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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256)

2화.

그새 리젠은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1회성이다. 카이든에게는 그냥 하룻밤 꿈에 자신이 나오게 될 뿐이었다. 심각한 일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리젠은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지. 어차피 동료로 일할 건데 라이벌 의식 가져서 뭐 해?”

다니엘 앞이라서 천사처럼 말했지만, 속으로 리젠은 이를 갈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전교 1등과 2등 사이로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쟁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수사국에서 꼭 수석을 해서 카이든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걸 남들에게 알려 줘야지. 그 마음은 카이든도 같은지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의외야. 리젠 정말 약제국 지원할 줄 알았는데.”

아셰가 고개를 갸웃하며 백 번도 더 말한 이야기를 했다.

“약초학 엄청 잘하잖아. 심지어 르엘라의 조카에.”

“난 고모처럼 미치기 싫어.”

리젠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너무 연구실에 혼자서 처박혀 있으니 미친 게 분명해. 난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활동적이니까 수사국이 더 잘 맞아.”

“와, 이렇게 된 이상 수석이 누가 될지 너무 궁금한데. 미리 둘이서 대련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니엘이 웃을 땐 파란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면서 예쁜 곡선을 만든다. 리젠은 하얗고 고운 다니엘의 얼굴과 찰랑이는 금발 머리, 반짝이는 푸른 눈을 바라보며 잠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카이든 꿈을 꾸고 내일 기필코 다시…….

“세기의 대결을 왜 벌써부터 보려고 그래?”

아셰가 다니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어차피 둘 다 결정타는 보여 주지 않을 텐데, 뭐하러 대련을 시켜. 수사국 입사 시험 때 보면 되지.”

“아, 너무 기대돼. 진짜 모르겠어.”

“난 리젠! 리젠이 이겼으면 좋겠어!”

“카이든은 괴물 같아. 이기기 힘들걸.”

두 남매가 신나게 떠들 동안, 리젠과 카이든은 별말 없이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도 왕립마법대학 재학 중일 때뿐이다. 졸업한 뒤에는 어차피 리젠도 카이든도 왕족에게 충성을 바치는 산하기관의 직원이 되는 것이다.

그날 밤, 리젠은 카이든의 꿈을 꿀 것이 분명하니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 의식이 몽롱했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얼마나 떠돌았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오후에 있었던 대련장이다. 카이든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와, 이 자식은 꿈에서도 훈련이야? 독한 놈.’

꿈속이었기 때문에 대련장은 현실과는 달리 묘하게 왜곡이 되어 있었다. 고모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꿈속의 공간은 전적으로 시약을 마신 사람의 무의식에 달려 있었다.

‘무슨 기술 쓰나 볼까? 이참에 종합 시험 대비도 할 겸.’

리젠은 조심스럽게 훈련장 구석에 앉았다. 종합 시험 중에 1:1 대련이 있다. 발로 뛰는 수사국의 특성상 전투 능력이 당연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성별의 차이가 있으므로 리젠은 선택 과목인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었지만 마법은 1:1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카이든의 움직임을 잘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음……. 잘한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어.’

카이든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었는데, 카이든의 검은 눈이 문득 자신을 향했다. 눈을 마주친 리젠이 흠칫했다. 

“아, 카이든.”

리젠은 눈을 깜빡이며 심호흡했다. 괜찮아, 저건 카이든이 아니라 카이든의 무의식이고, 어차피 하룻밤 꿈이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그녀의 어설픈 웃음을 보며 그가 무표정으로 물었다.

“리젠 하카트, 여기는 무슨 일이지?”

와, 꿈에서도 살벌하네. 리젠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대련!”

조금 야비한가. 혹시나 필살기가 들킬까 봐 실제로는 절대 대련하지 않는데.

“대련하지 않을래?”

그녀는 다니엘만 앞에 없다면 굉장히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밝게 웃어 보이는 리젠을 보며 꿈속의 카이든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왜곡되었다. 카이든의 꿈속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원래 꿈은 무의식에 따라서 자꾸만 비상식적으로 바뀌니까. 리젠은 순간 어지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어, 여긴…….”

강의실이었다. 대체 왜 대련하는데 강의실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카이든의 꿈속이니까. 어느새 그녀의 옷도 교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블라우스의 맨 위 단추를 하나 풀고, 리젠은 책상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쥐었다. 카이든 역시 맨손으로 격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너무하네.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하나도 없고.’

남녀가 함께 대련할 때 원래 규칙은, 성별에 따른 신체적 격차를 보정하기 위해 여자에게 무언가 세부 전공을 하나 더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녀의 경우 마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봐서 꿈속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카이든에게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그래도 순수하게 주먹다짐을 해 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리젠은 먼저 책상을 박차고 올라가 발로 카이든의 가슴을 찼다.

“하앗!”

카이든의 가슴은 밀리지 않았고, 다만 한순간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의자로 내리찍었다. 그녀는 한 바퀴 돌아 펄쩍 뛰어 다른 책상을 밟고 섰다. 꿈인데도 욱신욱신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도약하여 카이든의 얼굴을 노리고 크게 발을 찼다. 카이든은 쉽게 피했고, 살짝 피한 카이든의 배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반동으로 내려오는 그의 턱에 두 번째 일격을 가하려는 차였다.

“악!”

그녀의 발이 카이든의 발에 휙 걸렸다. 순간적으로 회전을 걸었으나 그의 팔에 목이 단단히 붙들렸다. 카이든이 책상 하나를 발로 차서 의자에 앉았다. 한 번 제압되니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카이든 위에 안긴 꼴이 되어 버둥거렸다. 한쪽 팔로는 카이든에게 목이 감겨 있었고, 한쪽 팔로는 상체가 완전히 제압되어 있었으며 두 다리는 카이든의 단단한 다리에 잡혀 있었다.

“항복해.”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몸을 바둥거리며 이를 갈았다.

“절대 못해.”

“패배를 인정하지 그래. 다른 건 나와 비등비등하다고 해도, 격투만은 안 돼.”

리젠이 분해서 콧김을 내뿜었다. 그래, 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왠지 무시하는 것 같았던 그 눈빛이 그 뜻을 품고 있었구나. 아무리 왕립종합대학 여자 대련 1위라고 해도 전혀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 표정이 생각나 리젠이 짜증을 냈다.

“마법을 쓰면 또 다르다고!”

“다를 것 같아?”

그가 쿡쿡 웃었다. 그는 리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고 놀리듯 웃었다.

“난 한 손만으로도 널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데?”

그의 왼쪽 팔은 그녀의 팔과 몸통을 완전히 포박한 상태였다. 그녀는 약이 올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제압될 줄 몰랐다. 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여자들 사이에서는 정말 압도적인 체술(體術)을 갖고 있었고, 어지간한 남자들과는 격투를 해도 쉽게 이겼다. 그래서 꽤나 호각을 다툴 줄 알았는데…….

“패배를 인정하지 그래, 리젠 하카트.”

“싫어!”

리젠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은 뭘로 만들어져 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움직이지 마.”

“웃겨, 난 포기 안 해.”

“진짜…… 움직이지 마. 못 참겠다고.”

리젠은 갑자기 잠겨 버린 것 같은 카이든의 목소리에 놀라 흠칫하여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 바둥거리느라 몰랐는데 그의 몸이 뜨거웠다. 게다가 포개 앉은 엉덩이 밑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리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직 학생이고, 이성 교제 경험도 없어 당연히 리젠은 남자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카이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립학교에 다니는 이상 나랏돈으로 공부를 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력을 아끼라고 이성 교제는 물론 관계도 금지된다. 그러나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는 여자들끼리 돌려 보았던 책에 의해 알 수 있었다.

“……못 참겠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처음 느끼는 남자의 입술 감각에 리젠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목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며 순간 신음이 흘렀다. 그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그녀의 교복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리젠은 다시 버둥거렸으나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강의실에서, 의자에 포개 앉아서, 꼼짝도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블라우스의 교복 단추가 모두 풀어지고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근육이 단단한 배로 움직였다.

스물둘이라면 한창 나이다. 왕궁의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억지로 모든 욕망을 참아 왔던 그였고, 사실 기억이 안 날 뿐이지 여자가 나오는 꿈은 많이 꾸던 차였다. 다만 리젠은 무의식의 카이든이 이렇게 대중없이 성적으로 다가올 줄 몰라서 몹시 당황했다. 양손이 그에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 속 브래지어로 훅 들어왔다.

“안 돼! 아, 안 돼!”

브래지어가 올라가며 그녀의 상반신은 거의 나신이 되었다. 블라우스는 다 풀어헤쳐지고, 속옷은 굴욕적으로 올라갔다. 그의 혀가 이제는 혈관이 부풀어 올라 얼얼한 그녀의 목을 핥았다. 처음 느껴지는 감각에 리젠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이를 악물었는데도 신음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아……. 이러지 마…….”

그의 입술이 물었던 어깨와 목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그의 흔적을 카이든이 야릇하게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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