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68)

한 마디만 해 주세요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손발이 묶인 채 버둥거릴수록 묶인 자리가 살갗으로 파고들어 고통스러웠다.

‘엄마…….’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바닥과 닿은 얼굴이 질척이다 쓰라렸다. 다발적으로 고통이 밀려왔다. 연재는 고통에 집중했다. 날카로워지는 신경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육체의 고통에 신경을 분산시켰다.

‘제발 누구라도 도와줘.’

바닥에 달라붙는 끈적이다 쓰라린 볼, 묶인 손목을 빼내려 애쓰다 쓰라린 손목, 발버둥 치려 안간힘을 쓰다 부어오른 발목. 침대에서 떨어질 때 바닥에 부딪혀 여전히 욱신대는 어깨.

그럼에도 육체의 고통을 압도하는 것은, 지금 문으로 다가오는 아주 가볍고도 경쾌한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였다.

‘오지 마. 제발…….’

쓱, 쓰윽, 쓱. 일정한 속도로 바닥에 끌리던 소리가 일순 멈췄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함부로 쏟아지는 빛에 시력이 마비됐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빛을 등진 거대한 몸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우웁, 욱우우.”

“기다려요. 벗겨 줄 테니까.”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려 뒤로 물러났다. 정욱이 다가올수록 뒤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결국 등 뒤로 침대가 닿았고,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 순간, 정욱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침대에 던졌다.

“욱.”

막힌 입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빛에 마비되었던 동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악마처럼 웃고 있는 정욱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정욱의 손이 다가와 어깨를 짓누르고 윗옷을 들추려 했다. 겁에 질려 고개를 미친 듯이 내저었다.

‘만지지 마, 이 미친놈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정욱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다리는 풀어 줄게요.”

어깨에서 손을 뗀 정욱이 다리를 잡아 들었다. 마침내 다리가 풀리고 정욱이 다시 몸 위로 올라탔다. 연재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읍, 읍.”

“기다려요. 곧 천국으로 보내 줄게.”

천국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정욱이 옷을 벗기 위해 몸을 떼어 낸 순간, 젖 먹던 힘을 다해 정욱의 가랑이를 발로 찼다.

통쾌함도 잠시, 연재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너부터 지옥으로 보내 줄게.’

‘지금이야. 도망쳐야 해.’

단언컨대 축구공을 찼더라면 이쪽 골대에서 상대편 골대까지 날아갈 만큼 강하게 쳤다.

허둥대는 다리를 간신히 진정시켜 침대에서 내려와 무작정 문을 향해 뛰었다. 우사인 볼트가 울고 갈 만큼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허윽.”

효과는 직방이었다. 꼬꾸라진 정욱이 숨넘어갈 듯 꺽꺽거렸다. 보는 연재의 미간이 다 찌푸려질 정도로 가관이었다.

‘현관, 현관이 어느 쪽이었더라.’

두리번거리다 연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택했다. 누구라도 분명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라도 좋아. 제발 누구라도…….’

조금 더 빨리 속도를 내려 해도 뒤로 묶인 두 손 때문에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손이 묶인 채 계단에서 구르면 볼썽사납게 죽을지도 모른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시야를 방해했다. 마음만 급했다. 당장 정욱이 쫓아올 것만 같다.

계단은 중간에 한 번 꺾어지는 코너가 있었다. 하지만 상체가 묶인 연재는 제가 뛰어가는 속도를 조절하기 벅찼다.

코너를 도는데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그 반동은 고스란히 속도로 귀결됐다.

상체가 묶인 연재의 몸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떴다.

“우우, 읍.”

이렇게 죽는구나.

그 짧은 찰나에 만감이 교차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현조 씨.’

마지막 순간 떠오른 얼굴은 가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툭-

아프지 않았다.

“연재야.”

정욱이 보내겠다던 천국에 이렇게 도착했나.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는걸 보면 정말 천국인가 보다.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드는 것도…….

천국이라서 가능한 거겠지.

‘신이시여.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숙하고 단단한 가슴팍과 류현조에게서만 맡을 수 있었던 향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래,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하고, 선명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요. 엄청 아파요. 기다렸다는 듯 몸뚱이가 아우성쳤다. 고통이 다시 한꺼번에 밀려왔다.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류현조다.

“죽는 줄 알았어. 너를 다시 못 보게 될까 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쁨, 고통, 번뇌, 안도 그 온갖 감정이 버무려진 얼굴은 환희 같았다.

“네가 너무 간절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

환희에 젖은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연재는 와닿았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전신으로 번지는 지독한 통증이 이토록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자신을 품에 안은 남자의 젖은 목소리가 그것을 대변했다.

살았다. 그리고 까무룩 의식이 멀어졌다.

***

문자를 받은 것은 전화를 끊고 한참 지난 후였다. 마침 신호대기 중이던 현조는 날아온 음성 파일을 재생시켰다.

“권정욱!”

현조는 그때부터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이토록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정욱의 한마디, 한마디가 뇌리에 박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빌라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려 있는 차고지에 차를 세웠다. 차고지가 열리면 현관 잠금장치도 해제되는 시스템인지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뒤쪽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뛰어가는데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발소리는 곧 넘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연재야.”

계단 앞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 품에 뛰어든 것은 연재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제 품에 안긴 연재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가슴속에 밀려오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신 차려 봐. 연재야!”

그것도 잠시, 품에 안긴 채 연재는 의식을 잃었다. 연재를 품에 안아 들고 부르는데 뒤이어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왔어? 잡았으면 이리 줘 봐. 아직 할 일이 덜 끝났거든.”

웃으며 말하는 정욱의 눈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현조는 조심스럽게 연재를 소파에 내려놓고 뒤돌아서 정욱의 멱살을 잡았다.

“패고 싶어?”

“아니.”

죽여 버리고 싶다.

그 서늘한 눈빛을 읽은 것인지 정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정상적인 눈이 아니었다.

“아니면 죽이고 싶어?”

“그래.”

“해 봐, 그럼. 그다지 통증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지금이 기회야.”

뭔가 이상했다. 정상적인 눈빛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이 눈은…….

“왜? 너도 천국을 보여 줄까?”

현조는 정욱의 멱살을 놓고 팔뚝을 노려봤다.

“황홀할 거야.”

설마.

“뭐야, 강 형사님도 오셨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권정욱 씨, 서연재 씨 납치 및 감금 협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납치? 감금? 그럴 리가 있나요. 형사님 저 아시면서 그런 오해를 하세요.”

표정을 바꾼 정욱이 태연하게 말했다. 현조는 그런 정욱을 보면서 치를 떨었다.

“증거는 서에 가서 보여 드리죠.”

“실수하는 겁니다. 사장님께서 아시면 노여워하실 텐데.”

“자세한 이야기는 진술서로 받겠습니다.”

멍청하게 서 있는 정욱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앞이 잔뜩 흐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얼굴은 현조였다.

“정신이 들어요?”

검은 눈동자엔 온통 걱정이 가득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왼쪽 목덜미가 당겼다. 미간이 구겨졌다.

“아픕니까? 어깨가 살짝 부었던데 혹시.”

“맞은 거 아니에요. 침대에서 떨어져서.”

“하아.”

긴 숨을 내뱉는 현조의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겪은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연재는 실감했다. 묶였던 손목과 발목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여긴 병원인가요?”

“그래요. 의식을 잃었다가 이제 깨어난 겁니다.”

여기저기 아픈 몸과 붕대가 감겨 있는 손목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아주 긴, 악몽을 꾼 것 같았다.

“권 실장님은…….”

끔찍했던 시간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연재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처벌받을 겁니다.”

“가늘고 길게, 아주 오래오래 감옥에서 반성하게 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화가 풀릴 때까지 패 주고 싶지만, 이 남자에게 그런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늦은 줄 알고, 얼마나…….”

일그러진 현조의 얼굴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가장 괴로운 것은 현조가 아닐까.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로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서 미안해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테지.

“현조 씨 잘못 아니에요.”

“…….”

“처음부터 그놈이 나빴던 것뿐이에요.”

믿음, 신뢰, 우정.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녹음 파일을 듣기 전까지는 정욱의 괴로움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적어도 자신 때문에 서진이 죽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연재를 납치한 것은 용서할 수 없더라도 정욱의 괴로움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할 말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선화가 보내준 녹음 파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완벽하게 속았던 지난 시간이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 허무했다. 여전히 서진을 향한 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욱의 이중성은 이가 갈리게 했다.

‘과거 사건은 부인했지만, 녹음 파일을 들려주자 범행을 인정했습니다. 서연재 씨를 납치하고 감금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거기다 약물 중독이더군요.’

서진에게 가했던 행위는 성폭행으로 판명 났다. 선화가 녹음한 파일이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처벌은 어려웠다.

하지만 약물복용, 납치 감금, 성폭행 미수까지 더해져 상습범으로 인정되었고,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사는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나 더 많은 범행이 추가로 밝혀질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용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현조가 연재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욱신욱신 아팠다. 묶여 있던 채로 품에 안긴 연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지…….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연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하지만 현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재의 손목을 끌어와 어루만졌다. 벗겨진 피부를 처음 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떼어 내고, 손목을 풀었을 때 눈으로 확인한 핏자국까지.

무엇보다 예민한 청신경으로 두려움에 떨었을 연재를 생각하자 가슴 밑바닥부터 분노가 치밀었다. 현조가 연재를 품에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조금 더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억눌린 음성은 미안함을 짓이기듯 뱉어냈다.

“마지막이다……. 정말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현조 씨가 그곳에 있었잖아요.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 감사한 순간은 없었어요. 고마워요.”

이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눈물이 날 만큼 다행이었다. 현조가 커다란 손으로 연재의 머리를 쓰다듬고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서연재가 용감했던 겁니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이 바르작거리는 것마저도 몹시 사랑스러워서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요.”

연재의 말에 현조가 품에서 연재를 꺼내듯이 놓아 주었다. 그리고 연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눈을 응시했다.

“연재 씨.”

“네.”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현조의 눈동자가 한없이 깊어졌다.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도록, 함께 있을 겁니다.”

연재가 잠든 사이에 현조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의 끝은 하나였다. 연재를 위해서라면 욕심낼 것이다. 연재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질 것이며, 지키기 위해서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로 이 비밀결혼을 끝낼 생각이다.

“언제나 곁에 있게 허락해 줄 겁니까? 가짜가 아닌, 진짜로.”

하지만 연재가 이젠 두렵다며 도망치면 어쩌나 고민했다. 초조한 물음에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눈을 곱게 접으며 사랑스럽게 웃는다. 연재가 보여 준 확신에 현조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반쯤 접힌 눈에 고인 눈물을 반짝이며 연재가 말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인지 현조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현조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사랑합니다.”

평생, 영원히.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이 마음 전부, 당신이 책임져 주길 바랍니다.”

한없이 정중한 그의 고백에 연재는 가슴이 벅찼다.

“사랑해요.”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서툴렀고, 어색했고, 한없이 어렵기만 했었다.

그럼에도 당신을 보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설레었다. 어느 날 문득, 종일 생각한 사람이 당신뿐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야 비로소 확신했다.

그날, 이 남자를 그토록 오래 바라봤던 이유는 한눈에 반해서였다는 것을.

사랑이라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내 아내가 되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환하게 웃는다.

모든 순간, 두근거림과 반짝이는 모든 것들 속에는 언제나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숨어 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훗날,

그리고 또 훗날에.

여전히 내 곁에는 네가,

네 곁에는 내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추억을 되새길 수 있기를.

여전히 너와 내가 서로의 곁이 되고, 의지가 되기를.

영원한 사랑이기를.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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