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256)

1화.

프롤로그

“그래…… 아마 여기 있을 거야. 아, 찾았다!”

리젠은 다락방에서 몇 개의 상자를 헤집어 놓고 나서야 약초를 하나 찾아냈다. 약초학 수업에 필요한 학교 준비물이었는데 까먹고 있다가 밤 늦게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동네 약초상들은 이미 문을 다 닫았을 때라 막막했는데 번개같이 다락방이 기억났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다락방에는 예전에 함께 살던 고모 르엘라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르엘라는 천재 약제사로 왕국 전체에 이름을 날렸으나 수많은 약을 개발한 뒤 젊은 나이에 미쳐 버렸다. 르엘라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리젠은 그래서 왕립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미쳐 버린 고모를 부양했었고, 리젠이 성년이 되는 해에 르엘라가 죽고 나자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근데 별별 것들이 다 있네…….”

찾던 약초를 손에 쥐고 나니 새삼 이런저런 것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성년이 되고 그녀는 왕궁을 위해 일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추가 교육을 받는 왕립종합대학에 입학했는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약제 수업을 받고 나니 이제야 고모의 유품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구하기 힘든 약초들도 꽤 많았고, 몇백 년 동안 숙성시킨 약들도 많았다.

“……됐다, 가자.”

리젠은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억지로 들어 상자를 다시 닫았다. 다시 끙끙대며 상자를 원래 있던 자리로 옮기는데, 노트 한 권이 툭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쳐 들었더니 미치기 전 르엘라의 악필이 한눈에 들어왔다.

- 투명 시약

재료: 100년산 달맞이꽃, 파르트의 날개 조각, 토치의 이빨, 500년산 카놀라틴 뿌리, 타이탄의 발톱 가루 200g, 타린의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잎 4장, 탄화산 용암 1L

효능: 1시간 동안 사람의 몸을 투명하게 한다.

기대 효과: 은신, 잠입 등

한계: 물리적인 질량은 보존되므로 벽이나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이런 걸 어떻게 개발해 냈지?”

고모의 글씨만 잠시 보려고 했는데, 책을 펼치자 흥미로운 내용이 너무 많아 리젠은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거의 대다수가 현존하는 약제술을 훨씬 더 뛰어넘은 기술이 많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시약 제조법들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괜히 르엘라가 왕국 역사 최고의 천재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르엘라는 왕립 산하기관인 약제국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거의 대다수가 군대와 수사에 필요한 목적으로 개발된 약물이었다.

“그런데 파르트의 날개는 어떻게 얻고, 타이탄의 발톱 가루는 어디서 나는 거야?”

하지만 그다지 지금 리젠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없었다. 대다수가 너무 터무니없이 오래 숙성하는 약초를 요구하거나, 대체 어디 사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 마물들의 신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약은 2,000년 된 민들레 뿌리가 재료였는데, 2,000년 된 민들레 뿌리를 어디서 구하라는 건지 리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대다수의 시약이 제조가 어려운 현실성 없는 제조법을 무심히 읽고 있던 리젠의 눈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 꿈 연결 시약

재료: 나비잠꽃 100g, 틸다 뿌리 200g, 나그다의 진흙 한 줌, 라타의 발톱 50g, 계약자의 머리카락 한 올

효능: 계약자의 머리카락이 든 시약을 마신 사람의 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평범한 꿈보다 기억이 생생함.

기대 효과: 타국의 스파이와 증거 없이 연결 가능.

한계: 1회성이므로 지속된 연결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마셔 주어야 한다. 두 사람 이상 사용 시에 끔찍한 부작용이 우려된다.

“어? 이건 재료가 왜 이렇게 간단하지?”

리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이고 그 페이지를 읽었다. 다른 사람의 집이라면 이런 재료가 다 있을 리 없겠지만, 나그다의 진흙 빼고는 확실히 다락방에 다 있는 재료였다. 그리고 왠지 기억을 뒤져 보니 아까 나그다의 진흙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그녀는 홀린 듯이 다락방을 뒤져 지저분한 진흙 통을 하나 찾아냈다.

“나그다의 진흙도 찾았고…….”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회성으로 꿈에 나온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르엘라는 군사 목적으로 이 시약을 개발한 것 같았지만…… 조금 더 로맨틱하게 생각하면, 원하는 상대를 꿈에서 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리젠은 일단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 뽑았다. 재료는 모두 있다. 그리고 이런 시약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한 번쯤 해 본다 해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할 수 있다. 내일 다니엘한테 먹이면, 다니엘과 꿈속에서 한 번은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재료와 냄비를 챙겨 다락방을 나섰다. 다니엘이 꿈에 나타나 달라고 매일 밤 빌었었다. 한 번만, 고모, 한 번만 사적으로 고모의 약 좀 쓸게. 어차피 다니엘하고 잘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한 번만이라도, 꿈속에서라도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서 그래. 그날 밤, 리젠은 물처럼 투명한 무색무취 무미의 시약을 하나 만들었고 조심스럽게 가방에 챙겼다.

“다니엘! 잘한다! 다니엘!”

아셰가 팔짝팔짝 뛰면서 다니엘을 응원할 동안, 리젠은 손에 물병을 잡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대련 중이었다. 아메탄 왕국의 셋째 왕자,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 3세는 리젠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다. 그리고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은 다니엘과 배다른 동갑내기 여동생이었는데,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재학 당시 왕녀랑 친해졌다가 그녀의 오빠인 다니엘에게 완전히 반했었다.

“으아! 안 돼! 한 번 더 찔러! 아아!”

다니엘과 아셰는 꽤나 사이가 좋은 오누이였는데, 그래서 리젠은 아셰가 다니엘을 보러 가자고 할 때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젠은 다니엘에게 평생 고백 한 번 못 해 볼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왕자나 왕녀는 거의 대다수가 외교적 목적으로 정략혼을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이미 제국의 황녀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상태였고 아셰 역시 사막 국가인 한스팀의 왕자 중 하나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리 평상시에 친구처럼 지낸다 하더라도 왕족은 왕족인 것이다.

“윽, 져 버렸네. 역시 카이든 이기는 건 무리였나 봐.”

다니엘의 대련 상대는 카이든으로, 숨을 헉헉거리는 다니엘과 비교해서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카이든이 다니엘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 리젠은 다소 얄밉다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이겨 먹을 필요는 없었잖아! 상냥하고 언제나 다정한 다니엘과는 반대로 카이든은 무뚝뚝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게다가 카이든과 리젠은 왕립고등학교 시절부터 수사국 지망인 라이벌 관계였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전교 1등과 2등을 번갈아 가며 했었는데, 둘 다 수사국 지망이라 선생님들과 동급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누가 수사국 수석으로 들어갈지 암암리에 내기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대학 졸업도 가까워지고 슬슬 어느 부서에 들어갈지 원서를 쓸 때가 되었는데, 그래서 카이든과 리젠의 신경은 서로 날카로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수사국 수석 입사는 승진이 확실히 빠르다. 리젠은 오랜 라이벌 관계인 카이든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리젠, 저 녀석 점점 더 괴물 같아져. 수사국 수석하려면 엄청 노력해야겠어.”

다니엘이 키득대며 아셰와 리젠 곁으로 다가왔다. 아셰가 다니엘의 땀을 닦아 줄 동안 리젠은 물병을 들고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이거 마시라고 하면 되는데……. 그녀가 기계처럼 뻣뻣하게 손을 뻗어 물병을 내밀 때였다.

“아, 카이든! 뭐 해? 이리 와. 관객분들한테 인사는 해야지.”

다니엘은 붙임성 없는 자신의 친구, 카이든을 손짓으로 불렀다. 카이든이 마지못해 다가온다는 듯 검을 검집에 꽂고 다가왔다.

“다, 다니엘, 목마르지 않아? 이거 마실래?”

“아, 고마워, 리젠.”

다니엘은 리젠이 건넨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오늘 밤에는 꿈에서 다니엘을 만날 수 있다. 적어도 손을 붙들고 좋아한다는 말을 꿈에서라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똑똑하고 예쁜 애 정도로 말해 주기만 한다면……. 리젠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카이든, 너부터 마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리젠의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 다니엘이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리젠의 물병을 카이든에게 넘긴 것이다. 리젠이 당황해서 어떻게 하기도 전에, 카이든은 다니엘이 넘긴 물병의 물을 다 마셔 버리고는 옆의 수도에서 다시 채워서 다니엘에게 건넸다.

“왜 그렇게 둘이 내외하고 그래? 너무 공인된 라이벌이라서 그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리젠은 다니엘의 농담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카이든이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대충 대답했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맞잖아.”

아셰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둘 다 수사국 수석 노리고 있는 것 아니야?”

“선택 과목이 다르니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지.”

“에이, 선택 과목은 성별 차이 때문에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머지 기준이 똑같은 점수들의 배점이 훨씬 높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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