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
심각했다. 금단증상인가.
당장이라도 집무실 문을 열고 현조가 나타날 것 같았다. 하필 총괄사업부와 사장실은 구조도 흡사했다.
다만 사장실이 조금 더 크고 안쪽 구석에 실장실이 별도로 존재하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비서 데스크에서 보이는 사장 집무실 위치는 매우 흡사했다.
“일, 일하자.”
고작 하루도 다 못 채웠는데 벌써 이러면, 중증 아닌가? 아무리 잘생기고 멋지고 사랑스럽기로서니. 아, 얼굴 뜨거워.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과하게 빠졌다.
“연재 씨 무슨 일 있어요?”
대각선 안쪽 데스크에 앉아 있던 주현이 물었다. 자연스럽게 인사이동이 이루어진 탓에 주현은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아, 그냥 다른 생각 하다 보니. 곧 퇴근 시간이기도 하고.”
“그렇네요. 역시 퇴근이 보약이죠?”
“그럼요.”
맞장구를 쳤지만 사실 오늘 퇴근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그때 정욱이 실장실에서 나와 사장 집무실로 걸어갔다.
사장실 문이 닫히자 주현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근데 정말 연재 씨, 실장님이랑 사귀는 거죠?”
며칠 전 회식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믿기 힘든 모양인지 주현이 다시 물었다.
“왜요, 거짓말 같아요?”
“아니 솔직히 연재 씨 한숨 쉴 때마다 꼭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아서요. 내가 연재 씨라면 애인이랑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되게 들뜰 거 같거든요. 아! 혹시?”
뜨끔, 놀란 연재가 토끼 눈으로 주현을 바라봤다.
“싸웠어요? 사랑싸움?”
“그런가? 그, 그런가 봐요.”
“맞구나? 에이, 얼른 화해해요. 딱 봐도 연재 씨가 잘못했을 거 같은데.”
아니 대체 어느 부분이요? 이 사람 정말 사람 뜨문뜨문 보시네. 대체 그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거죠?
“실장님 딱 봐도 자상 매너남인데 연재 씨가 화날 이유는 딱 하날 것 같거든요.”
“그 하나가 뭘까요?”
마구 궁금해지네.
“다른 여자에게 잘해 줬다고 질투했을 거 같은데요? 맞죠? 맞구나?”
그래요. 그런 거로 해요. 이참에 속 좁은 여자 하지 뭐. 어금니를 꽉 물고 연재가 웃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부럽다. 저녁 먹자면서 막 화해하자고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야.”
주현은 소설을 쓰고 있었다.
***
간단한 보고를 마친 정욱이 나가지 않고 있었다.
오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자 선화는 미간을 구겼다.
“계약상 문제가 없다는 건 그만 인정해야지.”
정욱은 아주 잠시 선화를 바라봤다. 그러다 곧 부드럽게 응대했다. 정욱은 오전 내내 오이시 상사에 관한 자료를 검토했다고 했다.
“문제가 없다면 만들어 보겠습니다.”
작정한 듯 이야기하는 정욱을 선화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단가를 조작한 것이 정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확신에 가까운 그 직감에, 실망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회라고 생각하니?”
정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가 반짝였을 뿐.
“회사에 타격을 줘서는 안 돼. 네가 현조를 미워하는 일에 내 회사를 끌어들이면 곤란하단다.”
선화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실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 정욱이 고개를 숙였다.
“인정할 부분은 깨끗하게 인정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선화는 마지막 경고를 남겼고, 정욱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야겠어. 몹시 피곤하구나.”
“모시겠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연재가 다급하게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서 비서.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연재의 등장에 정욱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회장님께서.”
연재가 말을 멈췄지만, 그 말이 결코 좋은 말은 아니란 것을 예상하고도 남았다.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하십니다. 김 실장님께서 방금 연락을……. 상황이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선화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갔다.
“괜찮으십니까?”
선화가 앉은 채 쓰러질 것처럼 몸이 기울자 정욱이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선화가 나직하게 말했다.
***
병원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연재였다. 정욱은 선화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겠다고 했다. 현조는 전주 본점에서 올라온 김 점장과 긴급회의 중이라고 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연재는 긴급 메모를 남겨두고 먼저 온 것이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김 회장이 기운 없는 얼굴로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연재 왔구나.”
곁에 서서 김 회장을 지키고 있던 김 실장이 뒤로 물러나 구석에 섰다.
“할아버지.”
노인의 무거운 웃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연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저 김 회장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며칠 만에 얼굴을 마주한 김 회장은 그사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연재야.”
가느다란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식사를 챙기는 문 여사가 걱정하던 것이 떠올랐다. 이젠 한계에 이른 것인지 도무지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 이렇게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 마디를 뱉고 나면 한 마디를 참아야 할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상황이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괜찮아지시면 그때 이야기해 주세요.”
“아들 같은 녀석이었다. 이상하게도 내 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위가 그렇게나 좋더구나.”
헛헛한 마음을 덜어내려는 듯 김 회장은 천천히 과거를 끄집어냈다. 그만큼 정이 많은 아이였고, 그래서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현조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날부터 눈에 차던 아이였다.
“내 딸이 욕심이 많단다. 남한테 지는 것도 싫어하고, 제 뜻대로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거든. 피는 못 속인다고, 죽은 제 어미를 그대로 빼다 박았지.”
흠을 말하고 있는 김 회장의 얼굴은 애정이 넘쳤다. 일찍 여윈 아내의 빈 자리를 메꿔주기 위해서도 더 많은 사랑을 쏟아부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딸의 마음을 전부 알아주지는 못했다.
“그런 내 딸을 사랑한다는데 없던 아들이 생긴 것 같았지. 그랬는데……. 아까운 사람을 하늘이 힘없이 데려가더구나. 손주 녀석까지 같이.”
불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힘겹게 숨을 삼켰다. 지금도 죽은 사위와 손주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새벽마다 잠에서 깼다.
“그 불쌍한 녀석은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하더구나. 저 때문에 내가 사는 줄은 모르고…….”
누구도 모르게 현조가 우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던 김 회장은 가슴이 아팠다.
죽은 손녀와 사위가 떠올라서도 아팠고, 죄인처럼 일만 하며 살아가는 현조를 볼 때면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이제야 그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으려 하는 현조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연재 덕분에 현조가 변해가고 있었다.
“연재야.”
“네. 할아버지.”
“네가 현조 좀 안아 주련.”
김 회장의 손은 미지근했다. 다 타 버리고 잔열만 남은 잿더미처럼.
그마저도 천천히 식어 가는 것만 같아서 연재는 김 회장의 손을 두 손으로 꽉 감싸 쥐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더 이야기하려던 김 회장은 병실로 들어서는 휠체어를 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
평소와 다른 선화의 목소리가 병실에 작게 울렸다. 함께 병실에 들어왔던 정욱조차 놀라는 눈치였다.
“나가서 기다리렴.”
이내 정욱을 돌아보며 선화가 이야기했다. 연재도 정욱을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선화야.”
김 회장의 부름에 선화가 휠체어를 움직여 침대 곁에 다가갔다.
“이렇게 갑자기, 그동안 대체 어떻게 관리하신 거예요.”
원망이 먼저 나왔다. 마음이 아파 좋은 말이 나가질 않았다. 김 회장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절에서 대체 뭘 하셨기에, 현조 그 녀석 때문인가요?”
손을 뻗어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김 회장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현조를 대하는 선화의 마음은 여전히 차디찼다. 그런 선화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며 사는지 알기에 감히 현조를 용서하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이제 갈 때가 된 게지.”
김 회장이 자조하듯 말했다.
“네가 제일 걱정이구나.”
김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화의 다리를 보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사고가 있던 그 날조차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온전치 못한 딸을 남겨두고 가려니 안타까운 마음이 그득하게 일었다.
“아버지…….”
김 회장의 눈물을 보면서도 차마 아버지 나는 괜찮아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원망했던 것도 사실이고, 미워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남의 자식 때문에 내 자식을 잃었다. 부친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잘 살았을 텐데. 그런 원망이 내내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부친이지만 지금도 현조를 거둔 부친의 뜻은 헤아릴 수 없었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애비는 네 편이니, 속상해하지 말고 남은 시간은 웃으면서 살길 바란다.”
김 회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김 회장은 의식을 잃었다.
***
긴급회의가 끝나고 김 점장을 돌려보낸 현조가 총괄사업부로 복귀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김 비서가 붙잡았다.
“전무님, 1시간 전, 서연재 비서님께서 메모 남기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중요한 일이라고 꼭 연락 부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알았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현조는 집무실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다고 보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창가로 천천히 걸어가 섰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서 비서, 온통 내 생각만 합니까?”
얼마나 기다렸기에 걸자마자 전화를 받나, 생각할수록 보고 싶다.
- 전무님.
울 것 같은 연재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건너왔다. 울먹이는 연재 목소리를 듣자 꼭 마른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만난 것처럼 현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단 한 번도 연재가 이렇게 슬픈 목소리를 냈던 적은 없었다. 그 낯선 울음소리가 심장을 콱 틀어쥐더니 숨을 멎게 했다.
“무슨 일입니까.”
눌러 참는 것 같은 흐느낌이 분명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더니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요.
막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여름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