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날 이해하고 싶습니까?
“왜 나만 몰라야 했는데요? 술 마신 이유도 모르고 울고 있는 당신을 위로해 주려 했던 내가 바보였던 건가요? 왜 술 마셨는데요? 왜 울었는데요?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움찔, 연재는 몸을 떨었다. 어느 순간 다가온 손이 볼에 닿았다.
“나도 잘 모르겠군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는 손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다만 그가 내뱉은 말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모른다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란 말인가.
“……뭘 모른다는 거죠?”
당신 마음을 당신이 모르면 누가 당신을 내게 설명할 수 있는데.
“피한 건 사실입니다.”
“왜죠? 그날 밤이 그렇게.”
차마 싫었느냐고 묻지 못했다.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 정말 이기적이구나.”
움찔, 이번엔 볼에 닿은 현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이란 게 있습니다.”
“나를 그렇게 단정 짓지 말아요.”
“당신이 나를 알면 어떻게 달라질지 나는 알 것 같거든.”
분명하게 그어 놓은 선을 알고 있다. 가급적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지금 깨달았다. 그가 그어 놓은 자리와 내가 알고 있던 선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선을 넘게 한 건 당신이었어요. 그래놓고 이제 와 더 멀어지라고 말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죠?”
이 여자의 말이 아프다는 것은, 모두 맞는 말이란 뜻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내가 김선화 사장의 아들이 아니라면.”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너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맞다. 구차하게 이해를 바라긴 싫었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그럼에도 너는 다르지 않을까? 혹시 하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류태준 부사장의 아들도 아닙니다.”
극명하게 흔들리는 연재의 눈동자는 예상했던 반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현조는 쓰게 웃었다.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절대.
“아직도 날 이해하고 싶습니까?”
“…….”
말을 잃은 연재가 두렵다. 고작 이 사실 하나로 네 입을 막아버리는데. 고작 이것 하나로도 네가 흔들리는데.
흔들리지 마. 네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는 내가 어지러워.
침묵이 목을 졸랐다.
“해 봐요. 최선을 다해서.”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은 곧 떠나게 될 네게 혼란만 안겨주겠지.
“이 정도가 나의 사소한 일부입니다.”
그러니 어설픈 이해를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어느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 여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길 바랐다. 그럼 못 이긴 척, 이쯤에서 적당히 포장해서 가련한 남자로 이 여자의 품에 파고들 수 있을 테니까.
다시 그 밤처럼, 뜨겁게 이 여자를 안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저더러 전무님을 동정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자의 한마디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연재의 말처럼 이해가 아닌 동정을 바란 것이었나.
“동정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동정하기 싫어요.”
싫다는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토해 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에 연재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식은 역시, 비겁했다.
“매력 없어요. 전무님.”
하지만 피하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연재를 보면 이제 몸이 먼저 반응했으니까.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줌으로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벽 치지 마세요.”
입술을 앙다문 연재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하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없어 화날 만큼.
“전 잘생긴 남자보다, 매력 있는 남자가 더 좋거든요.”
도전적인 눈빛으로 도발해 오는 연재를 보자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욕망이 되살아났다. 저 발칙한 입술을 당장이라도 삼켜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었다.
“난, 분명. 경고했습니다.”
“도망치신 것 같은데요.”
“도망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인데.”
“제가 왜요?”
당돌한 눈빛이 투명하게 맞부딪쳐온다. 현조의 입가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느른하고 집요하게 그의 눈이 연재의 입술을 더듬었다.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내게 잡아먹힐까 봐.”
단박에 연재를 끌어와 벽에 밀어붙였다. 입술을 가져다 대는 순간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함이 밀려왔다. 이 감촉을 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얼굴을 보면 어느새 시선이 입술에 닿았고, 뒤돌아서면 하얀 목덜미만 보였다.
이토록 짐승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룻밤은 그토록 강렬했고, 신체의 구조를 바꿔 놓은 것처럼 맹렬하게 이 몸을 원했다.
그래서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지우려 했다. 잊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몸에 손대지 않고, 이 몸을 탐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아, 하아.”
코끝을 서로 맞댄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어쩌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엉망으로 흐트러진 연재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겹쳐 안고 심장을 맞댄 채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예뻐 보이는 거라고, 술에 취해서 감정적으로 동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 했다.
“이제 도망칠 기회를 잃은 것 같은데.”
새까만 눈동자가 두려움에 흔들렸다. 이 작은 도발에도 떨고 있으면서 가증스럽게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다가오면.
“우리 사이는 이래서는 안 되잖아?”
마음이 없는 관계. 주변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 그런 가짜부부.
헌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면, 이 여자를 결국 나락으로 빠트리게 될 것만 같았다. 텀을 두고 감정을 정리하고,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멀리하려 했다.
죄 없는 서연재를 상대로 결핍을 채우고, 위로를 구하는 어리석은 짓은 더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건.”
“나는 이제 모르겠는데.”
이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가짜’인 것이 맞는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진짜’인 것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대로?”
‘진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하나.
“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이 겁 없이 떨고 있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진짜’여서는 안 된다는 것.
“상관없다라…….”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두 사람 사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무겁고 탁하고 뜨거운 열망이 소리도 없이 둘 사이에 끓고 있었다.
“결혼도 했고…….”
고개 숙인 너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게 또 화가 나서. 연재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억지로 마주친 연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을 잡아채고 옭아맸다.
심장을 누군가 쑤시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그게 내겐 방패막이도, 이유도 될 수 없습니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젖은 눈동자가 애처롭게 반짝거린다. 젖은 눈을 핥고 싶은 욕망이 불처럼 일어났다.
“왜죠?”
“내 마음이 내 것이어서는 안 되니까.”
한없이 깊어진 검은 눈동자가 먹을 갈아 놓은 것처럼 짙어졌다. 조명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서서히 점멸하는 불빛처럼 현조의 뜨거운 시선이 식어 갔다.
***
‘먼저 가도록 해요.’
현조의 말에 괜찮은 척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연재는 여전히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비밀결혼, 연극, 잘못된 시작. 그의 말처럼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무라도 상관없다면, 현조여도 괜찮다 생각했다.
그런 가벼운 생각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다.
모친의 성화와 점쟁이의 말보다, 관계를 가볍게 대한 자신이 더 나빴던 것은 아닐까.
“알고 있었잖아.”
끝을 정해 놓고 시작한 비밀결혼이었으니까.
현조는 좋아하면 안 될 것처럼 이야기했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충동적으로 넘어버린 선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연준이 보냈어. 아까 너, 할 말 있었지? 시간 되면 전화해.]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 있어?
연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랐다.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진희는 오래 알던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연준과 연애하는 모습은 조금 낯설기도 했다.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연락했던 거야.”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속을 가라앉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진희의 힘이었다.
- 생각은 좀 정리됐어?
고개를 저었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말해 봐.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아, 하고 입을 벌렸다가 맥없이 닫았다. 도저히 이 관계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좋아해, 하지만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
- 너랑 현조 씨 말하는 거야?
서로 필요한 것을 얻고자 연극을 약속한 관계. 그 얼마나 불순했단 말인가.
- 그럼 조금만 기다려 보는 건 어때? 마음을 열 때까지.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주차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
“아직 퇴근 안 했어?”
목소리의 근원을 향해 현조가 고개를 들었다. 정욱이 전무실 문가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요즘 왜 그렇게 열심인데.”
“일이 많아서.”
정욱이 현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번 주 내내 현조는 늦게까지 남아 있었고, 연재는 늘 자리에 없었다.
전무가 야근 중이면 비서 역시 야근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연재는 없었다.
“연재 씨는?”
“일 못 하는 거 티 내기 싫어서 먼저 보냈지.”
“싸웠어?”
현조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싸움이라니, 듣고 보니 싸운 것도 맞다 싶다.
“그런가.”
“부부싸움이라.”
부러 말꼬리를 늘이는 정욱을 흘깃 쳐다봤다. 오늘만 벌써 ‘부부’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들었다. 결혼했지만 정작 부부라고 인식할 틈도 없었는데, 싸우고 나서야 ‘부부’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사이라니. 우습다.
“그래서 무슨 문제로 싸웠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정욱이 물었다.
“술 한잔 사 주면. 아니다.”
술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얼른 주워 담았다. 최근 술을 너무 자주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신 날은 어김없이 사고를 쳤다. 돌아보니 술만 들어가면 연재에게 들이댄 꼴이다. 연재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왜? 한잔 사 줄 테니 같이 가.”
“술 마시면 요즘 사고를 쳐서 안 돼.”
정욱의 웃음소리가 여지없이 날아왔다. 그래 웃어라, 나도 내 꼴이 우스우니까.
“무슨 사곤데 그래? 술 먹고 실수라도 했어?”
예뻐 보여서, 술 마시면 이상하게 그 여자가 예뻐 보인다. 포토샵을 발라 놔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을 것 같은데. 문제는 이제 술에 취하지 않아도 예뻐 보인다는 것이었다.
진짜, 홀린 건가?
“예뻐서.”
“뭐?”
“문제야.”
정욱은 순간 현조를 노려봤다.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예쁘다는 말을 어색하게 던지는 류현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