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은 안 되나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끝이 갈라져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섹시했다. 다시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그곳을 꾹 눌렀다.
“아흣.”
팬티 위를 손가락이 꾹 누르더니 손톱 끝을 세워 죽 긁어 내렸다. 움찔, 수축한 입구에서 왈칵 체액이 쏟아졌다.
‘몸이 이상해.’
이젠 현조의 손끝만 닿아도 신음이 터졌다. 연재는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신음이 나오려 할 때마다 손목 안쪽을 깨물었다.
“덮치길 기다렸는데.”
또다시 팬티 위를 손끝으로 꾹 누르던 현조가 길게 그어 올리더니 안쪽을 가볍게 뭉개듯 비볐다.
“힉!”
입을 막았지만, 순간적으로 괴상한 신음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대체 무슨 짓을.’
정작 당사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인가.”
네가 느끼는 곳이 여기냐고 묻는 남자의 입술 끝이 다시 한 번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그러더니 단번에 아래로 내려간 그가 팬티 위를 이로 살살 긁고 혀를 굴렸다.
“아앗! 이상해요.”
“이상한 게 아니야.”
도무지 이성을 잃은 남자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맨정신으로 하는 섹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자비한 듯 살살 어르고, 삽시간에 몰아붙였다. 정신을 잃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마침내 팬티마저 그의 손에 의해 벗겨져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연재야, 서연재…….”
이미 젖어 있는 그곳에 혀가 닿았다.
밤은 언제나 뜨겁고 황홀했다.
***
행위가 끝나고 아주 잠깐 기절한 듯 잠이 들었다. 협탁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3시, 쏟아지는 탈력감에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연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늙었나 봐.”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리에 감겨 있는 현조의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가지 마.”
깊이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입술을 탐하려 했던 기억이 불꽃처럼 튀어 올라 뒤통수를 쳤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상한 목소리로 온갖 신음을 쏟아 냈던 건 또 어떻고.
어째서 삭제하고 싶은 기억은 박제 당한 것처럼 또렷할까?.
꼬물꼬물 아래로, 아래로, 기어 내려가 이불 속에 숨어들었다.
“덮치려던 용기는 어디로 가고.”
역시나 술에 절어 떡이 되었어도 기억은 멀쩡한가 보다.
“사람이 뭐 그렇게 빈틈이 없어요. 술에 취하면 좀 기억도 못 하고 좀.”
“서연재처럼?”
“…….”
할 말이 없다.
“뭘 숨고 그럽니까. 어차피 평생 놀려 먹을 건데.”
악마다.
“취한 사람 침대까지 데려다 눕혀준 성의를 봐서라도 좀, 잊어 주세요.”
“해 주면.”
“뭘요?”
“에로틱한 키스.”
차라리 그냥 변태 같은 키스라고 하세요. 연재가 이불을 박차고 쑥 올라왔다. 저 입을 아주 그냥 마구 그냥.
“류현조 씨, 각오하세요. 엄청 에로틱할 예정이니까.”
평소 놀리길 좋아하는 현조의 말투를 따라 하는 연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기대되는군요.”
자, 어서 와. 하는 표정으로 현조가 입술을 내밀었다.
쪽, 새가 모이를 쪼듯이 순식간에 입술을 부딪친 연재가 씩, 미소 지었다.
“신박한 사기꾼.”
“네에?”
현조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를 밀어 넣더니 뿌리까지 뽑아버릴 기세로 빨아들였다.
더듬고, 헤집고, 빨고를 고루 버무린 키스는 짜릿하다 못해 황홀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자 그새 퉁퉁 부어올랐다.
“이게 에로틱입니다.”
“로맨틱은 안 되나요?”
“그건, 대외용이고.”
“그럼 이건?”
“실전용.”
현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줍음은 언제나 연재의 몫이었다.
***
오랜만에 아침에 얼굴을 마주한 김 회장이었다. 거기에 현조까지 오랜만에 함께하는 아침 식사였다. 김 회장의 컨디션이 오랜만에 좋았다.
“너도 이제 건강 생각해야지, 일만 한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심하다가는 잃고 나서 후회해.”
회사 돌아가는 사정이야 알고 있지만, 부쩍 잦아진 출장에 김 회장의 걱정이 더해졌다.
“몸은 좀 어떠세요?”
현조도 김 회장 걱정이 앞섰다. 끝까지 항암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김 회장이다. 그런 김 회장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불안했다.
“이 나이 먹었는데 걱정은 무슨,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먹어.”
죽음을 앞두고도 김 회장은 자신이 아닌, 혼자 남을 현조를 걱정했다. 연재는 그런 김 회장을 보자 핏줄이 아니란 사실이 더 믿기 힘들었다.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마음으로 느껴지는 진실만 보자.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걱정이 아니라, 무섭습니다.”
“시간이 가는 것에 순응하고 사는 것이 인간이야. 그러라고 세는 게 나이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김 회장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현조는 여전히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신체의 가장 여린 살을 칼로 헤집는 것처럼, 몇 번을 헤집어도 굳은살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이별은 나이를 먹어도 무서워요. 할아버지.”
김 회장의 마른 손이 커다란 손주의 어깨를 다독였다. 두려움을 아는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다독이는 손길도 가늘게 떨렸다.
며칠 만에 산책이 이어졌다. 주말이라 이른 아침이 아닌 따뜻한 오전에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김 회장의 왼손은 현조가, 오른손은 연재가 각각 잡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호흡하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걷는다. 그 행위만으로도 상처 난 몸과 마음이 나아졌다.
“할아버지 힘들지 않으세요?”
“좋다.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은 땅을 밟을 기력은 남은 모양이야.”
연재의 걱정에 김 회장이 느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초여름 공기는 온화했고, 오래된 나무들을 찾는 새소리는 듣기 좋았다.
그저 이 정원을 오늘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김 회장은 감사했다.
“내 눈은 못 속인다.”
김 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꾹 쥐었다. 현조에게 하는 말이었다.
“연재야.”
“네, 할아버지.”
“증손주는 아직 이르지?”
김 회장의 뜬금없는 말에 연재 대신 현조가 발끈했다.
“노력 중입니다.”
“서재는.”
“침대 체질이라 바닥에서 못 잡니다.”
“진즉에 버릴 것을.”
나무 사이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한참을 웃던 김 회장이 숨을 가빠하자 현조가 김 회장 앞을 가로막고 앉더니 등을 내밀었다.
“할애비 아직 무겁다?”
“저도 아직 청춘입니다.”
“그래, 청춘의 등짝 한 번 시원하게 빌려보자.”
김 회장이 현조의 등에 기대어 어깨에 두 팔을 둘렀다. 현조가 가볍게 바닥을 치고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연재는 그런 두 사람을 한 발 뒤에서 바라봤다.
너무 예뻐서, 그림 같아서 그저 바라보기로 했다.
‘고아가 된 현조를 회장님께서 데려다 키웠다고 하더군요.’
김 회장은 류현조의 외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해서 연재는 저 아래서 자라다 만 ‘연민’이라는 감정에 미안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를 연민한다면 그것은 김 회장을 잃고 느끼게 될 슬픔 때문일 것이다.
“인석아 연재랑 맞춰 걸어야지.”
나무라는 김 회장의 말에 현조가 뒤돌아서서 환하게 웃는다.
웃는 얼굴이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은 박자로 뛴다.
두근두근.
당신의 미소 하나에도.
두근두근.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두근두근.
이 순간, 당신에게 빠졌다.
심장의 속도 만큼, 당신을 향해 아찔하게 뛰어간다. 연재가 달려가 현조의 곁에 섰다. 무엇을 해도 행복한 날이다.
***
감정이 물꼬를 트자 잘도 흘러갔다. 길이 없었던 거지 흘러갈 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아니, 어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갈까?
이건 마치.
“폭포 같아.”
“무슨 폭포?”
“네? 여름엔 폭포가 제격이죠. 휴가지로요.”
점심을 먹다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함께 식사하던 나리와 지영에게 얼른 둘러댔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되고, 세상이 달라 보인다더니. 이래서 미쳤다고들 하나 보다.
연재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씩, 웃었다.
“연재 씨 무슨 좋은 일 있어?”
“맞아요. 선배님 혹시?”
두 사람이 탐색하듯 눈꼬리를 길게 쭉 찢어 가자미눈을 떴다.
“아, 연애하지.”
별거 아니란 듯 나리가 툭 내뱉었다.
“그렇죠, 연애하시죠.”
그러자 지영이 맞장구쳤다. 매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세상에!”
“아니 근데 지영 씨는 같이 일했으면서 눈치 못 챘어?”
반년 전까지 사장실 비서팀으로 일했으면서 그걸 모를 수 있냐는 둥, 눈치가 꽝이라는 둥 나리가 지영에게 쏟아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재는 당황함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저랑 일할 땐 그런 느낌 전혀 아니었는데……. 거기다 총괄사업부로 옮겨 가시면서 전무님이랑 썸 타시는 줄……. 어머, 이건 아닌가.”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전무님 유부남이야.”
자신도 그런 큰일 날 소릴 잘도 해 놓고서. 연재는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실장님이랑 연애라니! 선배님 진짜 부러워요.”
“그러니까 말이야. 숨은 능력자였어. 우리 서연재.”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맞다고 수긍할 수도 없는 상황에 갇혔다. 아, 빌어먹을 비밀. 연재는 답답함에 먹던 밥숟갈을 내려놓았다.
원치 않게 요즘 다이어트하는 기분이 자꾸 든다.
“저기, 그건 비밀로 해 주면.”
“뭘 또 새삼스레 사랑이 숨긴다고 숨겨지니? 연재는 그냥 얼굴에 써 있어.”
“아니죠, 대리님. 사내 연애의 매력은 ‘비밀 연애’ 잖아요.”
“쨌든, 우리한텐 숨길 필요 없고, 숨겨도 다 써 있어. 서연재.”
나리가 싹둑 잘라 말했다. 아니, 얼굴에 뭐가 써 있는 데요?
“‘나 연애해요. 행복해요.’ 이마에 써있네.”
정말? 그게 보인단 말이야?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연재는 괜스레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쓱 가렸다.
“선배 가린다고 안 보이는 거 아닌데.”
지영이 한 술 더, 떠먹여 준다. 아, 그런 거구나. 가려도 보이는 거구나. 연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비굴하게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치웠다. 연애를 이마로 홍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저나 다들 연애에 결혼에 좋을 때다.”
“결혼이요?”
연애는 알겠는데, 결혼은 누굴 말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언제까지 말 안 할 거야?”
지영을 보면서 나리가 말했다. 그러나 정작 연재가 뜨끔했다. 자신에게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양심이 자꾸 찔렸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로 청첩장이 들이 밀어졌다.
“어? 어! 지영 씨?”
“보름 후에 결혼해요. 선배님 축하해 주실 거죠?”
발그레해진 얼굴로 지영이 수줍게 말했다.
“당연하지. 축하해.”
“선배님 결혼식도 꼭 갈게요.”
“아, 으응.”
왜 이렇게 덥지. 연재가 손으로 부채질했다.
“그리고 금요일에 지영 씨 결혼 축하 회식이 있을 거란 거지! 비서팀 전원 참석!”
비장한 발표를 하듯 나리가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