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다 해 줄 것처럼
비서 데스크가 있는 반대면은 유리 벽이었는데, 그마저도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었다. 완벽한 차단이었다.
처음으로 주간 일정 보고를 서면으로 끝냈다. 늘 대면으로 직접 보고를 했고, 요약한 자료는 따로 올렸었다.
그로부터 1시간 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현조가 집무실에서 나왔다.
“다녀오세요. 전무님.”
얼굴을 보면 장난부터 치던 사람이 비서 데스크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지나갔다. 기분이 이상하다 못해 마음마저 상하는 순간이었다.
일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자리에 앉아 미친 듯이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집중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키보드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손가락에 한참 심취했다.
“연재, 점심 먹으러 안가?”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나리가 빼꼼히 쳐다보고 있다.
“전무님 회의 끝나시고 외부로 식사하러 나가셨단 연락 못 받았어?”
깨달았다. 이 남자, 피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막 양치까지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현조와 마주쳤다.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꼭, 못 볼 것을 본 듯한 표정을 보자 자괴감이 밀려왔다.
“전무님, 식사는 하셨어요?”
복도는 고요했다. 임원진만 사용하는 층이라 이사급 이상만 사용했고, 그들의 비서들만 오가는 층이었다. 다른 임원은 보이지 않았다. 현조만 먼저 빠져나온 것인지 혼자였다.
그런데 이 남자, 대답 대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얼굴에 뭐가 묻었나?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을 땐 분명 완벽했는데. 내내 피하는 것 같던 사람이 이젠 대놓고 쳐다보기만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기분이다.
“전무님?”
단순히 기분이 나쁜 건가?
사람 숨 막히도록 쳐다보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순간마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대체 피하던 사람은 어디 가고 이토록 이글대는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이 남자 때문에 배에서 신호가 왔다. 과민한 대장이 경고를 보냈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고였다.
“어? 연재 씨.”
서서히 압박해 오는 대장으로 진땀을 흘리는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재는 그 틈을 타 현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손에 양치 컵을 든 채 나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리님 양치하시려고요?”
“어머! 전무님, 안녕하세요.”
마치 이제야 전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나리가 다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 민 전무님 비서 금나리입니다.”
“그래요. 난, 지나가던 길이라서 그럼.”
현조가 가볍게 고갯짓하고는 곧 총괄사업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현조의 등을 한참 바라보던 연재에게 나리가 물었다.
“연재, 혼났어?”
“네?”
“보니까 계속 노려보고 계시던데 혼나는 거 아니었어?”
아, 혼나는 게 아니라 죽는 줄 알았어요. 대꾸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면 뭐야? 설마?”
나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꼭 특종을 잡은 기자 같았다.
“혼났어요.”
재빨리 나리의 상상력을 잘라 냈다.
“뭐 때문에?”
집요하게 물어 오는 나리를 보면서 연재는 또다시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아, 오늘 일진이 왜 이러지. 사방이 적인 것 같아.
“아뇨, 뭐. 커피가 너무 맛이 없다고…….”
“엥? 농담 하나도 안 웃기거든? 서연재 내 밑에서 2년 있었던 거 잊었어?”
아차, 그랬지.
“하하하. 그렇죠? 아, 대리님 이빨 썩겠어요. 얼른 닦으세요.”
“흐응. 그래, 일 봐.”
콧소리를 섞어 가며 대답한 나리가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아, 두 번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도망치듯 화장실 앞을 벗어났다.
속이고 살지 말자, 나쁜 짓 하고 살지 말자.
이번만, 이 결혼이 끝나면 착하게 살 거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
퇴근 시간이 되자 인터폰이 울렸다.
- 당분간 퇴근 시간 되면 먼저 퇴근해요. 난 늦을 것 같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는 고작 하루였으니까.
그 하루가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네, 전무님.”
대답은 했지만,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돌덩이가 더욱 무거워진 느낌이다.
한 주 내내 현조는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더 간결해질 수 없을 만큼 부딪침은 최소한으로 줄었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집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하, 정말 사람을 이런 식으로.”
현조가 다시 서재에서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답답함이 쌓여 갔다. 진희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묻고 싶었다.
그래, 물어보자. 퇴근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연재는 진희에게 전활 걸었다.
- 연재, 마침 잘됐다. 지금 시간 돼?
베스트 프랜드는 달랐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먼저 반겼다. 당장 만날 약속을 잡은 연재는 진희 오피스텔 1층 카페로 차를 몰았다.
카페에 도착한 연재는 단숨에 사태를 파악했다.
“뭐가 문젠데 대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카페에는 진희 혼자가 아니었다. 연준도 함께 있었는데, 사랑싸움 중이었다.
“스킨십 하면서 일일이 허락 맡아? 사귀는 사이에 그 정도도 안 돼?”
연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용을 들어 보니 연준이 스킨십을 시도했고, 진희는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온 연준에게 화가 난 듯했다. 그러다 말다툼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연재야!”
“누나!”
어째 전화 걸자마자 카페로 와 달라고 하더라니.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여 가게 생겼다.
“한 명씩 해.”
“누나 너 결혼했으니까 알 거 아냐. 매형이 손잡을 때 허락 맡고 잡아?”
“연재는 이미 결혼했잖아. 우리랑 좀 다르지.”
“우리도 결혼만 안 했지 알고 지낸 세월은 엄청 길다는 거 잊었어?”
“그게 그거랑 같아? 사귀자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질문을 던져놓고 두 사람은 그 후로 20분을 더 언쟁을 벌였다. 연재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일 꾹 눌렀다.
“두 사람, 계속 싸울 거야?”
“그래 매형은 어떤데?”
연준이 재차 물었고, 진희도 궁금한지 눈을 초롱초롱했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스킨십은 부부 사이라도 안 되지.”
“거봐! 너 아무 데서나 막 키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내던 진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도로 앉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매형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소심하네. 미인계로 누나 홀렸다더니 순, 뻥이구만.”
“미인계?”
“자신감 엄청 나더니 실체는 손잡을 때도 허락 맡고 잡는 거 아냐. 시시하게.”
“손은 아니지!”
순간 욱해서 헛소리가 튀어 나갔다.
“역시 매형은 다르구나?”
“까불지?”
“그래서 누나 너는 이 시간에 왜 우리 진희 찾아온 건데?”
‘우리 진희?’ 이게 진짜 전생에 닭이었나 보다. 방금까지 싸웠던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거리며 붙어 앉는다. 그런 연준을 황당하게 노려보는데, 눈으로 말하는 것 같다. 데이트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간다, 가!”
“눈치는 빨라서.”
“연재 가려고?”
“응, 가 봐야 할 것 같아. 서연준이 화나게 하면 말해, 때려 줄 테니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왔다. 막 운전석을 열려는 순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연준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매형이랑 싸운 거야?”
연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진희 기분 풀어 줘.”
“누나 얼굴 평소보다 더 못생겨졌는데.”
이게 그냥, 걱정도 얄밉게 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갈 거야.”
운전석을 열고 시트에 앉았다. 닫으려는 문을 연준이 붙잡았다. 이 익숙한 느낌, 연재는 피식 웃었다.
“웃으니까 좀 낫네. 운전 막 하지 말고.”
연준이 운전석을 닫자, 연재가 차창을 내리고 시동을 걸었다. 손을 흔들어준 연재는 곧 창문을 올리고 미소를 지웠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돌덩이가 여전히 가슴을 짓눌렀다. 일주일 내내 체한 기분이었다. 정작 음식은 평소 먹는 양의 절반 수준인데 늘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두통도 잦았다. 한 주 동안 먹은 소화제와 두통약이 꽤 됐다.
“이건 정말 아니야.”
류현조의 심리를 도무지 모르겠다. 웃고, 농담하고,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더니 이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적인 말이라도 한마디 붙일라치면 칼처럼 잘라 냈다. 꼭,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렇게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자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다정한 척했으면서.’
그래, 그 ‘척’이 문제였나. 진짜가 아닌 가짜니까. 고작 연극이었으니까.
“사기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지, 부부간의 의리는 집어치우고라도 하다못해 상도덕이란 것도 있는데. 뭐가 문젠지. 말은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연재는 결국 차를 돌렸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며칠을 참았던 탓에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현조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싫었다. 회사로 돌아온 연재는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서는 대꾸조차 없었다.
“그냥 확.”
열어 버리겠어! 손잡이를 잡은 순간 문이 열렸다. 갑자기 나타난 얼굴에 놀란 연재와 달리 현조는 예상했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할 말 있습니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기만 평온한 세상에 살았던 건가.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있어요.”
“해요, 듣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서서? 문틀을 사이에 두고? 그러나 현조는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더니 팔짱을 끼고 문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느긋하다 이거지.
“제가, 실수했나요?”
“그럴 리가요.”
“왜 계속 피하세요?”
현조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자 아주 조금 막혔던 속이 뚫리는 것 같다. 아직 멀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이라도 해 주셔야죠. 그렇게 아무 말 안 하시면 전 답답해 죽어요.”
흥분하면 말이 조금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연준과 다투며 생긴 내성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구겼던 미간이 펴졌을 뿐, 대꾸하지 않는다.
더, 화가 치솟았다.
“진짜 계속 그렇게 묵비권 행사하실 거예요? 이럴 거면 왜 결혼하자고 했는데요? 정말 할아버님 말고는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혼자 어떤 상처를 받든,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을 느끼든 그건 다 저만 감수해야 하는 문제냐고요!”
말하다 보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닥닥 긁어모은 억울함이 호소했다. 넌 그냥 희생양일 뿐이라고. 답답함이 더욱 가중됐다. 숨이 막히다 못해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금 화내는 모습이 얼마나 추할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너무도 태평했다. 강 건너에 난 불을 구경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