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그렇게 애틋했다고
“이원에 떠도는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죠.”
그렇게 정욱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현조는 사장님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아주 덤덤한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옛날이야기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듯이 약간의 나른함도 느껴졌다.
‘이 자식이 고아가 된 날이니까.’
정욱의 한마디에, 도하의 한 마디가 겹쳐졌다.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함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정욱의 입술이 다시 열리길 말없이 기다렸다.
26년 전, 현조는 부친과 함께 소담 본점이 있는 전주 시내에 살았다.
부친과 단둘이 살던 현조는 지독하게 가난했는데, 가난의 원인은 ‘술’에 찌들어 사는 부친 때문이었다.
중산층에 속하던 부친은 사업에 실패한 후,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닥쳤다. 그런 부친을 못 견디던 모친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다.
그날부터 부친은 더욱 술에 의지했다.
“현조야, 내 새끼. 아빠가 미안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실패해서 미안해. 낙오자가 돼서 미안해.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해. 배고프게 만들어서 미안해.
부친은 술만 마시면 미안하다는 말을 나열했다.
마치 지구의 모든 미안함은 부친의 잘못으로 빚어지는 것만 같았다.
“배고프지?”
집에 돌아가던 중에 부친이 물었다. 주변엔 식당이 즐비했지만, 돈이 없으면 그림의 떡이었다. 식당을 지나칠 때마다 음식점 안에서 나는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허기진 배를 날뛰게 했다.
집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배고픈 길이란 것을 또 한 번 절감했다. 부친의 손을 잡고 서서 기와집으로 지어진 식당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추레한 옷차림, 가진 것이라고는 굶주린 배가 전부인 부자는 포기하고 돌아섰다.
“들어와요.”
그때 소담에서 나와 두 사람을 붙잡은 사람이 김이원 회장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뜨거운 설렁탕과 잘 익은 깍두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현조는 고이는 침을 삼키며 뚝배기를 쳐다봤다.
“뜨거우니까 불어 가며 천천히 먹으렴.”
친절하게 말하는 김 회장을 현조는 멀뚱멀뚱 쳐다봤다.
“왜? 설렁탕 싫어?”
막 숟가락을 집어 들던 현조의 부친이 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김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음식값이 없어서…….”
김 회장이 다가와 현조 부친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내가 들어오라고 했으니 돈은 필요 없어요. 어서 들어요.”
“고맙습니다.”
부친과 현조는 염치없는 인사를 남기고 음식을 입으로 퍼 날랐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고 나자 김 회장이 과일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몇 살이니?”
포크로 찍어 현조의 부친에게 하나 내밀고, 또 하나를 찍어 현조에게 내밀면서 김 회장이 물었다.
“8살이요.”
“이름은?”
“강현조요.”
“녀석 참 똘똘하게 생겼네. 다음에도 배고프면 언제든지 오너라.”
현조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얼굴을 들어 김 회장을 바라봤다.
“돈 없는데…….”
“돈이 있으면 오라고 안 하지.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올 수 있을 테니까.”
김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현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상한 손길이 무척 따뜻했다. 그런 인자한 사람에게 끼니를 얻어먹고 가게를 빠져나오는데 소란이 일었다.
“사장님, 이 사람이.”
부리는 종업원이 현조의 부친을 손으로 가리켰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부친이 직원에게 멱살을 잡혀 있었다.
“이 사람이 은혜도 모르고 돈을 훔쳤다고요.”
현조는 태어나 처음 부끄러움을 배웠다. 빨개진 얼굴로 부친을 노려봤다. 가난하고 힘없고 술에 찌들고 실패한 아버지라도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하루 벌어 이틀을 술로 살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저를 키워주는 부친이 고마웠다.
그러나 곯은 배를 채워주는 은혜를 이렇게 무참히 짓밟는 부친이 부끄러워 원망이 차올랐다.
“괜찮다.”
어린 현조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던 김 회장의 손길이 울고 싶을 만큼 따뜻했다.
그날 현조의 부친이 훔친 돈은 3천 원, 그날 먹은 두 사람 음식값이 당시 돈으로 3천 원이었다.
그 6천 원이 현조의 삶을 바꿔 버렸다.
훔친 돈으로 산 술을 마시고 부친은 저수지에 빠졌다.
그렇게 고아가 됐다.
“고아가 된 현조를 회장님께서 데려다 키웠죠.”
연재는 눈가를 훔쳤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눈가를 훔치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현조가 말하지 않았던 비밀, 혼자만 간직했던 비밀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연재는 비로소 알게 됐다.
“저는 소문이 사실이라서 사장님께서…….”
선화의 남편이 외도로 낳은 아들이라서 미워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었던 거다.
“완벽한 타인이었죠. 마음씨 좋은 노인이 아니었다면 보육원에 보내졌을 테고요.”
차라리 고아로 살아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현조가 끼어들어 엉망이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정욱은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지만, 입안이 더 쓴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사장님께서는 전무님을 왜.”
“미워하는지 궁금해요?”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뿐인데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긴장되었다. 언제부터 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정욱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뗐다.
“강현조가 류현조가 되었잖아요.”
성이 바뀌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부모 자식의 관계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거지였던 강현조가 왕위를 물려받게 됐는데 과연 모두가 찬성할까요?”
“아…….”
“사장님은 현조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싫어하시죠.”
정욱이 설명할수록 연재는 머리가 아팠다. 부와 권력은 갈등을 불러오는구나, 정도로 이해될 뿐이었다.
“어차피 사장님께서 물려받을 회사 아닐까요?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현조를 지나치게 아끼시죠.”
지나칠 정도로 아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재는 이해했다. 김 회장과 현조를 놓고 보면 핏줄 그 이상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사장님도 현조를 어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현조의 모든 것은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바뀌게 될 것이고.”
그래서 진짜 결혼이 아닌 가짜 결혼으로 끝내야 했던 걸까? 현조를 사랑하지 말라던 김선화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현조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위한다면 현조에게 필요하지 않은 감정을 남기지 않는 게 좋아요. 연재 씨에게도 도움 되지 않을 테니까요.”
정욱의 말대로라면 곧 끝날 연극에 마음을 주고, 감정을 남긴다는 자체가 현조에게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사장님은 어떤 형태로든 현조가 행복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실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회장님께서 돌아가시면…….”
현조가 바라는 것이 후계자의 자리라서? 이원푸드를 원하고 있어서?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26년을 김 회장 일가에서 살아왔다면 그 역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았을 테니까. 일에 대한 완벽함을 추구하는 집요함만 보더라도 김선화 사장 못지않았다.
“사장님이 현조에게 보이는 반응은 모두 현조가 자초한 일이에요.”
정욱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정했다.
연재는 여기서 더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머리로는 얼마든 상황을 짜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류현조라는 남자를 곁에서 봐 오면서 느낀 것들은 달랐다.
“그래도 저는 사장님께서 제게 했던 말이나, 지금 실장님의 말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선 현조와 김선화 사장을 비교하자면, 풍기는 이미지가 달랐다. 김선화 사장은 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라면, 현조는 능력 때문에 인정받는 스타일이었다.
주변을 찍어 눌러 압도하느냐, 주변이 기에 눌려 압도당하느냐의 차이처럼 상반되었다.
류현조라는 남자는 존재 자체로 주변이 압도당했다. 그는 정작 오만하게 반짝일 뿐, 주변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존재감에 의해 주변이 스스로 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조의 타고난 능력 때문에 선화가 경계하는 것일까? 빼앗길까 봐?
“더 많은 것을 안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정욱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연재는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였다.
“…….”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알고 난 후에 따라올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경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만 감당하면 되는 거라면.”
정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테이블을 검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연재 씨는 현조를 위험에 빠트리는 미끼밖에 되지 못할 겁니다.”
입꼬리만 끌어올린 웃음의 이면은 차디찬 눈동자였다. 테이블에 아슬아슬하게 세워 놓은 동전 같았다. 각기 다른 면이 공존했고, 어느 쪽으로 밀어 넘어트리든 정욱은 상관없어 보였다.
“…….”
연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분히 그가 아프게 박혀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연재 씨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차원으로 꺼낸 이야기에요.”
놀랍게도 정욱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현조의 행동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야 했는지 이제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요.”
때때로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현조를, 연인처럼 서슴없이 다가서다가도 타인처럼 거리를 두는 현조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다. 다가오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
운전하는 내내 연재는 정욱의 말을 곱씹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정욱은 협조해 달라고 했다.
‘현조를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봐요.’
어쩔 수 없는 연극을 하는 가짜 관계다. 선은 분명했다.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었고, 더 깊이 파고들 명분도 없었다. 그가 그어놓은 선 밖에 서서 연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점쟁이가 한 말 때문에 결혼한 거였잖아. 어설픈 동정심으로 파고들 생각 하지 마. 서연재.”
그가 약해진 틈을 타 감정의 깊어지기라도 한 거야? 끝내 현조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다. 그런 이야기를 정욱에게 들었다고 관계가 달라질 이유는 없는 거다.
오히려 현조는 혐오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것을 안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보다 더한 비밀이 남아 있다면, 그는 대체 얼마나 괴로운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웃겨, 서연재. 그냥 나쁜 놈이면 어쩔 건데?”
언제부터 그렇게 애틋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