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8)

연재 씨가 잡은 뱀은 다 어디에 썼을까?

“지난번에 전무님이 연재랑 막, 어후. 키스 직전인 그런 분위기 있잖아. 막 눈에서 불꽃이 튀는 그런 거 말이야.”

“네에?”

“진짜라니까. 거기다가 두 사람 같이 출근하는 거 몇 번이나 내가 봤어. 엘리베이터 문 열리면 꼭 둘이 뭐 하다가 어색해하는 것처럼 막, 그랬어. 입이 막 간지러워 미치겠다. 서연재한테 직접 물어볼까?”

몸을 비틀어 가며 이야기하는 나리는 마치 제가 그 상황에 놓인 것처럼 설레발을 쳤다.

“이건 분명히.”

“분명히?”

“전무님이 사장님께 반항하는 거야. 밖에서 낳아온 아들 결혼으로 내몰았는데 그 아들이 이제 반기를 든 거 아니겠어?”

그럴싸했다. 듣고 있던 정욱이 어이없을 만큼.

의자를 일부러 소리 나게 빼낸 정욱이 먹지도 않은 음식을 내버려 두고 일어났다.

“어머, 실장님 안녕하세요.”

정욱을 본 나리와 지영이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금나리 씨.”

“네. 실장님.”

“근거 없는 소문은 자제하세요.”

안경 너머로 지그시 내리깐 정욱의 눈과 마주친 나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정욱이 유유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정욱은 잠시 고민했다. 어디까지 보고해야 할지.

퇴근길에 선화에게 조심스럽게 낮에 있었던 일을 흘렸다. 일과 중에 이야기하는 것은 일부러 피했다. 은밀하게 주고받는 것에서 끝내야 했으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느릿하고 우아한 김선화 사장의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정욱은 룸미러를 바라봤다. 선화는 무심한 얼굴로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급 세단은 정숙했고, 그 정숙함 위로 최소한의 볼륨으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 요란한 세상을 달리고 있지만, 분리된 공간은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정욱은 오늘 낮에 들었던 가십거리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현조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선화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선화는 지극히 단조롭고, 우아했으며,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화를 흔드는 존재가 현조였다. 유일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문은 늘 돌았잖니. 그런 시시콜콜한 가십 따위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평온한 듯 보였지만, 선화의 감정이 흐트러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이 동요할 때면 습관처럼 감각이 없는 다리를 손톱으로 꾹꾹 눌러 댔으니까.

벌써 10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화의 곁을 지킨 것은.

선화는 나이와 역행하는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런 선화를 볼 때마다 정욱은 생각했다.

서진의 미래라고.

“소문이 전부 허황된 것만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사장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느리게 눈을 감은 선화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런 말이 떠도는 자체가 현조가 방심했다는 증거니까요.”

눈을 감은 선화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죽은 딸, 서진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놓친 딸은 생각만 해도 서러운데, 어째서 너는, 벌써 행복해지려는 거니.

고작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여전히 눈을 감은 선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현조를 위해서라면.”

그 순간 선화의 손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구겨진 천 조각을 천천히 놓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정욱아.”

호칭이 달라졌다. 권 실장이 아닌 정욱이라 불렀다. 운전대를 잡은 정욱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예.”

어금니를 악물고 정욱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서진이 엄마로 묻고 있는 거야.”

정욱은 침묵으로 답했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을 살고 있는데,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

오랜만에 약속이 없는 주말이었다. 주말엔 역시 밀린 TV를 보면서 머리를 쉬는 것만큼 매력적인 휴식도 드물었다.

재방송 중인 드라마는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재미있습니까?”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현조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연재 뒤쪽에 서서 물었다. 흠칫 놀란 연재가 현조를 올려다봤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고, 피부도 수분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막 씻고 나온 상큼함이 물씬 풍겼다. 쓸데없이 심장이 두근대는 통에 TV로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

“심심해서요.”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뒤쪽에 서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현조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좀 슬픈 내용이라서 힘들어요.”

“흐음.”

그때였다. TV 화면 속, 술 취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소년의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남자였는데, 잇단 사업 실패로 술을 잔뜩 마시고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어, 안 되는데, 아들은 어떻게 살라고.”

안타까운 마음에 연재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주인공 소년이 자란 후 미래가 어떨지 끔찍했다.

연재는 현조가 뒤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만 세상에 남겨둔 채 끝내 숨을 거뒀다. 아들은 아버지의 물에 빠진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

“등 좀 빌릴게요.”

연재의 등에 현조의 등이 닿았다. 서로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은 자세가 되었다.

“재미없으세요? 다른 거 볼까요?”

말을 하면서도 연재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TV 속에서 오열하던 아들은 10년 후, 조직의 보스가 된 채 드라마는 끝났다. TV를 끄려다 광고가 나오는 대로 내버려 뒀다.

“재미는 없군요.”

등을 맞댄 그대로 현조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슬픈 내용이라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등을 맞대고 있던 현조가 자신의 머리로 콩, 연재의 머리를 박았다. 연재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취미생활 안 합니까?”

“취미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좋은 취미 있잖습니까.”

“주말에 텔레비전만 본다고 타박하시는 거예요?”

“등산, 잘하잖습니까.”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현조의 등은 경직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을 기대고 있으니 편안했다. 서로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대화에도 여유가 깃들었다.

“이제 산에 가도 뱀 찾기가 힘들어서요.”

“아직도 궁금합니다.”

“무엇이요?”

“연재 씨가 잡은 뱀은 다 어디에 썼을까?”

연재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저희 집에 인사 왔던 날, 드셨잖아요.”

등을 맞대고 있던 현조가 벌떡 몸을 세우더니 연재의 팔을 잡아 돌렸다.

“복분자 아니었습니까?”

“착즙해서 넣었어요.”

미관상 요즘은 그렇게 넣는다고 덧붙이자 현조가 피식 웃었다. 농담엔 농담으로 갚아 줄 차례였다.

“그거 부작용 있는 건 알고 있습니까?”

장난으로 시작했던 말에 진지하게 부작용을 논하자 이번엔 연재가 당황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현조가 젖은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쓸어 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체온이 정상 범위를 자꾸 넘어가는데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이 남자가 진짜. 연재가 현조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고개를 돌렸다. 현조가 연재의 턱을 손으로 쥐고 제 쪽으로 돌렸다.

“방으로 갈까요?”

연재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순간, 소년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심장에 뛴다.

그는 결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면서, 왜 마음은 머리처럼 계산하지 못하는 걸까.

‘저 사람은 나와 달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조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가슴속에서 쿵쿵, 울리고 있다.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남자는 평온한 얼굴로 태연하게 웃는다. 온도가 다르다는 사실이 이토록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선 안쪽에 확실하게 서 있고 오로지 자신만 선을 밟고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선을 넘을 것 같아서.

손을 내밀어 잡아당겨 주면 좋겠는데, 절대 그러지 않으리란 사실에 풋사과를 씹은 것처럼 시큼하고 텁텁했다.

오월의 정원은 장미로 가득했다. 얕은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그 향기에 취한 듯 정욱은 한곳에 시선을 붙박았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한옥 거실에서 펼쳐진 풍경이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행복하구나.’

잘도 행복하구나.

붉은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그렇게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다면, 저들처럼 행복했을 사람이었다. 얼어붙은 가슴속 깊이 박혀버린 한 사람이 시리도록 그립다.

붉디붉은 꽃송이를 쓰다듬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꽃이 뭉개졌다. 함부로 뭉개진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빨간 분노가 손바닥을 적셨다.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욱은 말없이 돌아섰다. 주차장에 되돌아온 정욱은 차체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봤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류현조는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죄책감은 벗어던진 것일까? 그게 가능한 것이었나?

“네겐 고작 그만큼이었단 뜻이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웃고, 떠들고, 행복한 것이었나.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

현조는 그 일을 모두 잊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너는, 잊을 수 있구나.”

그 잔인했던 날, 붉은 장미꽃 같던 선혈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오래 참았었나.

그렇게 없던 일로 넘겨 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이제 시작이야.”

피우던 담배를 미련 없이 던졌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려 김 회장의 방을 찾았다. 김 회장은 최근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현조는 그런 김 회장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봤다.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인자하게 살아온 그의 성정만큼이나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었다.

독한 약을 매일 한 주먹씩 삼키며 고통을 참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통증은 좀 어떠세요.”

무거운 입을 열었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함부로 묻기조차 버거웠다.

“그만 때가 왔으면 싶다가도, 네 생각하면 하루라도 더 버티는 게 맞는 것 같다만.”

덤덤한 목소리로 체념을 이야기하는 김 회장의 말이 가슴에 박혀 왔다. 그런 김 회장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차마 더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현조에게 이번엔 김 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연재는 알고 있는 거냐?”

“무슨 말씀이세요.”

“네놈이 이 할애비 속여서 결혼한 사실 알고 있느냐고.”

현조는 김 회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결혼의 목적이자 유일하게 속이고자 했던 김 회장이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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