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속 괜찮아요?”
“아,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뭘요. 혹시 몰라서 사 왔는데, 필요하면 마셔요.”
정욱이 내민 것은 숙취 해소제였다. 연재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
“안 물어봐요?”
입술을 깨물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상대 쪽에서 먼저 물어오자 오히려 더 머뭇거리고 말았다.
무언가 아주 큰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물었는데 정말 엄청난 말이 나오면 어쩌지?
종일 냉담한 채 거리를 두는 현조도 그렇고 대체 지난밤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궁금해 미치겠는데 물으면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입술을 깨물던 연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많이 궁금했죠? 우리가 어쩌다 그런 사이가 된 건지.”
단도직입적으로 되묻는 정욱을 잠시 바라보다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불편함을 느낄 때쯤 정욱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전무님을 만나러 왔으니까. 그 이야기는 따로 만나서 해 줄게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연재에게 시선을 거두고 돌아선 정욱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그려졌다. 노크 후 들어간 현조의 집무실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정욱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지워졌다.
“무슨 일이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던 현조가 시선을 서류에 둔 채 말했다.
“계약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그제야 현조가 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 정욱을 바라봤다.
“원인 파악 중이야.”
일본 수출 계약은 무리 없이 진행 완료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단가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측하며 수출 단가를 하나부터 열까지 살피는 중이었다.
수출 메뉴 전 품목을 레토르트 식품으로 가공해야 하는 과정에서 단가 책정이 문제였다. 거기에 가공 일정에 대한 문제도 발생했다. 단가차익이야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가공 자체에 필요한 시간적인 여유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 컸다.
“원재료 수급에도 문제가 있어. 이대로면 지속적인 납품도 불가능하고.”
그런 이유로 일본 오이시상사에서는 가공식품이 아닌 지점 오픈을 원하고 있었다.
“사장님 의견도 같습니다. 본점에서 기획한 대로 일회성 판매로 끝내기를 바라고. W그룹에서 오이시 측과 접촉을 시도한다는 정보가 돌고 있고요. 오이시 측에서 소담을 고집하는 상황이지만, 어차피 대기업이 나서면 물량 공세에 따라가질 못할 겁니다.”
중견기업의 한계이기도 했다. 품질이 월등하고 맛이 월등하다고 해도 결국 대기업의 자본에 눌리는 것이 생태계의 원리였다.
국내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놓은 덕분에 소담에 대적할 한식 전문점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해서 김선화 사장도 무리한 해외 진출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저녁 비행기로 나갈 예정이야.”
현조에게는 첫 시행착오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었다. 목표를 향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신념을 더욱 지켜야 한다는 것.
이원푸드는 절대적으로 김이원 회장이 세워 놓은 기본 이념을 철저하게 지켰다.
‘음식은 정성이다. 정성을 위한 속도를 지켜야 한다.’
부친과 사이가 멀어진 김선화 사장도 부친의 철학만큼은 어기지 않았다. 하지만 성급함이 화를 부른 것이다. 첫 임무에 대한 성과를 빠르게 내고자 서둘렀고, 그 결과 다각적으로 계산해야 할 부분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단가에 대한 부분을 놓쳤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일단 납품일을 조정하고 지점 오픈에 대한 협상을 위해 출국을 서둘렀다.
“예약은?”
“9시 비행기로 예약했습니다. 2박 3일 일정으로 호텔은 지난 출장 때 머무르셨던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현조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잠시 바라봤다. 지은 죄가 있으니 찔리는 것은 당연했다. 예전처럼 덤덤하게 시선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말씀하신 단가표와 계약서 다시 준비했고, 레토르트 식품에 대한 자료도 보완했습니다.”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시선을 피했다. 눈이 아닌 코라던가 입술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그러다 문득 단정한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현조가 일어섰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그의 얼굴이 아닌 가슴이 되었다.
거대한 성벽 앞에 선 것 같았다. 그가 오늘처럼 단호해 보인 적은 없었다.
“할아버지 부탁합니다.”
지난밤의 사건에 대한 것은 묻지 않았다. 할 말이라고는 오로지 김 회장을 부탁한다는 말이 전부인 것처럼 현조의 입은 무거웠다.
“네…….”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챙긴 현조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차가운 면을 내비치면서 어째서 묻지 않는 것일까.
연재는 참을 수 없어져서 현조를 붙잡았다.
“전무님.”
문으로 향하던 현조가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다시 얼굴을 마주했지만, 정작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싶어도 아직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섣불리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저녁에 연락할게요. 가능하다면 식사 같이했으면 해요.’
정욱 역시 쉽게 이야기 해 주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지난밤을 기억하지 못한 죄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흔한 인사로 얼버무렸다.
“그래요.”
담담하게 대답한 현조가 돌아서 멀어졌다.
***
정욱을 만나기 위해 간 곳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카페였다. 평소 자주 다니던 <진저>가 같은 건물에 있었다. 정욱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지만, 단둘이 저녁을 먹긴 부담스러웠다.
커피숍에 들어가 창가 쪽에 앉았다. 해가 진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오가는 인파에 시선을 빼앗겨 생각에 빠져들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단지 그 생각을 했을 뿐인데 시선이 어느새 하늘로 향했다. 마치 비행기를 찾는 것처럼.
“조금 늦었죠? 미안해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정욱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정욱의 눈동자가 조명 아래 밝은 갈색을 띠었다. 안경을 투과한 조명이 닿은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눈이 반으로 접혔다.
인상 좋은, 선한 사람. 정욱의 첫인상이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도 위압감을 느끼기보다 친근함을 느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선한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더해졌다.
“전무님은 출발하셨죠?”
“네. 지금쯤 공항에 도착하셨을 거예요.”
“그럼, 일단 차부터 주문할까요?”
마침 다가온 종업원에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다시 마주 바라봤다. 묘했다. 카페에서 단둘이 마주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까? 사장실 비서팀으로 일하며 봐왔던 실장이라는 이미지와 미묘하게 어긋났다.
마냥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림자처럼 밝은 빛 아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실장님 오늘 뵈니 좀, 분위기가 달라 보여요.”
그 간극에서 오는 이질감을 상쇄해 보려고 던진 말이었다. 웃는 얼굴로 던진 말에 정욱은 무표정했다.
‘그런가요?’라는 말로 지워지길 바랐던 이질감이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어떤 분위기인데요? 서연재 씨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마치 안경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 사람이 정말 권정욱 실장 맞나? 연재는 다시금 의아했다.
“아, 그야 친절하시고, 배려도 깊으시고.”
정욱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지나갔다. 몹시 당황하던 차에 종업원이 다가왔다.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내려놓고 간 머그잔을 연재가 얼른 두 손으로 감쌌다. 이상하게도 지금, 서늘했다.
“내가 왜 연재 씨 애인이라고 했을까? 어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죠?”
돌아가는 길을 모르는 사람처럼 직선으로 내리꽂는 말에 연재는 쥐고 있던 머그잔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
“어제저녁에 일본 수출 건으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현조 일정을 물으려고 연재 씨에게 전화했어요. 현조가 그 시간에 미팅이 있어서 통화가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아, 네.”
“전화를 금 대리가 받았어요.”
통화 목록을 보고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대로였다.
“연재 씨 바꿔 달라고 했더니 알다시피 잠들었다고 하고.”
“…….”
다시 생각해도 뭐에 홀린 하루였다. 술 때문에 떡이 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저질렀으니까.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그래서 갔어요. 거기서 연재 씨를 봤고, 날 붙잡고 연재 씨가 현조와 불륜관계에 놓여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오히려 더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쩌다 비밀유지조차 못 한 것인지 책임을 묻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둘러댔어요. 내 딴에는 돕는다고 했던 말인데, 불쾌한가요?”
“아…….”
그러니까 도와주기 위해서 둘러댔다는 뜻이었다.
난처했다. 3년이나 봐 왔지만 정욱은 어려운 사람이고, 무엇보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엮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난감했다.
“저 때문에 괜한 오해를 사게 해드려 죄송해요.”
어쨌든 가장 피해 본 사람은 정욱일 테니 연재는 사과부터 했다.
“오해가 아닐 수도 있죠.”
순간 멍청하게 정욱을 쳐다보고 말았다.
“연재 씨 표정 솔직한 거 알죠? 말로 안 해도 얼굴에 전부 보여요.”
재미있다는 듯이 정욱이 웃으며 대꾸했지만, 연재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도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욱이 농담을 던질 줄 생각 못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놀리는 놈, 안하무인으로 건방진 놈, 정중하게 놀리는 놈. 특징도 골고루다.
“오해라고 해도 지금부터 우리는 사귀는 사이로 해 두죠.”
웃음을 멈춘 정욱이 마치 지시를 내리는 상사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조금.”
“그래야 현조가 안전해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연재는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안전, 이요?”
“그래요.”
“누구로부터 안전해야 하죠?”
설마. 연재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제게 절대 사랑은 하지 말라고 했던 김선화 사장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 맞아요.”
“어째서 그런…….”
“연재 씨도 알고 있듯이 사장님은 현조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고 묻기가 겁났다. 그 속사정을 알아버리면 현조를 동정하게 될 것만 같았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현조를 동정하게 되면, 그의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싶은 욕심을 낼 것 같았다.
얼마나 우스운가. 자신이 부족하기에, 상대도 부족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하다니.
“현조가 왜 행복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재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다면 그래, 돌아가지 않는 방법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