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56)

3화.

“……싫어?”

카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리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묶었던 머리가 어느새 풀려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잘생긴 건 알았어도 다니엘을 보느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눈매가 깊고 코도 높다. 다니엘이 여성스럽게 예쁘장하다면 카이든은 정말 남자답게 선이 굵고 잘생겼다. 리젠이 그를 바라보는 도중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탐하고 있었다. 탐욕스럽게 움켜쥐다가, 소중하게 주무르다가, 그녀의 가슴 중앙 주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그녀는 펄쩍 일어날 뻔했으나 단단히 잡힌 그의 다리 때문에 다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매일 차가운 모습만 보이고, 공부 아니면 수련에만 몰두하는 카이든에게서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매일같이 수업을 같이 듣는 강의실이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짓을! 그의 두 다리가 단단히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가 다리를 휙 벌렸다.

“안 돼!”

“힘 빼.”

그가 그녀의 맨 어깨에 입술을 대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녀의 다리가 의자에서 속절없이 벌어지고, 치마는 기어 올라가 허벅지 위까지 위태롭게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갈 때였다.

“거기, 거기는 안 돼……. 아, 제발…….”

[따르르르릉! 기상! 기상!]

리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에서 깬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하여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이제 교실이 아니라 그녀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잠옷을 내리고 오른 어깨를 확인했다. 꿈속에서 그의 입술이 남긴 상처가 남았을 어깨는 거짓말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해…….”

그녀는 알람시계를 누르며 울먹였다.

“오늘 카이든 얼굴을 어떻게 봐…….”

1. 갈림길

“다음 주까지 1지망에서부터 3지망까지 부서를 써 온다. 부서 배정 발표는 다음 달 1일에 나고, 2일에는 졸업식이다. 다음 주가 종합 시험 주간이니 공부 열심히들 하고. 이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교의 안내를 들으며 카이든은 천천히 책을 가방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어젯밤 꿈이 너무 생생해서 하루 종일 잔상으로 남았다. 남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한창 나이에 왕궁의 인재로 뽑혀 금욕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간간히 여자 꿈을 꾸는 건 당연했고 몽정도 가끔 했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애써 앞쪽의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의 여학생을 보지 않으려고 괜히 책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떻게 리젠 하카트가 꿈에 나올 수 있지? 그리고 이 강의실에서, 이 의자에서, 둘이 정말 낯 뜨거운 짓을 했다. 꿈이기 때문에 카이든이 뭐 어떻게 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눈을 떠 보니 너무 생생한 꿈이 기억났을 뿐이다. 너무나 꿈이 생경하여 오늘 식당에서 슬쩍 리젠의 오른쪽 목을 보았으나 자신이 낸 자국이 있을 리 없었다.

리젠은 자신과 수석을 다투는 인재로 꽤나 귀염성 있는 얼굴과 활달한 성격을 가진 꽤 괜찮은 여자아이였지만, 어쨌든 자타가 공인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와 가장 친한 다니엘과 붙어 다니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젠은 다니엘을 좋아한다. 그녀의 시선이 다니엘에게 못 박힌 걸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니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런 여자들이 너무 많아 아예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어차피 약혼자가 정해진 몸이니.

“리젠, 리젠. 어디 쓸 거야?”

하필 리젠과 아셰가 앞자리에 앉아 있다. 아셰가 다니엘의 근처에 앉겠다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둘의 대화가 의식하지 않아도 들려왔다.

“1지망은 수사국일 테고. 수석은 몰라도 바로 들어가겠지? 2지망하고 3지망은?”

“2지망은 정보국, 3지망은 의료국.”

“어차피 수사국 바로 들어갈 테니 의미는 없겠지만, 약제국 하나도 안 쓸 거야?”

왕립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왕국에서 추가 교육을 시켜 바로 왕국 직속 기관으로 편입시킨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다니고 있는 왕립마법대학의 학생들은 모두 성적순으로 원하는 기관을 지망하게 되는데, 리젠이나 카이든은 어차피 1등과 2등이었기 때문에 1지망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약초학 성적이 그렇게 좋은데도?”

“안 써. 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 처박혀서 연구만 하다가는 고모처럼 미쳐 버릴지도 몰라.”

한 번 꿈에 나왔다고 이렇게 의식하게 될 줄 몰랐다. 다행히도 리젠과 이상하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평소라면 다니엘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꼭 한두 번씩 마주쳤을 텐데 오늘은 그들의 앞자리에 앉아서도 공부만 열심히 할 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셰 너는…… 이제 졸업하면 시집가겠네?”

“그렇지, 뭐. 나도 그냥 왕족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진짜 약제국 가고 싶은데. 그냥 평범하게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았으면 좋겠지만.”

아셰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왕위 계승권에서 먼 왕족들의 운명이란 다 정략혼이다. 그의 옆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다니엘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셋째 왕자로 적통이기는 하지만 왕위 계승권이라고 볼 수 없었다. 비의 소생이자 여자인 아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셰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야 하므로 더 비참한 처지였다.

지금의 왕은 처음에 왕비와 비 둘을 두었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통 아들이 첫째인 윌리엄과 셋째인 다니엘이다. 그리고 왕비는 죽었고, 원래 비였던 테스티가 정비로 올라왔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둘째 왕자인 루벤이다. 그리고 계속 별다른 욕심 없이 조용히 살고 있던 나머지 하나의 비가 낳은 딸이 다니엘과 동갑인 아셰다.

왕족들은 향후 인맥관리와 엘리트들과의 교류를 위해 왕립고등학교와 왕립마법대학을 평범한 학생처럼 다니지만, 졸업 이후로는 이제 그들에게 꼬박꼬박 왕자님과 왕녀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지금은 친한 친구이지만 반년만 더 지나면 완벽한 군신 관계가 되는 것이다.

윌리엄이 건강하고 선량한데다가 첫째 아들이며 정통성까지 있으니 후계는 탄탄하다고 봐야 했다. 다니엘도 아셰도 자신들이 정략혼으로 외교 도구 중 하나로 쓰인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리젠이 저런 눈빛을 하고 다니엘을 보면서도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있는 거겠지.

카이든의 눈이 또 리젠의 오른쪽 목으로 향했다. 어제의 꿈이 무색할 정도로 하얗고 매끈했다. 저 길고 하얀 목에 이를 박고, 입술로 물어 보라색으로 멍들게 했었던 어젯밤의 잔상이 생각나 그의 아래가 묵직해졌다.

“카이든, 가자.”

다니엘이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어, 잠시. 뭐 하나만 확인하고.”

그가 분주히 아무 책이나 훑으며 머뭇거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아셰와 리젠이 지나갔다. 리젠의 교복 치마를 보니 또 그 속으로 들어갔던 자신의 오른손이 생각나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저녁, 리젠은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부 중이었다. 어쨌든 다음 주가 종합 시험이다. 원하는 수사국에는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수석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가장 큰 경쟁자가 카이든이다. 대련에서는 마법을 써도 이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꿈속에서 그가 마법을 써도 자신을 못 이긴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꿈속을 떠올리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무슨 그런 이상한 꿈을 꿔서! 카이든은 자신의 꿈속이라고 생각할 테니 무의식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생생하게 기억까지 한다고 했으니 카이든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리젠은 한참이나 딴생각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풀썩 엎드렸다.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다만 다니엘과 현실이 아닌 곳에서 한 번만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리젠이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왕자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왕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남자였으면 했다. 성적이 모자라 왕립종합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계속 좋아했을 것 같다. 산하기관에 들어가면 월급도 많은데 그냥 그녀가 부양하고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혼자가 이미 정해진 왕자라니. 물론 그 정혼자와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그를 향한 감정을 숨겨야 할 당위성으로는 충분했다. 원칙적으로 국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왕족은 계승자뿐이다. 국내에 애인을 둔다는 것은 공공연한 반란을 암시하는 뜻이기도 했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그것은 왕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베푸는 매너일 뿐이다. 그녀는 언감생심 왕족의 일원이 되겠다는 마음도 품은 적 없다. 다만, 다만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아직 추스르지 못한 것뿐이다. 그녀는 왕궁 직속 기관인 수사국에서 충성을 다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다니엘을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이 많아져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체력 단련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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