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연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부라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서, 설마요.”
현조가 털썩 앉자, 직원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더니 주문을 받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리와 지영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도 식사 마저 들어요.”
“네, 전무님.”
그날그날 정해진 점심 한정 메뉴가 있는 관계로 음식은 곧 나왔다. 현조는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더니 야무지게 국을 떠먹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런 맛이었군요.”
직원 식당 처음 이용해 보는 것처럼 말하는 현조를 어이없이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조는 우아하게 식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누군 식욕이 싹 달아났는데, 맛있게 먹는 현조를 보면서 연재는 고개를 내저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연재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던 순간이었다.
“나 혼자 먹어야 합니까?”
아니, 앞에 있는 나리와 지영은 투명인간입니까? 마치 식당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연재뿐이라는 듯 현조가 까칠하게 말했다.
“아, 저희는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전무님 식사 맛있게 드세요.”
왠지 등을 떠밀려 나가는 사람처럼 나리와 지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조는 고개만 까닥일 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리와 지영이 어색하게 서로 등을 떠밀었다. 연재는 멀어지는 그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마치 엄마 손을 놓친 아이 같았다.
“그거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도 됩니까?”
“네?”
현조가 연재 앞에 놓여 있는 진미채를 젓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연재가 멍하니 대답을 못 하자 아무렇지 않게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반찬 더 필요하시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먹던 걸 아무렇지 않게 집어먹는 현조를 의아해하며 연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깔끔한 이미지로 상상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 좀 주지.”
현조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은 분명 연재가 마시던 물컵이었다. 하지만, 연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이거면 됩니다.”
그러더니 이번엔 연재가 마시던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
“그만 하세요. 제발.”
“무엇을 그만하라는 겁니까.”
“오늘 온종일 하셨던 행동들 전부 지나치세요.”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연재는 목소리를 줄이고 속삭였다. 그런 연재를 보며 현조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현조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스쳐 갔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일어나 앞장서는 현조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연재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따라 걸었다.
***
일단 가자더니 사무실로 향하던 중 급한 일정 때문에 곧바로 외부로 나간 현조였다. 뭔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연재는 맥이 탁 풀렸다. 혼자 임원실이 늘어선 복도를 걸었다.
“서연재! 잠깐 나 좀 봐.”
화장실 옆 휴게실 유리문을 급하게 밀고 나온 나리가 연재를 불러 세웠다.
“차 한잔 하자.”
“네, 대리님.”
휴게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내미는 나리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그야말로 기대감에 부푼 눈동자였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기다렸다는 듯 나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더니 참고 있었을 말을 쏟아 냈다.
“걱정돼서 묻는 건데, 전무님이랑 무슨 사이야?”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나리는 직접 물었다. 연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리가 뽑아준 자판기 커피를 쥐고 있던 손이 떨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 나 진짜 온갖 상상이 다 되거든? 연재 씨, 혹시 전무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그런 사이라고 묻는 나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 식당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오해를 사기 충분했던 모양이다.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와 결혼한 사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우스웠다. 무엇보다 지금, 나리의 눈동자는 완벽하게 불륜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짜 남편의 내연녀가 되는 상황이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런 사이라뇨?”
진실을 말할 수 없으니 몸은 더욱 경직됐다.
“난, 연재 씨가 걱정돼서 그러지. 그런 남자를 함부로 좋아하면. 어휴, 신분 차이는 둘째치고 유부남이잖아.”
그 유부남 제 거거든요.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죠. 유부남이시죠.”
“그런데 내 눈에는 연재 씨랑 전무님 썸 타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것도 아주 진하게.”
며칠 전 화장실 앞에서 그러고 있었던 것도, 오늘 직원 식당에서 그런 모습도 전부 필요 이상으로 보일법했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지난번 화장실 앞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솔직히 요즘 류 전무님 연재 씨 앞에서만 이상한 거 알아?”
할 말이 없었다. 조금 더 조심해야 했는데, 현조와 같이 있으면 휘말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세상에 둘만 있는 착각을 하게 된다. 방심은 금물인데,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연재 씨가 내 동생 같고,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아무리 전무님이 와이프랑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그건 아니잖아. 혹시? 연재 씨 때문에 전무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거나 그런 거야?”
나리의 가설 속 연재는 불행한 아내였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은 사랑하는 여자를 비서로 두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데렐라에서 신파로 바뀐 것이다. 이로써 류현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그럴 리가요.”
펄쩍 뛰기도 애매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도, 그렇다고 사실은 우리가 이런 사이에요. 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얼버무리는 꼴이 되었다. 거짓말은 참으로 힘들다.
“사실 그렇잖아. 전무님이 그냥 전무님도 아니고 이원푸드 후계자인데 보통 집안이랑 결혼하셨겠어? 집안끼리 엮어서 결혼했을 텐데,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하셔 놓고 아직도 연재 씨한테 미련 남은 거 아니냐고.”
곧 눈물이라도 찍어 누를 것처럼 안타까운 눈으로 나리가 이야기했다. 그야말로 신파를 찍어야 할 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려진 비련의 여자처럼 처연해야 하는.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관계이니 제발 이쯤에서 그 망상은 접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러다 정말 현조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파렴치한이 될 것 같았고, 그런 남자와 불장난을 저지르고 있는 여자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아, 미치겠다.
“연재 씨가 제일 힘들겠지. 사실이라도 어디 사실이라고 말할 수나 있겠어. 그런데 연재 씨 정말 조심해야 해. 그러다 소문 퍼지기 시작하면 끝이다?”
사내 연애도 아닌, 사내 불륜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연재 자신뿐만 아니라 현조의 앞날도 불 보듯 뻔했다.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런 말을 나리를 통해 듣고 있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금나리가 누구던가 이원푸드의 정보망 소문의 발원지. 모든 말은 금나리를 통해서 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필 눈치를 채도 금나리가 눈치를 챘다는 것이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리님,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어쩌다 보니 사정하는 투로 말하고 말았다. 연재는 아차 싶었다. 나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뭐야, 지금? 내가 없는 말 지어내서 연재 씨 모함이라도 하고 다닐까 봐 이러는 거야? 서운하다 정말. 난 그래도 연재 씨 걱정해서 해 준 말이었는데, 사람을 푼수 취급하네?”
연재는 혀를 깨물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 변명하자니 그 꼴도 우습고, 아무 말 안 하자니 인정하는 꼴이었다.
사면초가에 진퇴양난이었다.
“절대 아니죠. 그런 뜻 아닌 거 아니잖아요. 혹시라도 저 때문에 전무님 입장 난처해지실까 봐…….”
“와, 진짜 웃기네. 그러니까 지금 여전히 내 입이 문제가 될 거란 거잖아. 아니야?”
네! 맞습니다! 네 입에 지퍼라도 채우고 싶습니다!
소리치고 싶지만, 연재는 꾹 눌러 참았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참아야 한다.
연재는 조용히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꼬리 내려야 할 때를 아는 자, 화를 피하리라.
“뭐, 또 그렇게 풀 죽어서 그래. 내가 아무렴 연재 씨 입장 난처하게 만들겠어? 걱정하지 마. 정말이야.”
연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호소하듯이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대리님, 저랑 같이 꽃등심 어떠세요?”
“뭘 또, 오늘?”
나리는 입은 가볍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연재도 잘 알고 있다.
정말 말하고 싶었으면 소문부터 냈겠지. 이렇게 몰래 불러서 확인한다는 자체가 긍정의 신호이자, 나리의 배려다.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가 가장 좋아하는 꽃등심으로 배를 채워 확실하게 입막음할 생각이었다.
***
외부 일정을 나간 현조는 끝내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요.
“저,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김 회장에겐 이미 허락을 구한 사항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끊기 전에 보고했다. 그러나 상대편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전무님?”
- 질투 유발입니까?
“아니요.”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넘어간 모양이다. 연재가 씩씩 콧김을 내뿜었다.
- 누구랑?
“비서팀 금 대리님이랑요.”
- 그래요.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연재가 아차 싶어 다급하게 현조를 불렀다.
“전무님.”
- 애타게 부르면 가고 싶어지는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전화도 하지 마시고요. 꼭이요.”
이번에 오해 사게 되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미리 단속해야 한다.
- 그럼 더 가고 싶어지는데.
“제발요! 전화도 하지 마시고, 안 받는다고 찾아오셔도 안 돼요!”
웃음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연재는 간신히 전화를 끊고 책상 정리를 마쳤다. 나리에게 톡을 보내 놓고 마저 책상을 정리하고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