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68)

달랐던 마음

부친이 처음 현조를 양자로 올려 달라고 했을 때 부친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 말고는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자식을 키우는 처지로 현조의 상황은 분명 동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재산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실상 키우는 것은 부친이 하겠다는 것을 막을 명분도 없었다. 부친을 존경했으니까. 부친의 이타심 역시 존경했으므로.

“나는 내 딸에게도 그리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속엣말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부친마저 자리에 눕고 나니 곁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제 현조와 정욱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정욱은 서진이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고, 현조는 부친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다.

고작 행복하지 말라는 말로 현조를 고통스럽게 할지언정, 인연을 끊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김 회장 역시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무른 자신을 알고서 이런 유언을 남긴 것일 테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니? 이제 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친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대화를 끝으로 현조를 내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두렵습니다.”

그래 이 대화를 끝으로 관계는 분명해질 것이다.

“무엇이 두렵다는 거지?”

“10년을 고통받으며 살았을 어머니가 더 고통스러워지실까 봐 두렵습니다.”

“말해 보렴. 내가 왜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는지.”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한 현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럴수록 선화는 더욱 냉담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제가 서진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서진이가 저를 대하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달랐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진실이 선화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현조가 이 대화의 시작에서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족이고 싶었다는 말을 왜 했는지.

“내 딸이 널 대하는 마음이 틀렸다는 거니?”

화를 내야 하는데,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기엔 현조가 했던 ‘가족’이란 말이 자꾸 거슬렸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혼란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정욱이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정욱이 했던 말이 거짓이란 걸까? 장례식이 끝나고 유서를 본 정욱이 눈물로 호소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조는 늘, 저와 서진이를 질투했어요. 현조의 감정을 서진이는 괴로워했을 겁니다. 집착하는 현조를 피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어요. 현조에게 상처 줄 수 없으니 괴롭다고.’

그렇게 괴로워하다 현조의 마음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정욱의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어긋났던 핀트가 현조의 말에 의해 제자릴 찾은 것 같았다.

지난날 현조를 바라보던 서진의 시선 때문이었다. 조금씩 애틋함이 묻어나던 서진의 시선과 달리 현조는 지나치게 담백했다. 현조의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기도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뜻은, 그러니까 서진이가 네게 고백했다는 말이니?”

“그날이었습니다.”

선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스커트를 더욱 세게 비틀어 쥐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네가 받아 주지 않아서 서진이가…….”

“서진이는 제 가족입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럼 내 딸이 사랑했던 사람이 정욱이 아닌, 너였다는 거니?”

현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욱인 지금도 서진이를 사랑합니다.”

허, 하는 탁한 숨이 저절로 터졌다. 선화는 입술을 짓씹었다.

딸이 사랑한 사람은 정욱이 아니라, 현조였고. 그런 딸을 사랑한 사람이 정욱이란 소리였다.

“바보 같은 녀석. 그런다고 그렇게…….”

모질게 목숨을 끊어. 어미 심장이 찢어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모서리가 세 개인 삼각형 사랑은 끝내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고 끝난 것이었다.

“제가 모질게 거절했습니다. 그날 제가……. 서진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감당하기 벅찬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주체할 수 없어진 선화였다.

“혼자 있고 싶구나.”

현조가 소파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그러다 곧 선화의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진이 지켜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당황한 선화는 미간을 찌푸리다 기어이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현조를 보자 그동안 자신이 피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딸을 잃은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미워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해하고 또 오해한 채로 쌓아 두고 싶었다.

괴로워하는 현조를 보면서 더욱 원망했다. 너 때문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내 딸을 위해 더 괴로워하길 바랐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가해자는 현조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이기지 못할 마음을 품고 간 가엽은 서진이 더욱 안타까울 뿐.

“현조야.”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보다 부드러웠다. 이제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였다.

“네게 모질게 대했던 시간이 내 오해였더라도, 내게 시간을 조금 더 주렴.”

김 회장이 의식을 잃기 전 했던 마지막 말도, 유언으로 남긴 이 대화의 의미도 선화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선화는 현조와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마음이 조금 편했다.

“저는 어머니 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눈시울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서둘러 휠체어를 돌려세운 선화가 손을 까닥이자 안쪽에서 대기 중이던 도우미가 다가와 휠체어를 밀었다. 감정적인 소모가 너무 컸다.

“조심히 가렴.”

나직하게 들린 목소리에 현조는 순간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차가운 얼음이 미온에 조금씩 녹아 가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가슴이 저미도록 감사했다.

***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의식할 때쯤 정욱이 계단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기다렸죠?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잔 할래요?”

정욱이 차분하게 소파에 앉으며 묻는 말에 연재가 잠시 멈칫했다.

“다시 나갈 줄 알았는데.”

연재는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다시 나가서 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먹는 일련의 과정을 다시 거치는 것보다 지금 차 한잔으로 때우는 편이 간편할 것 같았다.

“네, 그리고 하실 말씀도 여기서 해 주시면 좋겠어요.”

간단하게 덧붙이자 정욱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부엌이 보이는 방향으로 돌아선 정욱이 다시금 물어 왔다.

“커피 괜찮죠?”

“네. 감사합니다.”

곧 원두 향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정욱이 들고 온 커피를 연재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초승달로 접히는 정욱의 눈을 보자 한층 더 마음이 누그러졌다. 연재는 궁금했던 것부터 묻기로 했다.

“현조 씨에 대한 것부터 이야기 해 주시면 좋겠어요. 사장님께서 현조 씨를 어떻게 하신다는 건지.”

“연재 씨는 현조 걱정뿐이군요.”

“그야 현조 씨가 저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사장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걱정되니까요.”

“걱정해야 할 사람은 현조가 아닐 텐데요.”

정욱이 흘리듯이 하는 말에 연재는 마시려고 집어 든 커피를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고 물었다. 그러자 정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연재의 동작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평소라면 대충 지나칠 말이 곤두선 신경 탓에 흘려듣기 힘들었다.

“긴장 풀어요. 걱정하지 말고, 일단 차부터 들어요.”

듣고 보니 어깨가 다 뻐근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몸이 급격하게 피로를 호소했다.

내려놨던 커피를 다시 집은 연재는 홀짝이며 커피를 마셨다.

“맛은 어때요?”

커피 맛이 거기서 거기지, 그걸 꼭 말로 풀어서 표현해야 하나?

평소 즐겨 마시는 믹스와 다르게 깔끔한 뒷맛을 자랑하는 원두라는 것을 제외하면, 커피 맛이야.

“쓴데요?”

“인생은 원래 쓴맛이라잖아요.”

지금이 농담할 타이밍이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달라는 뜻으로 연재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정욱을 노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현조 씨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말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이곳에 왜 오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니, 내가 궁금한 건 류현조가 어떻게 되느냐라고. 답답하게 계속 말 돌리지 말고 이야기를 하란 말이다.

속에서 확 치고 올라오는데, 앞에 앉아 있는 정욱의 얼굴이 뭉개지고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갑자기 눈이 핑 도는 느낌에 연재는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네…….”

혀가 굳은 것처럼 대답이 늘어졌다. 세배쯤 느린 화면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깜빡여 봐도 마찬가지였다. 느릿한 속도로 눈이 감기고 그마저도 자꾸 눕고 싶었다.

“아니면, 현조가 지금 어디 있는지부터 알려 줄까요?”

“어디 있는…….”

“……있어요.”

안 들려요. 조금만 천천히 이야기해 주세요.

분명 말을 한 것 같은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이럴까. 무겁게 몸이 잠기는 것 같다. 늪에 빠지는 것도 같았다.

“자요.”

툭.

소파 위로 연재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제 네 차례야. 류현조.”

잠든 연재를 내려다보며 정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선화가 현조를 이 집으로 불러들였다는 말에 상황을 훔쳐보고, 결과에 따라 연재를 어떻게 할지 정할 셈이었다.

유언이 문제였다.

그것은 10년 동안 단절되어 있던 두 사람을 기어코 만나도록 만들었다.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싶었습니다.’

결국, 떠나지 않겠다는 뜻인 거다. 다 내려놓고 서연재 하나만 갖겠다던 류현조는 사실 전부 가질 속셈인 거다.

현조가 물러나면 주인 없는 이원푸드가 제 것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이제 마지막 딜을 할 생각이다.

서연재를 미끼로.

“너는 과연 서연재를 택할까?”

서재로 들어간 정욱이 책상 서랍을 열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켜고, 카메라를 켰다. 거실로 다시 나온 정욱이 소파에 누워 있는 연재를 찍었다.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번호를 입력하고 사진을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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