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안 들어.
선화가 바라는 것이 뭔지 이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 곁에서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아무 감정도 없이 불행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연재를 떼어 내려 할 것이다.
“연재, 건드리지 마세요.”
“건방지구나.”
“연재를 건드리시면 저는 어머니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무너트릴 겁니다.”
이원푸드. 선화에게 남은 유일한 것. 그 가장 깊숙한 곳에 현조가 있었다.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기대해 보마.”
현조가 가장 아끼던 것 역시 이원푸드였다. 평생을 바쳐야 한다면 그럴 것이라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연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물러날 수 없다면 지킬 것이다.
사장실을 빠져나오자 머리가 욱신댔다.
김 회장과 선화는 달랐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상처는 늘었다.
***
총괄사업부로 돌아오자마자 부딪힌 인물은 정욱이었다.
“사장실 비서팀으로 다시 합류하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입니다.”
소파 맞은편에 앉은 정욱이 이야기했다.
사내 메신저에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그것을 접한 정욱과 연재가 먼저 대화 중이었고 뒤늦게 사장실에서 돌아온 현조가 합류한 상황이었다.
“총괄사업부는 새로운 비서로 배정될 겁니다. 연재 씨는 오늘 중으로 자리 정리해서 사장실로 옮겨요.”
오픈 채팅방은 사건 이전부터 톡방 개설자였던 정욱이 없앴다. 하지만 이미 읽은 직원들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30명이 넘는 참여자 중 읽은 사람 숫자가 5명이었다. 이른 새벽에 올라온 메시지라 그나마 노출이 적었다.
그들이 입을 열지 않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사실상 누구인지 파악조차 불가능해서 막을 방법도 묘연했다.
“일단 전무님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세요. 만에 하나라도 소문이 번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연재 씨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 말고도 전무님 역시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이원푸드 기업 이미지도 타격을 입을 거고요.”
정욱의 말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상 가장 최선의 대안이었다.
하필 사장실에 다녀온 직후에 듣는 이야기라 더욱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권 실장,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현조의 말에 정욱의 미간이 구겨졌다. 짐작 가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회식에 참여했던 사람 중, 그날 가장 마지막에 남았던 사람을 생각해 봤더니 금나리 씨더군요.”
“금나리 씨라면.”
“지난번부터 전무님과 연재 씨를 엮었던 사람입니다.”
정욱의 말에 연재는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해 준 사람이 나리라는 사실을 정욱은 모르는 상태였다.
“불러서 주의를 줄 생각입니다. 물론 전무님께서 원하시면 처벌도 가능합니다.”
정욱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재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섣불리 아니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리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구경만 할 수도 없었다.
“금 대리님이 가장 마지막에 남았다는 걸 실장님께서 보신 건가요?”
연재의 말에 정욱은 순간 연재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현조가 말없이 지켜봤다.
“연재 씨는 내가 괜한 의심을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금 대리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처벌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이야기해 볼게요.”
“그렇게 해요.”
현조의 말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연재는 나리가 아닌, 정욱에게서 느껴지는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냐.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제대로 확인한 뒤에 의심해도 늦지 않는다.
“서 비서는 그만 나가서 일 봐요.”
“네, 전무님.”
연재가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현조의 표정이 굳었다.
“사장님도 알고 있는 일이야?”
정욱이 상체를 소파에 기대며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내가 사장실에 가기 전부터 알고 계신 거였나?”
“그게 중요해?”
선화가 지나치게 반응했던 부분들이 이해됐다.
절에 다녀온 사실부터 불륜이라고 퍼진 소문까지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차가웠던 거였다.
“사장님은 그저 알아야 할 부분을 아신 것뿐이야.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절에 다녀왔어.”
마지막 통보를 하듯 현조가 털어놨다.
선화가 아는 사실을 정욱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현조야, 너무 서두르지 마. 네가 서연재 씨를 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사장님의 화살은 연재 씨에게 향할 거야. 그러니 천천히 생각하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정욱의 목소리는 평온하지 않았다.
***
연재는 오전에 짐을 정리해서 사장실로 옮겼다.
타이밍이 제법 좋았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둔 지영의 빈자리를 연재가 채운 것으로 말이 맞춰졌다.
그리고 지금, 선화에게 인사하기 위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더는 시끄러운 일 만들지 말아요.”
마지막 경고처럼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선화의 얼굴에 냉기가 가득했다.
“주의하겠습니다.”
언제 대해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화분에, 물 좀 줄래요?”
“화분이라면……. 알겠습니다.”
창가에 주르륵 놓여 있는 행운목 화분은 오로지 정욱이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비서도 저 화분을 만진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듣고 연재는 당황했다.
“어려우면 권 실장에게 물어봐도 좋아요.”
“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연재는 조심스레 실장실로 향했다. 정욱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노크한 후 실장실로 들어가자 정욱이 보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장님께서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셨는데 얼마나 줘야 할지 여쭤보려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내버려 두고 다른 일 보세요.”
그렇다고 시킨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쪼르르 가서 다시 보고하기도 모호했다.
“내가 지금 가 볼 테니까 나가서 일 봐요.”
“네, 실장님.”
실장실을 빠져나가는 연재를 바라보다 정욱이 일어났다.
물을 줘야 할 날짜도 아니었다. 선화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드러낼 줄은 몰랐다. 정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생략하고 문을 열자 예상했다는 듯 선화가 고개를 들었다.
“네게 시킨 일이 아닌데.”
선화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쓰고 있던 안경도 벗어서 던지듯 책상에 내려놨다.
정욱을 빤히 바라보다 긴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사진, 네가 한 일이었니?”
“제가 한 일입니다.”
“그래야 할 필요 있었니?”
정욱이 선화에게 바짝 다가갔다.
여전히 잊지 못하는 한 여자의 미래가 그곳에 있다.
하지만 이제 제 곁에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모친뿐이었다. 스물네 살에서 멈춰 버린 서진의 삶이 흐르고 흘러갔다면 이 얼굴처럼 나이를 먹어 갔을 것이다.
꼭, 이렇게 아름답게.
“서연재의 일에 나서는 이유가 그 애에게 마음이 있어서니?”
“어떻게 서진이를 잊겠습니까.”
당신을 매일 보는데, 눈앞에 서진의 미래가 있는데.
“저 아이를 다시 네 곁으로 불러온 이유가 그럼 뭘까.”
“현조가 행복하니까 질투가 나서요.”
정욱이 덧붙인 말을 듣고서 선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점점 복잡하게 만드는 정욱에게 피로가 몰려왔다.
“서진이를 그렇게 죽게 만들어 놓고 행복하면 안 되잖아요.”
정욱을 곁에 둔 이유는 하나였다. 서진으로 인해 망가진 시간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서진만을 봐 왔던 정욱이 갑자기 사라진 서진을 원망하다 잘못된 선택을 할까 지켜본 그녀였다..
“정욱아.”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으로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없었기에 곁에 둔 것이었는데, 정욱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려 했다. 제 잘못을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로 덮어 버리려 하고 있었다.
“예.”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마음껏 엇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갈등했다.
“너를 잡아야 하는데. 잡을 수가 없구나.”
과연 자신이 정욱의 감정을 나무랄 자격이 있을까.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
오후부터 정신없이 바빠졌다.
6개월의 공백을 메울 간단한 인수인계가 끝나자 정욱의 호출이 이어졌다.
“실장님. 요청하신 오이시상사 기업 관련 자료입니다.”
“고마워요.”
상냥하게 웃는 얼굴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구나.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리는 분명 아니라고 했다. 그 증거로 자신이 캡처해 놓은 채팅방 대화 목록을 보여 줬다.
대화 당사자만 색이 다른 채팅 목록을 보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정욱은 나리라고 했을까?
정욱을 향한 의심이 불거졌다.
알 수 없는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속이 시커먼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저녁이요?”
“그 사건 무마하려면 아무래도 우리가 좀 더 연인처럼 보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좀.”
싫은데요.
좋은 사람이라고 머리로는 알아도, 정붙이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더구나 속이 새카맣게 그을린 사람이랑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현조에게도 그편이 더 도움 될 텐데요.”
“제가 전무님을 멀리하겠습니다. 실장님께도 민폐고.”
“민폐라. 혹시 내가 싫어요?”
“아뇨, 아닙니다.”
“그럼 같이 저녁 먹어요. 저도 혼자 먹어야 해서. 부담 갖지 말아요.”
이러면 거절하기도 어렵잖아.
어색하게 웃는 입매가 자꾸 경련처럼 떨렸다.
“저녁 7시에 예약해 둘게요. 알았죠?”
“…….”
“같이 나가요. 내 차로 이동하면 되니까.”
같은 차를 타고 가야 사람들이 연인으로 생각할 테니까. 라는 생략된 뒤엣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연재는 씁쓸했다. 정작 같은 차를 타고 싶은 사람과는 탈 수도 없는데.
“나가서 일 봐요.”
“네.”
휩쓸린 건가?
이상하게 정욱은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의를 갖춰 물어 오지만 정작 그 뜻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놓고 공격하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