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68)

따뜻하고, 다정한 가족

세상이 어디 그렇게 납치범에게 호락호락한가? 범죄자가 되는 순간 인생 하향길 들어서는 건데, 탄탄대로 벗어나 가시밭길 가는 멍청함을 선보이겠어?

“연재 씨는 사람이 참 빈틈없네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장난치듯 이야기하는 정욱을 보자 순식간에 경계심이 무너졌다. 저렇게 인상 좋은 사람을 상대로 막장드라마를 찍고 있었다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제가 좀 그렇죠?”

“나 그렇게 인생 막 살진 않아요. 그럴 이유도 없고.”

“저녁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농담으로 무마하자 정욱이 다시 웃었다.

“비싼 거로 먹을 거예요. 각오하세요.”

웃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농담 하나에 분위기는 반전됐고, 의심은 사라졌다.

김 회장이 쓰러진 후 사장실 분위기가 무거운 탓에 괜한 정욱도 심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정욱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현조 오늘 약속 있다던데 누구 만나는지 알고 있어요?”

운전석에 앉은 정욱이 던지듯이 이야기했다. 연재도 약속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현조에게 정욱을 만나 늦을 거란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볼일이 끝나면 비슷한 시간이 될 것 같았으니까.

“그것까지는.”

“아, 이젠 전담 비서가 아니라 일정 확인은 어려운가.”

시간은 이제 저녁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정욱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안해요. 잠깐 실례할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욱이 전화를 받았고, 알았다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통화를 마쳤다.

“연재 씨, 어떡하죠? 급한 일이 생겼는데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가 저녁 식사하러 가도 괜찮을까요?”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정욱을 보면서 연재는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이대로 식사 약속은 깨 버릴까? 고민하는 눈치를 챘는지 정욱이 다시 덧붙였다.

“다음은 없어요. 오늘이 아니면 현조에 대한 것은 이대로 입을 다물 생각이니까요.”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차가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빌라 주차장이었다.

“다 왔어요.”

“여기가 어디죠?”

“내려서 설명해 줄게요.”

장소가 낯설어서일까, 정욱의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분명 높낮이 없는 평소의 목소리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낯설어서 그래요? 생각보다 겁이 많네요.”

뭐야, 이거 장소가 바뀌니까 진짜 막장 같잖아? 여기 근데 너무 고급진 거 아냐?

무슨 주차장이 이렇게 호화롭고 빌라 담장이 이렇게 높아?

“여기 막, 실장님 자택이라거나 그런 건가요?”

“이런 집이 얼마나 갈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일축하는 정욱의 얼굴에 실망이 서려 있다. 표정만 봐도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럼 이 집, 소유주가?”

“사장님 댁입니다.”

“아.”

선화가 오늘 일찍 퇴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긴장했던 몸이 그제야 풀어진 연재는 차에서 내렸다. 곧 정욱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연결된 계단은 건물 외부 계단으로 1층이 아닌 빌라 2층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2층 현관 앞에 선 정욱이 문을 열었고, 연재는 주변을 다시 눈으로 살폈다.

주변은 비슷한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고급 빌라가 주를 이루는 상류사회였다.

“들어가요.”

문이 열린 실내는 의외로 밝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은 넓고 쾌적했으며 가구 역시 밝은 톤이라서 꼭 신혼집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너무 따뜻했다. 사장 비서팀에서 일할 때 들은 바로는 선화는 고가의 수입 가구 브랜드만 고집한다고 했었다.

그럼 이 가구가 전부 이태리 장인이 손수 사포질까지 했다는 가구란 말이지?

갑자기 눈 호강을 하게 되자 황송했다.

“사장님은 1층에서 생활하세요.”

정욱이 뭐라 하는지 한 귀로 듣기만 했다. 촌스럽게 가구가 과학적이고 아름답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편의상 내가 2층에서 거주하는 거고.”

“그럼 아까 전화는 사장님께서 부르신 거였나요?”

“맞아요.”

그래서 갑자기 방향을 바꾼 거였구나. 아는 사람의 집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장님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항시 대기하는 의미예요. 연재 씨도 알다시피 사장님을 모신지 오래됐으니까.”

정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네.”

2층 응접실에는 1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다. 정욱은 곧 계단으로 내려가더니 모습을 감췄다.

정욱을 기다리는 동안 응접실을 눈으로 살피던 연재는 감탄했다.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선화가 주문하는 가구는 수입 가구였는데, 워낙 고가의 가구들이라 국내에서 판매하는 매장도 단 한 곳뿐이라고 했다. 2년 전 가구를 교체하기 위해 사장실에 방문한 가구점 매니저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 소파도 엄청나겠지?”

엉덩이가 호강하는 것 같아서 몇 번이나 들썩거렸다.

부드러운 톤의 가구들은 전부, 미혼 남자의 취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여성스러웠다.

“전부 다, 내 취향인데.”

소파 테이블에 놓인 작은 소품까지도 역시나 20대 여성이 선호할 만한 것이었다. 분명, 2층 공간은 정욱이 지내는 곳이라 했다. 설마.

“신혼은 아닐 거고.”

1층에 내려간 정욱이 오면 넌지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 집은 처음이겠지.”

소파에 앉아 있는 현조를 바라보며 선화가 물었다. 대답하려다 말고 현조는 입을 다물었다. 김 회장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대화의 장소로 선화가 부른 곳은 와 본 적 없는 선화의 집이었다.

“예.”

김 회장이 내 준 숙제를 해야 하는 선화의 얼굴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거부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했다. 언제나처럼 선화는 표정은 차갑고, 적당히 무심했다.

“이 집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

현조의 미간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선화가 서울에 정착한 이래 계속 살아왔던 이 빌라 2층은 서진이 자살한 장소이기도 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지, 이 다리 말이다.”

2층 계단을 올라갈 수 없으니 평생 딸이 죽은 장소를 눈으로 볼 일은 없다. 다만, 딸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했다. 선화는 그런 자신의 처지가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집에 들어오면 가슴에서 딸을 끄집어내 그리워하고, 마음껏 아파할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너와 대화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면 아마도 근본적인 것을 풀어 가길 바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침착하게 말하는 선화의 목소리 역시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서진의 기일 다음 날 제게 용서를 빌고자 찾아왔던 현조를 내쳤는데, 부친의 유언 때문에 현조와 마주 앉았다. 유언으로 내걸 만큼 부친은 현조를 아낀다는 뜻이다.

해서 현조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냉기 가득한 눈동자로 입꼬리만 끌어 올린 미소를 내비치는 모습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일어서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차원 너머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미소.

“내가 널 이곳에 부른 것은 네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란다.”

“말씀하세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화에서 침묵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컸다.

“너,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했니?”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한꺼번에 자식과 남편을 잃은 선화는 충격으로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경고하마. 그 일에 대해 내게 한 마디도 꺼내지 마렴.’

누구도 꺼낼 수 없도록 해서 가해자는 평생 용서받지 못한 채 죄의식에 살길 바랐고, 자신 역시 자식을 지키지 못한 무력한 어미로 자책하며 살아왔다.

영원히 행복하지 말라던 한마디로 차갑게 현조의 입을 막았었다.

헌데 지금, 그날의 진실을 꺼낸 것이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추궁을 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화는 끝내 사죄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 너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10년을 살아왔다.

“대답하렴.”

현조는 먹먹해졌다. 제가 처음으로 용기 내서 꺼내려 했던 말들을 이제야 할 수 있게 되었다. 먹먹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기억을 하나씩 되새김질한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일 테니까.

눈을 감았다가 뜨자 아스라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10년 전의 기억을 꺼냈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서진을 처음 만났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서진이는 따뜻하고, 다정한 가족.”

“…….”

“가족입니다.”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 염원을 담아 말갛게 웃던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꺼낸 말이었다.

“계속, 가족이고 싶었습니다.”

선화가 스커트 자락을 움켜쥐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자 현조는 숨이 막혔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제 와 선화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까? 진실을 알았을 때, 선화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서진이 이룰 수 없는 관계에서 괴로워하다 자살을 택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처럼 진실은 모르는 편이 선화가 덜 괴로운 길은 아닐까?

이제야 말할 기회를 얻었는데, 들어주겠다는 선화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를 가질 수 없어서 포기한다는 말,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했을까. 내 딸이 왜 너 때문에.”

유서에 적혀 있는 한마디를 내뱉는 선화의 일그러진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현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입안의 살갗을 짓씹었다.

“내 딸은 분명 네게 친절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한옥으로 현조를 만나고 돌아온 날을 선화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어느 날보다 들떠있던 서진은 현조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놨었다.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택할 정도였다.

유치원부터 같이 다닌 정욱도 서진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서진을 따라 입학했을 정도였다.

“혹시 내가 네게 차갑게 대해서 그런 거였니? 널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호적에 올렸을 거라고 서운했던 거였니?”

차근차근 물었지만, 점차 격앙되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하나씩 되새길수록 고통스러운 까닭이었다.

캐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딸은 죽었고, 진실을 안다 해도 현조를 더 밀어낼 여력도 없고, 오해였다 따뜻하게 품어 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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