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가 한참 동안을 그녀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두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손이 커서 그녀의 두 볼이 한꺼번에 감싸졌다.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얘는 뭐 열일곱 살에 벌써 성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리젠.”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못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따뜻한 숨이 솜털을 건드리는 것까지 느껴졌다. 들판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카이든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이마에 꾹 눌러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그의 경건한 입맞춤에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따르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또 꿈에 카이든이 나왔다. 분명히 약은 1회성이라고 했는데?
“……그냥…… 그냥 카이든이 꿈에 나온 건가?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냥 꿈인 걸까? 그냥 꿈이겠지? 밀려오는 엄청난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맨 처음 다니엘과 만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약제국에 근무하는 고모, 르엘라는 어린 왕족들의 약물 교육을 맡아 했었다. 왕족들은 필연적으로 늘 약물에 의한 독살을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약물에 대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왕궁에서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이 리젠과 동갑이라며, 르엘라는 리젠을 한껏 꾸며 왕궁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살짝 새침했던 아셰의 태도에 비해 다니엘은 맨 처음 약간 주눅 든 리젠을 만났을 때부터 친절했다. 리젠은 고급진 옷을 입고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왕자님에게 금세 시선을 뺏겨 버렸다. 그녀가 정원을 걷다가 한 번 넘어지자, 다니엘이 직접 일으켜 세워 주기까지 했다. 그 이후 학교에 다니면서 리젠은 다른 또래의 남자애들이 시시해졌다. 지금 왕궁에는 나랑 동갑내기인, 금발 머리의 파란 눈을 가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친절한 왕자님이 산다고!
그 기억 이후, 왕립고등학교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만난 다니엘과 아셰는 리젠을 당연히 기억했다. 아셰와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니엘과도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던 왕자님은 그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수업을 들었다. 꼬박꼬박 왕자님이라고 불렀었는데, 학교에 같이 다니는 이상 이름을 부르며 다른 동급생들처럼 대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어, 어떻게…… 왕자님을…….”
망설이는 리젠에게 열일곱 살의 다니엘이 씩 웃으며 얼굴을 들이 밀었다.
“다니엘. 다. 니. 엘.”
“어어…….”
“얼른 불러 봐.”
리젠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씩 웃고 대답했다.
“다니엘, 앞으로 잘 지내자.”
“좋아, 리젠.”
다니엘이 그녀의 갈색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한다며 뛰어갔다. 리젠은 그 뒷모습을 보며 짝사랑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다며 동경해 왔던 왕자님이 일시적이지만 동급생이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을 안 뺏길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왕립고등학교도, 왕립종합대학도 무조건 연애 금지였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없었지만, 그래도 다니엘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후 5년이다. 5년 동안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좋아해 왔다.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자꾸 카이든이 나오니 요즈음은 카이든 생각도 자주하게 된다. 어젯밤 꿈을 생각하며 조용히 걷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아셰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발걸음을 멈췄다.
“어떡해! 율법학 과제 안 내고 왔어!”
그녀들은 식당으로 이동 중이었다.
“얼른 다녀와. 식당 자리는 내가 맡고 있을게. 가방도 줘. 빨리 다녀와.”
“고마워! 얼른 올게.”
아셰는 파일을 하나 꺼낸 그녀의 가방을 리젠에게 맡기고 쏜살같이 달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리젠은 가방을 두 개 들고 터벅터벅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왜 카이든의 꿈을 꿨을까,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개꿈일까 생각하느라 바빴다. 터덜터덜 식당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아셰의 가방을 누가 번쩍 들었다.
“……어?”
“이거 아셰 가방 아니야?”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 같았다. 다니엘이었다. 그가 아셰의 가방을 받아 들고 씩 웃었다. 하얗고 귀티 나는 얼굴이 생긋 웃었다.
“무거워. 내가 들고 있을게. 식당 가는 거야?”
“응.”
그의 뒤에는 카이든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카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셰는 과제 내러 갔어. 금방 식당으로 올 거야.”
“그럼 같이 가자. 우리도 식당 가는 길이니까.”
“그럴까? 오늘 사람들 꽤 많을 거야. 후식이 과일 푸딩이래. 그것도 다섯 종류!”
리젠이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설레는 목소리로 말하자 다니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홀린 듯 다니엘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쿡쿡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카이든이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좀 뛰어야 하는 것 아니야? 다섯 종류의 과일 푸딩을 먹으려면 일찍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어차피 아셰도 좀 늦을 텐데.”
“그럼 카이든하고 먼저 배식 줄 서 있어.”
다니엘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식권 사 올 테니까.”
리젠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짝사랑을 하면 뒷모습을 실컷 보게 된다. 뒷모습을 보는 것은 들키지 않는다. 보고 싶을 때까지 볼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리젠에게도 친절했다. 왕자라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들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사실 리젠은 식권을 이미 한 달 전에 대량 구매해 놨지만, 살짝 바꿔치기 해서 다니엘이 사 준 식권은 간직할 속셈이었다. 그녀는 가벼워진 아셰의 가방 무게만큼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아 혼자서 바닥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포기하는 게 좋아.”
그녀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든이었다. 카이든도 똑같은 꿈을 꿨을 텐데, 그는 그녀보다는 침착해 보였다.
“뭐, 뭐를?”
“내년이면 유부남이야.”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아니면 다 알겠는데, 뭐.”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은 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마음 접어. 상처만 될걸.”
리젠은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가 정혼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아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리젠의 표정을 보며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민망했던 꿈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현실의 무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정혼자가 있고, 왕위에 관심이 없으니 애인도 두지 않을걸.”
“……알고 있어.”
“알면 포기해. 사랑 같은 것에 눈 뒤집힐 녀석이 아니야.”
“포기하긴 뭘 포기해? 뭘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다니엘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어쩌겠다고?”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뭘 어째?”
이해가 안 된다는 카이든의 표정에 리젠이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좋아하는데 뭘 어쩌겠어? 마음이 안 접히는데 어떡해? 그냥 좋아하는 거지. 혼자만 그런 마음 품고 있는 건 잘못이 아니잖아. 다니엘한테 부담을 준다거나, 욕심을 낸다거나,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냥, 그냥 내 마음을 간직만 하겠다는 거야.”
“……간직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만 해도 행운이지. 다니엘하고 같은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졸업하고, 이러다가 눈에서 멀어지면 멀어지고 나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겠지. 그 전까지는 열심히 기억하고 열심히 좋아할 거야. 이건 다니엘도 상관없는 내 전적인 개인적인 감정이니 걱정하지 마.”
카이든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저 멀리서 뛰어 오는 아셰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겨우겨우 과제를 내고 왔다며 입을 내미는 아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리젠을 보며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만 하겠다고? 오롯이 자신의 사정이라고? 다니엘도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좋아하면 당연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고, 사정상 그게 안 된다면 얼른 마음을 접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리젠이라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악바리 리젠 하카트라면 그런 식의 짝사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에게 절대 티를 내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대가가 전혀 없는 짝사랑.
저 멀리서 다니엘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리젠, 오늘도 도서관?”
방과 후, 강의실에서 짐을 정리하며 아셰가 말했다. 왕녀인 아셰는 부서 배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종합 시험을 치지 않았고, 그래서 리젠은 거의 혼자 남아 도서관에서 공부하곤 했다.
“쉬엄쉬엄해. 수석 하려다 몸 다 버리겠어.”
“다음 주만 지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놀 거야. 두고 봐.”
“아까 과제 내러 가다가 사파엘 교수님 만났는데, 엄청 시무룩해 계셨어.”
사파엘은 약제국 연구원이자 왕립마법대학 약초학 교수였다.
“약초학 성적 A+을 받은 상위 다섯 명 중 한 명도 약제국을 지망하지 않는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당황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