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56)

4화.

“개인 이용 시간 초과되었는데.”

카이든은 체력단련실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리젠이 팔짱을 끼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체력단련실의 개인 이용 시간은 2시간이지만 보통 늦은 시간에는 아무도 안 오기 때문에 카이든은 항상 저녁 늦게 와서 양껏 운동을 하다 가곤 했다.

“이제 나 좀 쓸게.”

리젠이 딱딱하게 말했다. 카이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다니엘이고,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셰다. 다니엘과 아셰는 사이가 좋은 오누이 사이다. 그러다 보니 넷이 가끔 함께 있을 때도 있었지만 리젠과 카이든은 좀처럼 친해지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카이든의 문제였는데, 그는 다니엘 외의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하루 종일 생각한 보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운동을 하며 몸을 혹사시켜서 그런지, 하루가 여물어 가는 저녁이 되자 카이든은 리젠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옆방 쓰면 되잖아.”

“샌드백 있는 건 여기밖에 없어서.”

카이든은 두말하지 않고 짐을 챙겨 옆방으로 옮겼다. 규정상 리젠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력단련실끼리는 모두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서로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잡고 목각 인형을 치며 옆방에서 샌드백을 치는 리젠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녀가 체력단련실에 오는 것이 처음이라, 훈련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녀의 주먹질과 발차기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녀와 대련을 하던 어젯밤 꿈이 떠올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리젠 쪽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평소 같으면 소 닭 보듯 하며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상대가 괜히 꿈에 한 번 나타났다고 엄청 신경 쓰였다. 검을 휘두르는 카이든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그의 어깨가 넓다는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시간에 그가 훈련실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왜 하필 둘밖에 없어서…… 그녀는 다니엘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서로 의식하며 각자의 훈련을 하던 그들이 다시 마주친 것은 훈련실에 하나뿐인 개수대에서였다. 각자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천천히 물을 마셨다. 리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다가, 왠지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 목을 가다듬었다. 꿈속의 일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티내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같은 동급생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웃기니까. 게다가 자신은 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원래 아무렇지도 않은 활달한 성격이니까. 그녀는 속으로 말을 고르며 가볍게 대화를 걸었다.

“카이든, 너도 아직 수사국 지망이지?”

“어.”

사실은 너무나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전교생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든의 짧은 대답에 리젠이 살짝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도 수사국이 1지망인데.”

“다니엘한테 들었어.”

리젠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할 말이 없어 머쓱해졌다. 카이든과 괜히 친해지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대화를 이어갈 의지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잊어버린 건지, 평소보다도 더 무심해 보여서 리젠은 속으로 안도했다.

“늦은 시간에 훈련실 오니까 좋네. 한적하고, 편하고, 조용하고. 넌 매일 이 시간에 와?”

“거의 매일.”

“그래서 도서관에서 안 보였구나. 그럼 공부는 언제 해?”

나름의 견제가 담긴 질문이었지만, 카이든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시간 날 때. 책 내용은 며칠 지나도 기억이 나지만, 운동은 하루하루가 다르니까.”

재수 없기는. 책 내용도 안 보면 하루하루가 다른데. 리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다 마셨다.

“그럼, 열심히 해.”

리젠이 싱긋 웃고 뒤를 돌던 참이었다. 카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리젠.”

“어?”

“수사국에 가면 별별 꼴 다 봐야 한다는데, 그래서 여성의 지원율이 낮다는데 왜 굳이 수사국에 지원하는 거지?”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리젠의 고모, 르엘라가 약제국의 굉장한 인재였기 때문에 누구나 리젠에게 약제국을 권했다. 리젠의 약초학 성적이 월등하게 좋기도 했고, 보통 여성들은 약제국이나 행정국으로 많이 지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수사국을 쓴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는 체술도 뛰어나고, 마법도 꽤나 쓰며, 활동적이고 대담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다 별별 꼴 못 보는 건 아니니까.”

리젠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혹시나 너랑 같이 근무하면 내가 짐이라도 될까 봐?”

“그럴 리가.”

카이든이 표정의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누군가한테 짐이 될 리 없지.”

“너는 열심히 안 사는 것처럼 말한다?”

이미 빈정이 상한 리젠이 대차게 대꾸했다.

“너나 나나 모든 성적이 비슷한데.”

“난 열심히 안 사는데?”

카이든이 씩 웃었다.

“운동은 몸 움직이는 게 좋아서 하는 거고, 별로 열심히 안 하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는 거야.”

“재수 없긴.”

리젠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까치발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든의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종합 시험에서 보자고. 수사국 지원 애들만 격투 대련하는 거 알고 있지? 그때 내가 꼭 열심히 살아서 너 이겨 준다. 기대해!”

반응이 당차고 활달한 리젠다웠다.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고 홱 돌아 걸어 다시 훈련실로 향했다. 카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높게 묶은 머리와 땀에 젖은 운동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저 라이벌 관계의 그저 성격 좋고 예쁘장한, 다니엘을 좋아하는 여학생일 뿐이었지만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지 오늘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앗! 탓!”

훈련실에 도착한 카이든은 샌드백을 열심히 치고 있는 리젠을 바라보았다. 저 작은 몸으로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래.”

카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종합 시험 대련에서 보자.”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리젠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을 하다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왔다. 르엘라가 죽고 난 뒤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이나 체력단련실에서 보냈다. 집에 오기 직전에 체력 단련을 하니 씻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잠이 쏟아졌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리젠은 처음 보는 곳에 혼자 서 있었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멀리에 푸르게 빛나는 호수가 보였다. 아메탄 왕국의 수도, 아메니티는 아닌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저 멀리 양들이 온순하게 모여 풀을 뜯고 있었다. 그녀는 정처 없이 걸었다. 산책로가 예쁘고 공기가 좋아 마치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리젠이 걷는 산책로는 양지바른 언덕으로 이어졌다.

“다녀오겠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젠은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리만큼 똑똑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머리의 소년이 두 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 뒤로 살며시 다가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무덤 앞에 묘비가 있었다.

[알버트 루스, 왕국력 2132.10.10.-2170.04.05.]

[나탈리 루스, 왕국력 2135.02.24.-2170.04.05.]

루스라면 카이든의 성이다. 리젠은 등 뒤에 큰 검을 메고 무표정으로 묘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지만 분명 카이든이었다. 

“지켜봐 주십시오. 반드시 수사국에 들어가겠습니다.”

리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든은 형이 하나 있고, 그 형이 영지를 물려받았다고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부모가 없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이 묘지는 루스 지방의 영주였던 카이든의 부모님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을 밝혀내겠습니다.”

카이든은 묘지 앞에 꽃을 두고, 양피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왕립고등학교 합격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열일곱 살이다. 5년 전이구나. 5년 전에도 그는 리젠보다 키가 훌쩍 컸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한동안 무덤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리젠을 바라보았다.

“리젠?”

그녀는 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음…… 괜찮아?”

리젠이 다소 망설이며 물었다. 카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면, 그녀가 고모를 잃었을 때보다 어린 나이다. 온갖 감정을 다 누른 무표정을 보며 리젠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부모님 같던 고모를 잃었어.”

카이든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도…… 정말 하루하루가 상실감에 고통스러워도 어떻게든 살더라고.”

리젠은 카이든의 얼굴에 깃든 깊은 슬픔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열일곱 살에 이미 세상을 다 산 표정을 하고 있는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큰 그를 가만히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너는 아메니티에 가서 좋은 친구도 사귈 거고, 또 수사국에도 들어갈 거야.”

카이든은 그녀의 포옹에 눈을 감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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