서 지망 때문에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오고갔다. 특히나 성적이 중위권인 학생의 경우 상위권 학생들이 어디를 1지망으로 썼는지 암암리에 캐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고, 각각의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교수들도 뛰어난 학생들을 자신의 부서에 데리고 오기 위한 작업을 하는 데에 바빴다.

리젠 역시 사파엘에게 약제국으로 오라는 제안을 처음부터 받았다. 약제국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르엘라의 하나뿐인 조카였으며 역시 피가 무서운지 약초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리젠은 뛰어난 학생이지 르엘라만큼의 탁월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해!”

아셰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 후, 리젠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앉아서 일단 과제를 다 한 뒤에, 천천히 일어나 서고로 향했다. 오늘 하루 종일 궁금한 것이 있었다. 서고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종합자료실로 들어갔다.

“2170년…… 2170년…….”

꿈이 생생하여 오늘 하루 종일 잊히지 않았다. 이틀 연속 카이든의 꿈을 꾼다는 것도 찝찝했다. 그녀는 종합자료실의 사망 명부를 뒤져 2170년을 찾아냈다.

“여기 있다.”

2170년의 기록물은 다른 년도의 기록물보다 압도적으로 두꺼웠다. 그녀는 쌓인 먼지에 콜록콜록 기침을 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4월 5일……. 어?”

2170년 4월 5일에 멈춘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4월 5일에는 충격적으로 많은 인원이 적혀 있었다. 영주 이상의 사람들만 적어 놓은 명부라 하루에 많아 봤자 두세 명이었는데 4월 5일에는 100명이 넘어갔다.

“아, 이날…….”

다니엘과 윌리엄 태자의 친모였던 스잔나 왕비가 죽은 날이다. 서쪽 땅의 별장인 히람궁의 완공식이 있던 날인데, 왕은 정사가 바빠 왕비가 대표로 갔고 그래서 서쪽 지방 영주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연회에서 불이 나 모두 몰살당했다. 루스 지방 역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카이든의 부모님도 그때 연회에 참여했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는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 어떡해.”

막상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사망 명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하나하나 이름을 짚어 가던 그녀의 손이 ‘알버트 루스’와 ‘나탈리 루스’에서 멈췄다.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명단을 탁 덮었다.

새삼 카이든이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생각에 리젠의 호흡이 떨렸다. 그녀가 예언자도 아니고, 무슨 꿈속에서 카이든의 부모님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어제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상한데…….”

그녀가 종합자료실을 나오며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분명히 하룻밤이라고 했는데…… 1회성이라고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았나? 그래서 이틀인가? 서서히 사라지나?”

그럼 오늘 밤은…… 괜찮을까?

“또 너야?”

리젠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메니티에 집이 없는, 지방 출신의 학생들이 지내는 왕립마법 기숙사 방이다. 카이든이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리젠은 숨을 삼켰다. 이불 밖에 나온 카이든의 상체가 탈의 상태였다. 상상은 했지만 잔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몸이 탄탄해서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대 대륙에서는 남자의 몸이 여자의 몸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데 그 이유가 단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 어…… 그러게…….”

그녀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카이든의 기숙사 방인가? 역시 오늘 밤도 카이든의 꿈속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방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벽 한쪽에는 교복과 도복, 운동복이 걸려 있었고 책상에는 전공책들이 쌓여 있었다. 리젠은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꿈이고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카이든은 순전히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흑백사진이 꽂힌 액자가 두 개 단정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젊은 부부와 어린 형제가 들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고, 하나는 왕립고등학교 시절 수련회에서 다니엘과 둘이 찍은 사진이었다.

“3년 전 다니엘이지.”

사진을 보고 있는 리젠을 보며 뒤에 누워 있던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못할 줄 알았는데 다니엘하고는 친해졌어.”

“아…… 그건…….”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다니엘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하니까…….”

“다정? 친절? 그렇게 보이나?”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가 뒤를 돌았다.

“그 자식하고 나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어.”

리젠의 눈을 보던 카이든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힘주어 그녀를 옆에 눕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리젠은 꼼짝 없이 그의 옆에 눕게 되었다.

“……올려다보기 목이 아파서.”

카이든의 말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다니엘의 이야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든은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자신이 몰랐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숨을 죽이고 나란히 카이든을 보고 누웠다. 좁은 1인용 침대에 붙어 누워서 리젠은 그의 숨결마저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속이 문드러진 상태였거든. 내가 상황은 좀 더 나았지. 빌어먹을 왕족이 아니었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서.”

왕립고등학교 입학은 5월이었다. 4월 5일에 그 화재가 났고, 카이든의 부모와 다니엘의 친모가 죽었다. 아직까지 연결하지 못했던 사실에 그녀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둘 다 같은 사건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학교에 입학한 거구나. 

“시간이 지우지 못하는 건 없어서…… 이젠 그런 격렬했던 감정은 다 잊고 차가운 분노만 남은 것 같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 카이든의 기억 속에 그녀는 항상 교복을 입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침대가 좁아 그녀는 살짝 몸을 움직였는데, 결국엔 카이든의 몸에 밀착하는 결과가 되었다. 리젠은 또다시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었다.

‘이건 감정이 아니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애랑 이렇게 붙어 있으면 누구나 기분이 이상할 거라고. 그건 카이든도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얘는 무의식이잖아.’

리젠은 재빠르게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리젠의 등을 감쌌다.

“역시 넌 다니엘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있네.”

“어?”

“평소 같았으면 네 성격에 난리였을 텐데.”

“난리 치면…….”

리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놔줄 거야?”

“아니.”

그가 천천히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밑을 걸치고 있던 이불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그는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중심이 커다랗게 팽창한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양손은 그에게 붙잡혀 침대 옆으로 고정되었다.

‘괜찮아. 꿈이잖아? 어차피 꿈이라고.’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카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자신의 눈도 저렇게 탁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무게가 적당히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 안 돼…….”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첫 키스라고…….”

“어차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리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야, 꿈이라고.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은 세차게 뛰고,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하지?

“……다니엘하고는 못할걸.”

그녀의 숨이 헉 하고 멎었다.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놀란 것은, 그의 혀를 확 깨물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꿈이잖아.’

어설프게 되는 합리화 때문에 그녀는 온몸에 힘을 뺐다. 처음 느껴 보는 기분, 처음 느껴 보는 몸의 감각, 처음 느껴 보는 저 몸 깊숙한 간지러움이 계속해서 궁금했다. 사실 친구들과 이런 남녀 간의 정사를 다룬 책이나 그림을 몰래 볼 때에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할 생각을 아예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교복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을 때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이를 훑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의 혀를 감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며 천천히 가슴의 둔덕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드는 기대감에 허리를 움찔했다. 사실은, 사실은 그저께 밤에 가슴을 유린하던 그의 손길이 순간순간 기억났다고, 특히나 교실에서 얌전히 수업을 듣고 있을 때에도 그 기억에 혼자 숨이 멎었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술이 밑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희고 매끈한 오른쪽 목에 잠시 머물던 그의 입술은 세게 그 살을 깨물어 잇자국을 내고, 또 세차게 물어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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