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아서요
“현조 씨 이야기를 들었어요.”
쏘아붙이려던 현조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현조 씨는 절대 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만났고, 차 마시면서 들었어요.”
긴장이 풀린 듯 현조가 마루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어디 하나둘이던가. 그것을 정욱이 대신했다고 한다.
망설이던 말을 대신 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끝내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들춰낸 것에 화를 내야 하나.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허탈함만 밀려왔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요…….”
동네를 떠돌던 거지가 고아가 됐고, 동정심 많은 노인이 데려다 왕자로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인가. 눈을 질끈 감은 현조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 확실하게 알았습니까? 내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정욱이 원망스러웠다.
망설이다 끝내 말하기를 포기했던 진실이다. 순간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연재에게 지우고 싶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남기는 싫었다.
어차피 헤어지면 끝날 사이, 굳이 밑바닥을 내보이는 만용을 부리기는 싫었다. 헤어지더라도 서연재에겐 꽤 근사한 남자로 남고 싶었으니까.
“가짜 아니에요.”
현조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연재를 바라봤다.
“여기 있는 현조 씨도, 과거의 현조 씨도. 전부, 현조 씨니까요.”
투명하게 비추는 눈동자는 거짓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다른 나지.”
“과거는 과거로, 미래는 오지 않은 채로. 우리는 현재에 있는 거잖아요. 과거의 현조 씨를 동정했던 것도 맞아요. 미래의 현조 씨는 짐작도 할 수 없고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는 당신만큼은 알아요.”
공허하게 비어 가던 현조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내가 아는 현조 씨는 일도 잘하고, 멋진 남자고, 농담 같은 여유도 부릴 줄 아는 근사한 남자예요. 몰래 훔쳐볼 때마다 눈이 부시던, 내겐 너무 완벽한 남자예요.”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네 눈에 비친 내가 부러울 만큼 아낌없는 너의 말에 가슴이 뛴다.
그깟 과거쯤이야 라고 털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건 어디까지나 류현조의 이야깁니다.”
강현조로 살았으면 절대 없을 지금이니까. 도망가 버린 모친과 죽은 부친, 그들이 버린 자식이 바로 ‘강현조’니까.
그런 강현조를 과연 류현조와 똑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류현조로 살기 위해 권위에 익숙해지고, 류현조로 살기 위해 오만함을 갑옷처럼 둘러야 했다.
세상은 그런 류현조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발아래 무릎 꿇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거지처럼 끼니를 굶던 실패한 남자의 아들을 세상은 과연 올려다볼까?
아니, 누구라도 눈을 내리깔고 마음껏 비웃을 것이다.
실패한 인생, 낙오된 삶, 거기에 버려진 인생.
그런 삶을 너는 지금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 시선이 나를 꿰뚫을 때마다 나는 이유 없이 짜릿했습니다.”
자신을 의심 없이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향해 현조가 나직하게 말했다.
연재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의 첫인상이 되어준 시선이었다. 생각해 보면 저 시선이 시작이었다.
그녀에게 이유 없이 끌리던 그 첫 시작.
우습게도 첫눈에 홀렸던 거다.
“지금 알 것 같아, 그 시선 때문에 서연재 씨를 선택했다는 것을.”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주인을 바라보는 충견을 보는 것 같았다. 저 눈을 가진 연재라면 껍데기를 벗어던지듯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친의 몰락을 보고 저를 버리고 도망친 모친처럼.
“나는 이 결혼이 끝나는 순간, 강현조가 될 겁니다.”
그때도 너는 그 올곧은 시선을 내게 보여 줄 수 있을까.
“평범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을 강현조 말입니다.”
확인하듯 현조는 연재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러나 연재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데, 연재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어찌나 예쁘게 웃는지 현조는 순간 연재의 머리칼을 헤집고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듣고 있습니다.”
“제가 왜 지금 고백하지는지 궁금해하지도 마시고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연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웃는 입술이 시리게 예뻤다.
현조는 순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저, 현조 씨 좋아해요.”
마치 지금에서야 용기를 낸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현조는 그런 연재의 표정에서 혼란을 느꼈다.
“왜, 지금…….”
“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곧,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아주 많이 고민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달콤하게 말하면 진심이라고 착각하고 싶어지잖습니까.”
현조가 손을 들어 연재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더욱 바짝 끌어당겨 눈을 맞췄다.
안도, 안심, 그런 것들이 그녀의 시선을 타고 넘어왔다.
“연재 씨가 나를.”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믿고 싶어지게.”
이렇게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속삭이면, 믿을 수밖에.
“키스하실 건가요?”
“허락할 겁니까?”
“안 하시면 제가.”
현조의 입술이 연재의 말을 삼켰다. 뜨거운 숨결이 완벽하게 맞물린 입술을 타고 타액과 함께 삼켜졌다.
달빛이 비치는 밤에, 서로를 끌어안고 뜨겁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연재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현조가 미소를 머금었다.
“다 들었다니, 낯부끄럽게 추가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죠.”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현조 씨 이야기는 현조 씨에게 듣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사실을 말해 줄 수 있어도, 현조 씨의 진심은 모를 테니까요.”
현조가 고개를 저었다.
“진실은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연재 씨가 판단하는 겁니다.”
“제가요?”
“진실은 믿는 사람의 마음에서 결정되니까요.”
여전히 연재의 볼을 손바닥에 가둔 채 현조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작은 여자에게서 우주를 보는 것 같다. 정직한 눈동자는 무엇을 말해도 믿어 주겠다는 신념처럼 느껴졌다.
“나도 부탁 하나 해도 됩니까?”
“네, 들어줄 수 있는 거로 해 주세요.”
처음이었다.
부친이 죽은 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때처럼 막막한 기분이 든 것은.
연재 떠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 홀가분하게 떠나면 어쩌나 상상했을 뿐인데 막막해서 가슴이 답답했다.
이 작은 여자를 잃는다는 것이 슬픔으로 다가올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무래도 연재 씨를…….”
속절없이 쏟아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발그레한 볼과 동그란 눈동자가 한없이 순수하게 맞부딪쳐온다. 눈동자 속에 비친 밤하늘이 꼭, 호수에 빠진 것처럼 잔잔하게 반짝였다.
애써 밀어내고 부정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고, 급작스레 쏟아지는 비처럼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젖어야 했다.
이 눈동자에 함락당한 채로 젖어 들었다.
“그러니까 내 부탁은, 한 번 더 허락해 봐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현조가 말했다. 하지만 연재가 고개를 저었다.
“하려던 말, 끝까지 하시면요.”
반듯하던 현조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대담하게 눈조차 피하지 않는 연재가 현조의 넥타이를 손으로 가만가만 매만지며 다시금 시선을 부딪쳤다.
“내가 아무래도 연재 씨를, 그다음 말이요.”
“무거울 텐데 괜찮겠어요?”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끝내지 못한 말을.
“그건 듣고 난 다음에 결정할게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간지럽게 매만지던 현조가 결심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느리고, 또 정확하게.
“좋아합니다. 연재 씨.”
연재의 볼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잘 읽은 볼을 바라보는 현조의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였다.
이렇게 수줍어할 거면서.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겁게 떨어진 음성이 끝도 없이 가슴을 적셨다. 연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무겁지 않아요.”
“그럼 잘 간직해 봐요. 내 고백.”
그 순간 타이가 확 당겨졌다. 현조가 힘없이 끌려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의도한 부딪침이 지나치게 달콤했다.
둘만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뜨겁고, 또 뜨거운.
마루에서 시작된 불길이 순식간에 거세졌다. 마치 정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두 사람의 몸은 뜨거웠다.
“거절하려면 지금뿐이야. 지금, 이 문을 열고 나가.”
키스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현조가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흐트러진 눈으로 어지러이 바라보며 연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젠 실수라고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취하지도 않았으니까.”
떠밀리듯 뒷걸음질 쳐진 곳은 광활하게 넓기만 하던 안방 침대였다. 연재는 뒤꿈치에 부딪힌 침대를 흘긋 쳐다봤다.
그가 묵비권을 행사했던 그 날의 뜨거웠던 기억이 제 뒤에 있었다.
“내가 취했어요. 오늘은.”
고작 맥주 두 캔에 흐려질 정신이 아니지만, 당신에게 취했다. 그래, 오늘은 당신에게 취한 것으로 하자.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그저 보통의 부부처럼, 뜨겁게 서로를 안고 감정의 교감을 나누고 싶다.
“지금부터 거절은 소용없을 겁니다.”
툭, 연재의 등 뒤로 차가운 시트가 닿았다. 지나치게 선명한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곧 뜨거운 열기에 한기가 지워졌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연재의 목덜미를 현조가 깨물었다.
“하아-”
정신없이 입맞춤이 이어지고, 현조의 손길은 차분하게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냈다.
마침내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나신을 내려다보며 현조가 감탄하듯 탄식을 자아냈다.
“차라리 내가 취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그때는 반쯤 취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인 줄. 상상하지 못할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현조는 불쑥, 일어난 제 앞섶을 의식하며 연재를 벗기던 것과 달리 빠른 속도로 제 옷을 벗어 던졌다.
“글렀습니다.”
“뭐, 뭐가요?”
“나 이제 서재로 안 갑니다. 아니, 못 가겠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너를 두고 내가 그동안…….
상상에서조차 민망한 생각이 두둥실 머릿속에 떠올랐다. 매일 밤, 딱딱한 바닥에 누워 이 살갗을 만졌던 감촉을 떠올렸다.
“내가 그동안 서재에서 혼자.”
“…….”
“했습니다.”
뭘? 무엇을? 서재에서 혼자 잠도 안 자고 일을 했다는 건가? 그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하나?
“혹시, 칭찬해 달라는…….”
“칭찬받을 일이었을까요?”
현조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드로어즈를 입은 채 연재의 배 위에 무릎을 세워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