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8)

예쁘기만 해도 되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절이 보였다. 이른 새벽 밤새 내린 비로 안개가 자욱했다. 차를 세운 현조가 마당을 지나 제를 모시고 있는 불당에 들어섰다.

용기를 냈지만, 선뜻 불당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절을 올리고 있는 김 회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이 녀석아. 왔으면 안으로 들어와.”

그런 현조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 회장이 불렀다. 해마다 제를 지내러 오는 김 회장은 이른 새벽에 가면 그날 저녁쯤엔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요양 삼아 일주일 정도 머물 것이라 했다.

“절하는 법은 알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김 회장이 물었다.

“예.”

“마음에 있는 짐을 내려놓는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해 봐.”

김 회장의 말대로 현조는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앉아라.”

방석에 앉아 불상을 바라봤다. 그저 보는 것으로 가슴 밑바닥에 쌓인 무엇이 복받쳐 올랐다.

“마침내 용기를 낸 것이냐.”

“…….”

“그래, 애썼다.”

울컥, 치고 올라오는 서러움에 목이 멨다.

“그만 내려놓고 가. 서진이 만나거든 내가 다독일 테니, 할애비 믿고 다 내려놔.”

기어코 눈물이 쏟아졌다.

10년을 가슴에 박힌 고통이었다. 선화의 다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정욱의 눈을 때때로 피하며 바로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랑스럽게 웃던 서진을 떠올릴 때마다 가족으로 함께 했던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기도 했다. 그 예쁜 아이를 외롭게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연재에게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더 오랜 시간을 용기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손주며느리를 아주 잘 들였지.”

김 회장이 현조의 손등에 손을 포개어 다독였다. 인자한 얼굴은 웃음으로도 가리지 못하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김 회장의 혈색이 지나치게 나빴다.

“많이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괜찮다.”

“저랑 같이 당장 병원으로 가세요.”

“얼마 남지도 않은 날을 병원에서 끝내고 싶은 마음 없다. 이 얼마나 좋으냐. 맑은 공기에, 산새 소리에, 바람을 타고 서진이가 왔다 가는 꿈도 꾸고, 이보다 좋은 곳이 없어.”

김 회장이 다시금 현조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이렇게 네가 왔으니, 이보다 좋은 날이 어디 있고.”

김 회장의 손등으로 현조의 눈물이 떨어졌다. 처마 끝에서 풍경이 흔들렸다. 바람이 풍경을 흔들고, 현조의 젖은 눈시울을 어루만졌다.

“현조야, 사랑하고 살아라. 할애비가 너를 사랑하듯이 너도 이젠, 너를 사랑하고 살아.”

오래 울었다.

여전히 김 회장의 손은 따뜻했다. 여덟 살 처음 잡았던 때처럼 온기가 가득했다.

***

동이 트고 현조는 집으로 향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김 회장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에 젖었던 산은 청량했고, 숲 냄새는 선명했다.

집에 도착하자 연재가 뛰어와 안겼다.

“할아버지는요?”

아픈 김 회장이 걱정되어 안부부터 물었다.

“이번 주 내내 계실 것 같아. 문 여사님과 김 실장님이 곁에 계시니 믿어야지.”

“걱정도 되고, 보고 싶어서요.”

그 인자한 손을 잡고 산책도 하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담소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김 회장이 없는 텅 빈 안채를 볼 때마다 허전함이 밀려왔다.

“할아버지도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저를요?”

“응.”

현조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그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연재는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렇게 좋습니까?”

“아침 식사 하러 가요.”

연재는 현조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조는 무척 가벼워졌다는 것을. 그런 현조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도.

“출근하면 어머니를 만날 겁니다.”

연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현조의 결심에 힘을 보태듯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별채에 아침 차려 놨어요.”

현조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밥을 짓고, 식탁을 차렸다.

“감회가 새롭군요.”

“겨우 아침 식사로요?”

“할아버지께서 결혼 잘했다고 하셨던 말씀도 이해되고.”

“매일 차려드릴게요.”

“예쁘기만 해도 되는데.”

음식도 잘해, 마음도 고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내를 바라보는 현조의 눈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예쁜 건 어려워도, 요리는 자신 있어요.”

“다른 건 더 잘하던데.”

그러면서 현조가 왼쪽 뺨을 내민다. 자신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던 연재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지금, 여기서요?”

“입술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중에, 나중에요.”

웃는다. 그가. 의심 없이 웃는다. 그를 웃게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아침이다.

운전석을 열려는 순간 현조의 양팔이 차체를 짚었다. 꼼짝없이 그의 품에 갇혔다.

쓱, 다가온 얼굴이 코앞에서 멈췄다. 반칙이다. 매번 이렇게 잘난 얼굴부터 들이밀면 어떻게 거절해?

“요즘은 차 타는 시간이 제일 싫습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입술이 새어 나가는 웃음을 가로막았다. 꼼짝없이 그의 팔에 갇혀 입술을 부볐다. 키스는 짧고 담백했다.

“운전 조심해요.”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짚고 있던 팔을 거두더니 운전석을 손수 열어준다. 안에 태우더니 역시나 꼼꼼하게 벨트까지 채워준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뽀뽀까지 한 현조가 상체를 빼냈다.

“현조 씨도 운전 조심하세요.”

“조금 이따 봐요.”

입안에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달콤했다. 조금씩, 조금 더, 바라게 된다. 이 달콤함을.

***

[오픈 톡방 확인해 봐.]

막 주차를 마치고 내리려는데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나리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픈 채팅방은 이원푸드 비서 누구나 참여 가능한 채팅방이었다.

주로 사내 이슈가 올라오거나 경조사 같은 안내가 올라오곤 했는데 익명으로 참여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화에 제약이 없었다.

앱을 실행하고 채팅창을 열었을 때 연재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세상에.”

지난 회식 때 현조의 자동차를 타고 함께 있는 장면을 누군가 찍어서 올린 사진이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은 간단했다.

<불륜>

화질이 선명하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이면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처럼.

“누가 이런 짓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연재는 멍해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돼 버린 상황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연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

선화를 만나고자 사장실로 향한 현조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했다.

사장실 비서 주현이 집무실을 노크한 후 한 걸음 물러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전무님.”

고개를 까닥인 후 손잡이를 잡아 내리는 동안에도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선화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어깨에 얹힌 긴장을 떨쳐 내려 허리를 곧추세웠다. 마침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선화가 보였다.

“저 왔습니다.”

“그래, 왔으면 앉으렴.”

찬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현조가 소파로 걸어가 앉자 선화 역시 휠체어를 움직였다.

마침내 상석에 자리 잡은 선화를 보며 현조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널 부른 기억이 없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니?”

“조금 오래된 이야깁니다.”

선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선화는 늘 같은 표정이었다. 다만 저 표정을 대하는 현조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온화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한없이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그런 선화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절에 다녀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무표정한 선화의 얼굴에 금이 갔다. 쩍쩍 갈라지고 깨졌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진 것처럼, 위태롭게 갈라진 얼음 조각이 산산이 조각나 깨질 것 같았다.

“네가 벌써 거길 다녀왔다는 말이 내겐 굉장히 무례하게 들리는구나.”

고작 10년 지났을 뿐인데, 벌써 용서받길 바라냐는 말이었다.

선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곳에 아직 계십니다.”

“그래서 회장님을 뵈러 갔다 이 말이니?”

미세하게 끝이 갈라진 목소리에는 냉소가 가득했다.

“서진이를 만나.”

“서연재 때문이니?”

끝맺을 틈을 주지 않고 되묻는 선화의 목소리가 한층 격앙되었다.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내게 그 허락을 구하고자 온 것이냐고 물었다.”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차가운 말, 독기 가득한 시선을 오롯이 받아 내며 현조는 준비한 말을 내놓았다.

수천 번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었다. ‘용서’라는 말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지 현조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 그 말을 뱉었을 뿐인데,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차를 들고 와 내려놓고 나갔다.

그것을 마실까 잠시 고민하던 현조에게 선화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서연재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네가 서연재에게 내민 계약서를 네가 찢었을 때 이 결혼도 깨졌어야 했어.”

“죄송합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선화가 가로막듯 말을 이었다.

“후회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단다. 그런데 너 때문에 나는 오늘 그 말을 나 자신에게 해야겠구나. 현조야.”

어느새 평소처럼 감정을 가라앉힌 선화가 낮은 목소리로 현조를 불렀다.

“네, 어머니.”

“나는 아직도 네 행복을 원하지 않는단다.”

무엇으로 찔러도 저 말보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현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가에 놓인 화분을 보면서도, 같은 가구가 아니면 쓸 수 없게 된 나를 보면서도, 무엇보다 네 이름을 부르는 순간순간에도 나는, 네가 행복하지 못했으면 하고 바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가 없단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절감하며 현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는 이런 내게 잊으라 말할 셈이니?”

“…….”

“너를 용서하라는 말은, 내게 서진이를 잊으란 말인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 리 없잖니.”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현조는 그것들이 제게 달려와 목을 조르고 입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그만 나가렴. 내가 부르지 않거든 날 찾아올 필요 없단다.”

축객령이 내려졌다. 허락 없이 함부로 발을 들인 대가는 혹독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 보렴.”

“모든 책임은 제게 있으니, 어떤 벌이든 저만 받겠습니다.”

“그러고 싶니?”

“부탁드립니다.”

“장담은 못 하겠구나.”

“회장님께서 돌아가시면 물러나겠습니다.”

“내가 그걸 바란다고 생각하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선화가 그것을 원했다면 10년 동안 자신을 내버려 뒀을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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