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68)

사라지지 않는 것들

“결근이라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은 선화가 곁에 서 있는 정욱에게 물었다.

과거를 잠시 돌아봐도 연재가 결근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렇습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니?”

“감기몸살이라고 연락받았습니다.”

정욱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선화는 고개를 갸웃하다 말았다.

“류 전무는 출근했고?”

“네, 출근했습니다.”

“잠깐 불러 주렴.”

지금쯤이면 현조가 제정신일 리 없다. 그런 사진을 어젯밤 봤으니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밤 회사 법무팀 민 변호사에게 연락했다는 말을 아침에 전해 들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정욱의 대꾸에 선화가 고개를 돌려 정욱을 쳐다봤다. 지시가 떨어지면 되묻는 일은 없었다.

예외적으로 묻는 정욱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유가 필요하니?”

“아닙니다. 곧 전달하겠습니다.”

평소라면 현조와 부딪힐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던 선화였다. 하지만 어젯밤 대화가 선화의 심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정욱은 더욱 불쾌했다.

선화는 다음 이사회를 기점으로 회장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조가 차기 사장 자리에 앉는 것 역시 당연한 순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선화는 현조의 능력만큼은 오래전에 인정했다. 그러므로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현조를 멀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제 현조가 집에 다녀간 건 알고 있니?”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너도 알게 될 일이니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지. 내가 오해를 했더구나. 현조에 대해서.”

그 오해를 만든 사람이 정욱이란 사실이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정욱이 그랬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현조가 사장님께 어떤 말을 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화가 휠체어를 움직여 몸을 틀었다. 정욱의 얼굴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자조했다.

“그저 지난 과거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요?”

“내가 오해했던 것 같더구나.”

서진이 죽음을 택한 것은 현조가 미워서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선화의 얼굴이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이제야 응어리가 풀어진 듯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정욱은 불안했다. 이러다 결국 선화도 현조에게 홀릴 테니까.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네가 그렇게 물으면, 내가 널 의심해야 하잖니.”

정욱은 순간 움찔했다. 성급한 마음에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태연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처럼 자신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을 말하더라도 태연함은 필수였다.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뱉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선화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다 된 밤에 재를 뿌리듯 성급함이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실수를 만들었다.

“현조는 부를 필요 없겠구나. 나가서 일 보렴.”

표정이 굳은 선화가 덧붙였다. 정욱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고, 그것을 보는 선화는 묘하게 피곤해졌다.

“알겠습니다.”

정욱이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사장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고 연재가 없는 빈자리를 쳐다봤다.

선화의 마음이 현조에게 기울었다.

이제 남은 카드를 찢어버리든, 이용하든 결정할 시간이었다.

***

연재가 사라진 지 19시간째였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납치와 감금’이었다. 한 장의 사진이 메시지로 왔고, 사진 속 연재는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

모르는 번호, 낯선 장소.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았던 현조는 밤새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연준을 찾아가 묻기도 했고, 연준을 통해 진희에게 연락까지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전부 똑같았다.

‘저도 약속이 있어요. 간단하게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그게 연재와 나눈 마지막 통화였다. 마지막 통화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연재의 휴대전화는 꺼진 상태였다.

불안에 떨다 회사 고문 변호사인 민 변호사를 통해 강 형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연재가 사라진 밤을 지나 아침이 밝았고, 점심을 지나 다시 저녁이 되었다.

“어떻게 됐어?”

현조는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초췌한 눈동자는 혼란으로 가득했고, 눈 밑은 피곤이 내려앉아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직, 강 형사가 알아보는 중인데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없어.”

선화를 만나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 사실을 당장 연재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다. 선화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이젠 도망치지 않아도, 헤어지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랬는데…….

“어제 사장님과 대화는 잘했고?”

“그걸 네가 어떻게.”

“넌 참 운이 좋아. 너는 참 쉽잖아.”

비릿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는 정욱은 한껏 뒤틀려 있었다.

현조는 복잡한 머릿속을 파고드는 정욱의 날 선 말들을 애써 무시했다.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나 역시 쉬운 길은 아니었어.”

선화를 만났다는 말에 날을 세우는 정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현조에게는 정욱을 배려할 만큼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 이성을 붙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내 마음을 안다고? 네가?”

“그래, 하지만 지금은 널 배려할 여유가 없다.”

현조의 말에 정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경고했잖아. 서연재를 사랑하게 되면, 네 약점은 서연재가 되는 거라고.”

전화는 꺼져 있어서 위치 추적도 불가능했다. 뒤에 찍힌 배경을 토대로 강 형사가 추적 중이었다.

“대체 왜! 차라리 날.”

“행복하면 안 되니까.”

“뭐?”

현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네가 먼저 놓아줬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야.”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연재를 계속 곁에 두는 것이 자신의 욕심이 맞을지도 모르니까.

“이젠 너도 괴로움이 뭔지 알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

정욱의 한마디에 현조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렸다.

충분히 괴롭다고 생각했던 지난 삶이 정욱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었나 보다.

정욱의 말을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릴 수 없었다. 서진에게 빌었던 것처럼, 선화에게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 정욱의 상처도 제대로 마주해야 했다.

“정욱아.”

현조가 창문을 향해 돌아섰고, 정욱은 그런 현조의 등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날 너도 이렇게 괴로웠겠지.”

던지는 말의 무게에 짓눌려 현조는 목구멍이 꽉 잠겼다.

“그래.”

유리창에 정욱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현조는 다시 입안을 짓씹었다.

“변명 같겠지만, 나는 그날 널 믿고 서진이 마음을 거절했어. 네게 보내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선화가 그날을 함구했듯이 현조 역시 그날을 묻어왔다. 그것이 그날의 고통을 견디는 각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묻어 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창에 비친 정욱의 웃는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차갑게 비틀린 표정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날 믿었다고?”

“그래.”

“그렇게 네 잘못은 없다고 내게 떠넘기고 싶은 건 아니고?”

날카로운 말에 심장이 베였다. 현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후회해.”

더는 유리창에 비친 정욱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네 말대로 거절하고, 네게 보낸 것을.”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밀어냈더라면 적어도 정욱이 감당할 몫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 선화도, 정욱도 지옥에 빠진 채 살지 않았을까.

“왜? 지금 생각해 보니 서진을 놓친 것이 후회돼?”

눈을 떴다. 이죽거리는 정욱의 얼굴이 유리창에 고스란히 비쳤다. 다시 눈을 감으려다 말고 유리창을 쏘아봤다. 투명한 유리창에 두 시선이 부딪쳤다.

“그땐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이렇게 아픈 것인 줄 몰랐으니까. 서진이 마음을 제대로 마주해 줬더라면 서진이는 지금쯤 건강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

“내가 아니라 너를.”

유리창으로 독기를 품은 시선을 보내던 정욱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기어이 두 눈을 손으로 가린 정욱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정욱아.”

정욱의 흔들리는 어깨를 바라보던 현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그 지옥에서 나오길 바라.”

정욱의 어깨가 마구잡이로 흔들리더니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조는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몸을 돌렸다.

“사장님이 받아 줬으니 나까지 다 잊으면, 좋겠어? 누구더러 편해지라는 건데, 편해지고 싶은 건 너잖아.”

기괴하게 웃는 얼굴로 정욱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이 날 사랑했을 거라고? 웃기는 소리지. 너는 모를 거야.”

정욱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턱 끝까지 숨이 찬 사람처럼 히익- 숨을 들이켜고서야 정색하듯 웃음을 멈췄다.

“그 류서진이 얼마나 지겹도록 네 이름을 내 앞에서 불렀는지.”

“…….”

“나는 지금도 같은 소리로 지저귀는 새를 제일 싫어해. 웬 줄 알아? 류서진 같거든. 매일 같이 내 귀에 네 이름을 쏟아 내던 류서진 말이야.”

정욱의 광기 어린 눈동자에 더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텅 빈 채 번득이는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다.

“너는 다 내려놓을 것처럼 굴었지만, 결국 사장님을 찾아갔지. 처음부터 넌 둘 다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거야. 안 그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건만 정욱은 오히려 더욱 날뛰었다.

현조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정욱은 마치 심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결론을 내려놓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서연재 빨리 찾아야 하지 않겠어? 내가 그 납치범이라면 네게 가장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이 뭔지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무슨 뜻이야.”

“혹시 알아? 네가 너무 미워서 그 여자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을지?”

정욱이 돌아서 나가자 현조는 비틀거리다 책상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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