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엔 처음부터 예뻤는데
약속 장소는 언제나처럼 진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늘 앉던 자리에서 연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 멀리서 봐도 환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의자를 꺼내 앉으며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놨다.
“진희랑은 또 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각오로 본론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단박에 연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듣지 않아도 감이 왔다. 서연준이 거부당했다는 것이.
“싫다잖아.”
“다짜고짜 뭐가 싫어?”
“결혼.”
“뭐?”
이 익숙한 전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연재는 제 앞에 놓인 물부터 한잔 들이켰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술부터 시키자.”
“이미 시켰어. 온다, 저기.”
튀긴 닭 한 마리와 신성한 생맥주를 들고 오는 서버를 발견한 순간 눈이 부셨다. 이 험난한 세상 술이 없으면 어떻게 헤치고 살아가리.
“일단 마시고 말해. 난 지금 알코올 수치가 낮아서 두뇌 회전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연재가 잔을 들어 연준을 재촉했다. 잔이 부딪치자마자 쭉 들이켠 후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잔을 내려놨다.
“결혼이라니. 벌써?”
쓱,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신중하게 물었다. 이진희 성격에 잘도 오케이 했을 리가 없을 테니 서연준이 속 타는 건 당연할 것이다.
“결혼하고 싶은데 진희가.”
“안 하겠다고 했겠지.”
“맞아.”
“동생아 결혼은 말이야.”
“아무 말 하지 마. 누나는 이미 내게서 결혼에 대한 환상을 깬 장본인이니까.”
죄인은 입을 다물겠다.
“사랑하잖아. 결혼에 사랑 말고 다른 게 더 필요해?”
“그거야 결혼은 현실이니까.”
연재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현실이니까 더욱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지. 재산, 능력, 외모. 이런 건 전부 변하는 거잖아. 있다가도 없어질 수도 있는 거고.”
사랑도 있다가 없어질 수 있는 거야. 순진한 녀석. 순정만큼은 인정하겠다.
“내가 직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진희 하나쯤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 있어. 나.”
연재가 조용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속이 타는지 연준이 그것을 다시 들이켰다. 잠자코 연준이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 고민하지 않고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을 테니까.
“알지. 하지만 결혼은 능력도 사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아.”
“그게 뭔데?”
“배려.”
“그건, 당연하지만…….”
현조를 만나고 결혼이란 과정을 지나오면서 연재는 결혼에 대한 확실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서로 함께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현조였다. 돌아보면 현조는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했다. 장난치는 것처럼 서슴없이 대하는 듯해도 그 안엔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이 역력했다.
“매형 좋은 사람이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누나가 배려를 배웠다면 매형이 가르쳐준 거겠지.”
맞는 말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내가 이진희를 배려하지 못한 걸까?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한 건데. 너무 좋으니까 결혼하고 싶은 거고.”
“마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느껴야 하는 거잖아. 속도가 다르면 어느 한쪽이 벅차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누나는 그게 돼?”
연준이 목이 타는지 술을 들이켠 후 눈에 힘을 주며 진지하게 물었다.
“난 막 마음이 급해, 진희 누나가 나 어리다고 못 미더워할까 봐. 이것저것 다 보여 주고 싶거든.”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준이 느끼는 불안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어리지 않은 걸 결혼으로 증명하려 한 거야?”
“그게, 그랬던 것 같아.”
“그걸 진희도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그랬겠지. 젠장.”
어리다는 말, 생각이 부족하다는 말,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연준이 진희를 사랑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애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네. 애들은 보여 주면 설득하기 수월하던데.”
“응, 진희에게도 보여 줘. 진희가 저절로 느낄 수 있도록.”
연준이 그제야 웃었다.
“이진희도 누나 너처럼 만들어 줄 거야.”
“건배.”
잔을 내밀었다. 부딪치는 잔과 시선 너머에 한 남자 진심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연재가 엄지를 척 세우고 잔을 비웠다.
“진희가 그렇게 좋아?”
“친구면서 알 거 아냐?”
“알지, 내가 보는 거랑 네가 느끼는 게 같은지 궁금해서.”
“몰라. 그냥 누나 너 같아서 좋은 것 같기도 해.”
“칭찬이지?”
“칭찬 같아?”
주먹을 말아쥐고 때리는 시늉을 했지만, 동생에게 듣는 최고의 칭찬에 감동한 것도 사실이다.
“누나는 매형 어디가 좋았는데?”
“음…….”
여기서 말문이 막힐 줄이야.
“뭐라도 떠오를 때까지 일단 마셔.”
연준이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연재는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 사람이 늘 웃게 만들어 줬거든.”
이렇게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매형 생긴 거 빼고 다 별로라는 말은 취소한다.”
연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처음 두 남자가 만났던 날 해프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조 씨가 술값은 다 냈지?”
“그래서 오늘도 벗겨 먹을 생각이야.”
현조에게 몰래 연락을 넣어 둔 연준이었다.
“누굴 벗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진희가 서 있다. 연재가 반갑게 양팔을 벌렸다.
“어서 와. 내 사랑.”
“네 사랑은 저분 아니야?”
“매형!”
진희가 가리킨 곳엔 빛나는 현조가 웃고 있었다. 그 미소하나에 심장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연재는 수줍어졌다.
“어떻게 같이 왔어?”
“입구에서 만났어.”
“이진희는 여기에 앉죠.”
연준이 진희의 손을 가볍게 끌어와 제 옆에 앉게 했다.
“방해될 테니까 우린 집에 가죠.”
현조의 목소리에 다정함이 가득했다.
“매형!”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현조가 연준을 쳐다봤다.
“고마워요.”
“싱겁긴.”
고마운 이유는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연준의 눈빛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연재와 연준을 보면서 느낀 가족애라는 감정이 얼마나 깊고 두터운지 깨달았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연재를 보면 언제나 가득 차 있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우리 누나 요즘 예뻐진 거 매형 덕분인 거 같아서요.”
“그건 저도 인정해요.”
연준의 곁에 앉아 있던 진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내 눈엔 처음부터 예뻤는데.”
“누나 피부 관리 어디서 받아? 우리 진희도 보내자.”
“처음부터 예뻤다니까?”
“손발 오그라드는 거 안 보이세요?”
오그라들었다며 꽉 쥔 주먹을 내보이는 연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가 웃었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씨, 연재 씨!”
“네, 네?”
“실장님 호출이요. 인터폰.”
인터폰이 울리는 줄도 몰랐다. 지난밤, 뜨겁다 못해 하얗게 불태운 것을 떠올리느라 연재는 정신이 혼미했다. 재빨리 인터폰을 들었다.
“네, 실장님.”
- 잠깐 들어올래요?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데도 멍했다. 연재는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실장실로 향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오늘 저녁 시간 어때요?”
김 회장이 쓰러지면서 무산된 저녁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걸로 끝난 것일 줄 알았는데 새삼 다시 꺼내는 말이 부담스럽다.
“다음에 하시면 안 될까요?”
“다음? 언제를 말하는 거죠?”
“지금은 회장님께서 병원에 입원 중이시고.”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현조에 대해서도 해 줄 말이 있고.”
현조에 대한 말을 하겠다는 정욱을 보자 생각이 많아졌다.
“현조 씨에 대한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현조가 정말 떠날 거라고 믿어요? 다 버리고 연재 씨 손만 잡고?”
현조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욱은 매우 다른 이야기를 했고, 정욱의 말처럼 현조가 떠날 수 없다면 선화와 정욱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사장님이 정말 현조를 곱게 보내줄 거라고 믿어요? 연재 씨 순진한 건가?”
그럼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길 하시든가요. 왜 사람을 자꾸 꼬여내는 것처럼 말하는 건데?
욱하는 심정을 꾹 누르며 연재는 참을 인을 심중 깊이 새겼다.
“생각 있으면 오늘 저녁 7시 시간 비워 둬요.”
정욱은 현조의 오래된 친구다. 복잡하게 얽힌 과거가 있다지만 현조의 곁에 오래 머문 사람이다.
현조를 대하는 정욱의 진심이 궁금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현조의 곁에 머물렀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질감이 맞는 것일까?
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아야겠다.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정욱과 약속한 저녁 식사를 위해 나란히 주차장에 내려왔다.
이상할 것 없는 하나 없는 날이지만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내내 따라붙는 그런 날이었다.
“타요.”
조수석을 열고 친절하게 웃고 있는 정욱을 잠시 바라봤다. 석연치 않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서일까, 정욱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연재는 직감이 잘 맞는 편이었고, 직감은 대부분 좋지 않은 일일 때 발휘됐다. 꼭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왜 그렇게 보죠?”
“장소가 어딘지 이야길 안 해 주셔서요.”
안경 너머로 정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타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었다.
“현조가 많은 이야길 해 준 모양이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연재 씨 눈빛이 날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정욱은 느긋하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연재는 속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권정욱. 저 남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불분명했다. 모든 의문에 얼추 비슷한 답을 찾았지만, 저 의문 만큼은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정욱은 평소와 다른 느낌을 풍기며, 본심을 드러낼 것인지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타지 않는 건 연재 씨 자유예요. 단, 다음은 없을 겁니다. 현조 편에 서는 마지막이 될 테니까요.”
“제가 느낌이 잘 맞는 편이라서요.”
“왜요? 내가 지금 악당 같아요?”
맞아요. 낚싯대 드리우고 대어를 낚으려는 강태공 같거든요. 이거 괜히 따라갔다가 함정에 빠지는 거 아니야? 생각하던 연재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아무래도 아침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