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68)

과거 2

대학생이 된 후부터 서진의 집착은 더 심해졌다. 틈만 나면 한옥으로 찾아왔고, 무엇을 하든 함께하려 했다.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정욱이랑 가면 안 되겠어?”

막 시작한 아르바이트 시간이 코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권정욱이 너는 아니잖아! 난 류현조가 필요하다고, 권정욱이 아니라!”

일정이 맞지 않으면 화를 내기 시작한 시점도 그즈음부터였다. 화를 내던 서진은 택시를 잡아타더니 집으로 가 버렸다. 그럴 때마다 난처해지는 것은 현조였다.

“미안하다. 난 서진이보다 우선인 건 없어. 네게 강요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서진이 힘들게 하지 말았으면 해.”

“나도 미안한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서진이만 생각할 수는 없어.”

정욱이 서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욱은 서진의 곁을 지키면서도 고백하진 않았다.

“나는 서진이가…….”

“그래, 네가 서진이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친 정욱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근데 서진이가 널 좋아해.”

“그거야 당연히…….”

가족이니까. 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정욱의 표정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피가 섞이진 않았잖아.”

뒤통수를 거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류서진이 그런 의미로 바라보고 함께했던 거였나.

“나도 미치겠어. 그런데 서진이가 너만 봐. 항상 곁에 있는 건 난데, 류서진이 보는 건 너라고!”

“권정욱.”

“도와줘. 현조야.”

스물넷, 참고 참았던 정욱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너 군대 가는 거 알고부터 더 심해졌어.”

며칠 후면 입대였고, 그것을 알고 있는 서진이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서진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더라도 거절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부탁한다. 현조야.”

“그거야 난 서진이에게 그런 마음 추호도 없어.”

“알아, 너한테는 도하랑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할 만큼 서진이는 그저 가족 그 이상이 아니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서진이는 아니래. 술만 마시면 나를 보면서 네 이름을 부를 정도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정욱의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몰랐던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서진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현조야, 너 군대 가기 전에 너랑 같이 여행 가고 싶어. 응? 안 될까?”

몰랐을 땐 가족여행이라 들렸을 그 말이 지금은 금단의 선을 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싫다는 말을 내뱉자 서진은 울었고, 정욱은 고맙다며 서진을 달랬다.

이틀 후면 입대다. 그 사실이 차라리 반가웠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 밤 정욱이 다시 찾아왔다.

“서진이가 내일 너 배웅하면서 고백할 계획이래. 현조야, 거절해 줄 거지? 물론 네가 거절할 거란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탁한다. 내가 너 없는 동안 서진이 달랠게. 달래서 서진이 마음 내게로 돌려놓을게.”

울 것 같은 얼굴로 절박하게 부탁하는 정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서진과 함께 정욱을 봐 온 시간도 10년이었다.

“차라리 서진이가 우는 게 낫잖아. 네가 친절하면 할수록 서진이는 너 못 잊어. 괜히 여지 남기지 말아 줘.”

그 시간을 지켜보니 정욱이 서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저절로 느껴졌다.

그런 정욱이 매달리듯 부탁했다. 외면하기 힘들었다.

“기운 내, 인마. 누가 보면 군대 네가 가는 줄 알겠다.”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현조야, 사랑해.”

“정신 차려, 류서진. 너랑 나 같은 성씨인 거 잊었어?”

“그거 잘못된 거잖아. 바꾸자. 응? 할아버지한테 내가 이야기할게. 아니, 엄마 아빠한테 내가 다 이야기할게. 너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되는 거잖아.”

서진이 울면서 애원했다. 울고 있는 서진을 보는 마음이 아팠지만, 정욱을 믿기로 했다. 한결같이 서진의 곁을 지킨 정욱이라면 서진을 위해 무엇이든 할 테니까.

“너 군대 다녀오면 내가 다 돌려놓을게. 기다리고 있을게.”

“잘 들어, 난 너와 가족이 아니어도 널 좋아하지 않아. 여자로서 류서진은 절대 아니란 뜻이야.”

부러 더 모질게 말했다. 서진의 마음이 10년 치라면, 그 10년 치 마음을 잘라 낼 냉정함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모질어져야 했다.

“너 이렇게 차가운 사람 아니잖아. 너 내가 원하는 거 다 해 주는 사람이었잖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널 좋아했어. 네가 좋았다고.”

“네가 해석한 다정함과 내가 보여 준 다정함의 종류는 달라. 알아? 다르다고.”

“같아! 같단 말이야!”

너무 잔인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을 것이다. 정욱이 서진의 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욱이 달래 줄 것이고, 서진도 결국 제 풀에 꺾여 투정 좀 부리다 정욱에게 기대게 될 것이다.

끝내 서진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정욱은 평생을 바쳐 기다리고, 사랑할 사람이다. 이미 17년을 그렇게 기다린 정욱이니까.

조금 더 차갑게 더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

“난 너 여자로 안 봐. 절대.”

“류현조!”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우는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사랑하는 연인은 아니지만, 세상 누구보다 따뜻하게 대해 주던 형제였다. 세상천지 고아였던 제게 가족이 되어 주고 따뜻함이 되어 준 고마운 사람이다.

마음이 아무리 아파도, 키워 준 김 회장의 은혜를 배신하고 선화 부부에게 충격을 안겨 주는 일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너 정말 싫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숨기려고 애쓰면서 참았는데, 너 군대 다녀오면 내가 다 해결하고 기다리려 했는데. 이게 다 뭐야.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류현조!”

현조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지금 뒤돌아서면 당분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이렇게 모질게 하는 것이 맞다. 이대로 훈련장으로 향하면 시간이 흐를 것이고 그러면 서진 역시 스스로 정리할 것이다.

“내가 죽는데도 싫다고 할 거야?”

뒤통수를 잡아채는 목소리에 현조는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대답해! 너 이대로 내 마음 거절하고 가 버리면 나 죽을 거야.”

“류서진!”

“10년이야. 널 봐 온 시간, 그 시간 동안 내가 널 어떻게 참았을 것 같아? 내가 이날까지 얼마나 많이 참고, 기다렸을 것 같냐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죽는다는 말 다시는 하지 마. 너 그럼 내 가족도 아니야.”

다시 돌아서 걸었다. 돌아보지 말자고, 지금 돌아보면 저 여린 마음에 미련만 남기는 거라고.

정욱이 있으니까 서진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서진은 기어이 죽음을 택했다.

욕실 바닥을 빨갛게 물들인 채 죽은 서진을 도우미가 발견했고 소식을 전해 받은 선화 부부는 이성을 잃고 차를 몰다 사고를 일으켰다.

그 교통사고로 태준은 죽었고, 선화는 걷지 못하게 되었다.

불행은 덮치듯이 한꺼번에 왔고, 행운으로 여겼던 행복했던 시간은 저주로 바뀌었다.

“난 그렇게 이 집의 저주가 됐습니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현조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죄인처럼 살고자 했다. 아니,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죽은 딸과 남편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던 선화를 기억한다.

핏기 없는 얼굴로 서늘하게 바라보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눈물조차 말라 버린 야윈 얼굴로 내뱉었던 단 한마디.

‘너는 저주였구나.’

그 말이 아팠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무감했다.

고작 말 한 마디로 아플 수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고, 감각조차 느낄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가슴에 박힌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을 군대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혹독하게 벌하고 잔인할 만큼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버텼다.

“연재 씨와 함께 있으면 다 잊고 싶어집니다. 그날의 나도, 죽은 서진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어머니까지도.”

‘저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죄 많은 과거를 들으면서도 너는 단 한 번도 눈빛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괜찮다는 듯이.

“그래서 두렵습니다. 나를 옭아매고 있던 죄책감을 이렇게 쉽게 잊어도 되는 건지. 당신과 함부로 행복을 꿈꿔도 되는 건지.”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말해 봐요. 이제 나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연재 씨가 중요해졌으니까.”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 주는 당신의 품을 벗어나면 이젠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주 속에서도 살았지만, 이 여자를 잃게 되면 그땐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파렴치한 인간을 아직도 좋아할 수 있겠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안타까워 숨조차 죽여야 했다. 현조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그 아픈 과거를 혼자 끌어안고 살았을 시간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한 걸음 다가오려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던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가늠되자 눈물이 났다.

“당신이 왜 그 모든 것을 짊어져야만 하는지.”

연재는 조금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정욱이 그렇게 설득하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현조가 그렇게 냉정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

정욱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이미 벌어졌고, 과거는 다시 돌릴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팠다.

“당신이 믿었던 가족들은 이미 당신에게 등을 돌렸잖아요. 당신을 저주라고 부르고 밀어냈잖아요. 그런데 왜…….”

당신은 스스로를 파렴치한으로 몰아 세워가며 버틴 것인지, 당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것인지.

“서진 씨 마음은 서진 씨만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녀가 선택한 죽음은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걸 막지 못한 것은 권 실장님도 마찬가지고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재가 품에 안겨 왔다.

“이러니까 자꾸 기대고 싶어지잖습니까.”

“기대도 돼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게 기대요.”

그렇게 서진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는 순간순간마다 죄책감이 찾아왔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조금씩 무뎌진다는 것이 죄스럽다.

“10년이잖아요. 놓아주세요. 당신을 용서하세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러고 싶어진다. 이 작은 여자의 한 마디가 우주가 건네는 위로처럼 크고 따뜻했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절에 가 보지 못했다. 서진의 기일이면 죄인처럼 김 회장을 피했고, 선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신은 행복해져야 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그렇게 10년을 이날만 되면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이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독방에 가둔 죄수처럼 자신을 벌했다.

아무도 없는, 오로지 혼자였던 그 방에서 이젠 나와도 되는 것일까. 서진에게 용서를 구해도 될까.

감히, 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도 되는 것일까.

현조는 생각했다. 이 비가 그치면 새벽에 그 절을 찾아가겠다고.

그리고 선화를 만나 다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노라고.

쓸쓸함이 가득한 비가 쉬이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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