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지만, 끝이 정해진 결혼에 대한 것은 논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는 것처럼, 침묵했다.
겹겹이 쌓인 줄도 모르고, 쌓여버린 감정이 이렇게 거센 강물이 되리라고는 몰랐을까? 정말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런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해 헤어짐을 거부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게 된다. 두 손을 꽉 맞잡고 고민이 시작될 때쯤.
“하아.”
그의 한숨이, 무슨 의미인지 단숨에 알 것 같은 한숨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자존심을 허물어트렸다.
‘거절.’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관계의 끝은, 끝내 헤어짐이란 건가.’
부드러운 엔진음이 적막한 실내로 미세하게 흘러들어왔다. 시동을 걸었고, 차가 곧 움직였다. 대답은 끝내 하지 않은 채로.
강현조여도 상관없다고 말해 준 사람이다.
그래서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곁에 있어 줄까?
“그 이야기는 조금 더 지난 후에 하도록 하죠.”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봐도 돼요?”
“류현조가 아닌 강현조가 된 후에.”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대리인 류현조에서 벗어난 후에 연재에게 당당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진짜가 되어서.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연재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을.”
“날 위해서 나를 놓지 않겠다고요.”
현조가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결국 연재를 돌아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아주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난, 그렇게 가진 게 많지 않아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내가 가진 유일한 하나를 놓아 버릴 만큼.”
현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오른손을 연재에게 내밀었다.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처럼 행복해진 연재가 말없이 그 손을 꽉 쥐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진짜’를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앞 유리를 바라보는 현조의 눈빛이 단호했다.
***
“실장님 아직 안 가셨어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도로를 바라보던 정욱이 고개를 돌렸다. 금나리가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직 안 갔어요?”
“화장실 다녀오느라고요. 근데 연재 씨는요?”
“택시 태워 보냈어요.”
“아, 그러셨구나. 전 대리 부르신 줄 알았어요. 그럼 월요일에 뵈어요.”
고개를 꾸뻑 숙인 나리가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류현조.”
비틀린 입술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다.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왜죠?’
‘전무님께서 데리러 오신다고 해서요.’
무관심하기에 그런 줄 알았다. 질투조차 하지 않기에 여전히 장난처럼 연재를 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직원들이 버젓이 회식하는 장소에 나타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건가. 네 마음은.
“누굴 속이고 있는 거야, 류현조.”
이쪽을 속이고 있던 거였나.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정욱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뭔 헛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지껄여.”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라이터를 켠 도하가 필터 끝에 대준다. 필터를 깊게 빨아들인 정욱이 연기를 길게 뱉었다.
“언제 왔어?”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죽일 듯이 도롯가를 노려보던 시선도 여전한 채 정욱이 도하에게 물었다.
“네가 씹어먹을 것처럼 현조 자동차 노려보고 있을 때부터.”
“관음증이야?”
“그러는 넌, 다중인격이고? 얼굴이 대체 몇 개야?”
“너도 하나 골라 봐. 마음에 드는 얼굴로.”
“미친.”
정상은 아니다. 저 정도면 분명 뇌에 구멍 하나쯤은 있을 거다. 그러지 않고선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질기도록 미워할 수 없는 거다.
“내 가게 앞에서 그딴 얼굴로 서 있지 마.”
“마음에 들었어?”
“비싼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거 보니 취했네. 가서 자라.”
술에 취한 권정욱은 이런 식이었다. 혼자 있는 순간이 오면 이렇듯 뒤틀린 이면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을 벌써 세 번째 목격했다.
도하는 그래서 정욱의 공적인 얼굴을 믿지 않았다.
“너는 늘 류현조 편이었지.”
“억울하면 착하게 살아 보든가. 혹시 알아? 그럼 서비스로 술 한 잔은 공짜로 줄지.”
“넌 몰라. 현조가 어떤 짓을 했는지.”
도하도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가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사이에 필터를 끼우고 도하가 제 관자놀이를 엄지로 긁적였다. 매우 피곤하다는 듯이.
“내가 관심이 떨어져서 모른다 치자.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아.”
후우- 필터를 입에 물었다 빼내며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현조는 너처럼 얼굴이 다양하진 않거든, 너보다는 믿을 만하다는 거지.”
더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도하가 대충 손을 흔들더니 주머니에 끼워 넣고 가게로 걸어갔다.
“그래서 싫은 거야. 하나같이 류현조 편이라서.”
멀어지는 도하의 뒷모습을 무섭도록 노려보며 정욱이 씹어뱉었다.
자신보다 볼품없는 인생으로 사라져야 했을 현조였다. 김 회장만 아니었다면, 절대 자신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는 태생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볼품없는 인간이 사랑받는 것도,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도, 두려운 듯이 쩔쩔매면서 대중이 우러러보는 것도.
천애 고아, 부모조차 버린 자식.
그 천박한 태생에게 사람들은 반하고, 열광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조차도.
자신이 품고 있는 분노는 분명, 한 여자에게서 출발했다.
그러나 여자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10년이 흘렀고, 분노의 정체가 단순한 슬픔 때문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자신의 분노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열등감.
가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류현조’라는 한 인간에게 지독하게 반응하는 ‘열등감’이었다.
권정욱에게 류현조는 20년 동안 뿌리내린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
“임원회의 소집해 줘요. 30분 뒤, 소회의실로 각 부서 부장급 이상으로.”
“네, 전무님.”
월요일 오전부터 긴급회의 소집이었다.
“전주 본점 김필중 점장 지금 어딘지 위치 확인하고, 도착하는 대로 회의실로 바로 안내해요.”
“네, 전무님.”
집무실을 빠져나온 연재가 서둘러 각 부서로 연락했다. 마지막으로 김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점장님. 본사 총괄사업부입니다.”
김 점장은 10분 후면 사옥 주차장에 도착한다고 했다. 연재는 서둘러 회의 자료를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테이블이 자료를 하나씩 올려놓고 탕비실에서 준비한 음료와 생수를 각각 하나씩 세팅했다.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빠른 걸음으로 승강기 앞으로 향했다. 임원 전용 승강기가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리자 김 점장이 안에서 내렸다.
“점장님 이쪽입니다.”
“고마워요.”
회의실로 향하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 시작까지 약 3분을 남긴 상황이었다. 현조가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가자 연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긴급회의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이 회의에 참석했다. 선화였다.
삐걱대던 계약이 다시 적신호를 보냈다. 오이시 측에서 계약서에 없는 내용을 추가로 요청했고, 그것을 거부하자 협상이 끝난 단가 문제를 다시 걸고넘어졌다.
이미 수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한 금액과 공장 임대료 및 가공에 들어간 물량까지 합치면 현재까지 들어간 비용만 수십억이었다.
오전 내내 자료를 정리했던 연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매입한 배추부터 시작해서 고춧가루 하나까지 전부 기존에 사용하던 물량에 10배입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전주 공장에서 1차 가공에 들어갔습니다.”
회의 내내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1차 계약에서 잘라야 했다. 상대측에서 계약 파기 위약금을 받아도 피해액은 이미 위약금의 30배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계약이 무산되면 책임질 사람은 분명 있어야 할 겁니다.”
현조를 바라보는 김선화 사장의 매서운 한 마디를 시작으로 릴레이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는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현조는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1차로 요청했던 단가표와 2차로 받은 단가표가 달랐다.
교묘하게 계약 직전에 단가차익이라는 실수가 발생한 것이다.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합니다. 나머지는 류 전무가 정리하도록 하세요.”
“원재료 단가가 달라진 시점이 2차 계약 직전이라는 것이 의심스럽군요.”
현조의 말에 선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대측에서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선화는 더 묻지 않고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난 후 종일 집무실에서 두문불출하던 현조를 위해 연재는 샌드위치를 샀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린 후 그것을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 후 문을 열었을 때, 현조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트레이를 책상에 내려놓고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꿈이라도 꾸는지 반듯하던 미간에 주름이 잡혀 구겨졌다.
연재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살며시 눌렀다. 구겨졌던 미간이 풀어지자 연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훨씬 보기 좋아.’
손가락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연재는 그럴 수 없었다. 자는 줄 알았던 현조가 어느새 연재의 손목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잡은 손을 태연하게 끌어가더니 얼굴에 가져다 댔다.
“머리를 쓰다듬는 건 내가 했으니, 연재 씨는 내 볼을 쓰다듬어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가 작게 이야기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눈꼬리도 기분 좋게 휘어진 채로.
“이렇게요?”
연재가 다른 손까지 합세해 현조의 두 뺨을 감쌌다. 그러자 현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기도.”
평소라면 장난치지 말라고 돌아섰을 테지만, 오늘은 장단을 맞춰 주고 싶다.
‘이번 한 번만.’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가 오진 않을 것이다.
연재가 얼른 제 입술을 현조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피곤함에 감고 있던 현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나는 고작 손을 기대했는데, 이렇게 되면 기대를 넘어설 수밖에.”
뜨거운 손이 뭉근하게 연재의 허리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