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비가
정욱에게 부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석 달 전쯤 부탁한 일이었고, 하필이면 오늘 그 소식을 전하러 온 모양이었다.
“이런 말 하기 정말 미안하다.”
“…….”
차라리 세상에 없는 사람이길 바라며 원망했던 때도 있었다.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리운 날이면 그렇게 화풀이를 하듯 원망했었다.
그런데.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현실이 될 줄은 차마 몰랐다.
현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만나지 못한 지 30년이나 된 모친의 얼굴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래도 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핏줄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늘이 장례식 마지막 날이라는데…….”
정욱이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현조가 그것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장례식장과 주소가 적힌 종이가 현조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유가족이 없다고 하더라. 혼자 사신 듯해.”
빌어먹을 날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현조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눈을 감았다.
정욱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내려서 집무실로 향하던 연재는 안에서 나오던 정욱과 마주쳤다. 금세 지워졌지만, 정욱의 굳어 있던 얼굴을 연재는 보고 말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요. 연재 씨 차는 다음에 마실게요.”
“네. 실장님.”
“그리고 전무님도 지금은 혼자 계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정욱의 몸에 가려진 문 안쪽을 연재는 볼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옆으로 비켜섰다.
그 자리에 서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정욱의 등을 바라봤다.
정욱이 가고 난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집무실 문은 닫힌 채 조용했다.
유난히 고요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쯤 집무실 문이 열리고 현조가 나왔다. 무언가 혼란스러운 사람처럼 현조는 약간 허둥댔다. 그러더니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연재 씨. 오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약속을 미룬다는 말에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현조의 얼굴이 지나치게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는 건가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건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현조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빛이 짙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변화들을 연재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조금 늦을 겁니다. 오늘은 먼저 자도록 해요.”
현조가 돌아섰고, 그가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
하늘이 흐렸다. 꼭, 비가 올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한옥 주차장에 차를 세운 연재는 안채로 먼저 향했다. 어쩐 일인지 안채 마루에 김 실장이 앉아 있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모습에 연재는 잠시 의아했다.
언제나 딱딱하다 싶을 만큼 예의를 갖추고 서 있던 김 실장이었기에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 몹시도 낯설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그러다 연재를 발견한 김 실장이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 안에 계시죠?”
“예.”
“잠깐 뵙고 싶어서요.”
연재의 말에 김 실장이 마루로 올라섰다. 창호지를 바른 문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김 실장의 보고에 안쪽에서 곧 인기척이 들렸다. 연재가 김 실장에게 인사를 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김 회장은 홀로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눈을 감고 있던 김 회장이 그제야 눈을 떴다. 고독을 담은 먹빛의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왔구나. 오늘도 수고했다. 앉아.”
혼자 오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 현조의 행방이었다.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같은. 그러나 오늘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혼자 보내더냐?”
“……네.”
예상했다는 듯이 김 회장은 다시 눈을 감았다가 한참 후에야 떴다. 그러는 사이 상념은 더욱 깊어진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약속 있다고 하셨어요. 너무 늦어지면 제가 연락해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러자꾸나.”
이제는 현조만큼이나 가까워진 사람이 김 회장이었다. 노인의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이 안타까울 만큼 가깝다 느꼈다. 하지만, 김 회장 역시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
전화는 신호만 갈 뿐이었다. 벽시계는 벌써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화는 왜 안 받는 건지.”
안방 침대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이 집에 처음 온 날이 떠올랐다. 엄청나게 큰 침대는 지나치게 넓고 추웠다.
하지만 현조가 같은 방,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달랐다.
끝과 끝에 누워있어서 닿지도 않았지만 포근하게 잠들었다.
“언제부터 둘이었다고, 새삼스럽게.”
허탈하게 웃는데 정욱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차마 전화를 거는 것이 민망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기엔 마음이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연락처에서 정욱의 번호를 찾아 눌렀지만, 망설이다 전화를 거는 것은 포기했다. 만약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기다리는 것이 맞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방안을 서성이다 답답한 마음에 마루로 나왔다. 새벽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종일 흐리던 하늘에는 새카만 어둠만 가득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연재는 재빨리 휴대전화 액정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전무님?”
- 전무님? 부부 사이 애칭치고는 참, 사무적이네.
현조가 아니었다. 연재는 잠시 수화기 너머의 대상을 고민했다. 누군데 이렇게 거침없단 말인가. 남의 전화를 가지고 전활 걸었으면 누군지 먼저 밝혀야지.
“누구세요?”
- 이 자식 친구.
이 파워당당 막말,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도 남았다. 기도하, 단골 술집 사장님.
- 전무님, 이것도 직업병인가? 아무튼, 지금 올 수 있어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알죠? 내 가게.
연재는 두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차 키를 챙겼다. 신발을 막 꿰어 신는데 기어이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가느다란 보슬비는 끈덕지게 앞 유리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서 와이퍼를 작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도하의 가게 앞에 도착했다. 현조의 자동차가 가게 앞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을 확인한 연재는 가게로 들어갔다.
“빨리 왔네.”
“현조 씨는 어디에 있나요?”
“저기, 구석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면서 도하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가게 구석 자리였다. 연재가 서둘러 현조를 향해 걸어갔다.
“현조 씨, 현조 씨?”
기절한 듯 벽에 머리를 기댄 현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빈 양주병이었다. 현조의 주량으로 예측하건대 치사량을 마신 것과 같았다.
연재는 걱정돼서 현조의 팔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죽지는 않았을 거야. 올해는 좀 지나치게 마시긴 했지만, 뭐 그럴 만했고.”
이 지경이 되도록 해마다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쓸데없는 술자리를 피하고자 도하의 연락은 잘 받지도 않으면서 어쩌자고 이렇게 마신 걸까. 걱정으로 가득한 연재의 얼굴이 흐려졌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오늘 같은 날은 술이라도 마셔야 살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몇 시간 사이에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형용할 수 없는 연민으로 쓰라렸다.
“오늘, 무슨 날이죠?”
“그 자식 진짜 고아 된 날.”
충격적인 말에 연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미 담배를 꺼내 피우고 있던 도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장난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나머지는 그 자식 일어나면 들어요.”
고아가 됐다는 것은 오늘이 부모님의 기일을 뜻하는 거겠지. 연재는 현조가 가엽다는 생각과 함께 오늘 하려던 말이 고아가 된 사정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차까지 들어다 줄 테니까. 그만 가요.”
연재는 그제야 가게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벌써 손님이 빠질 시간은 아닐 텐데.
“다른 손님은…….”
“아프잖아, 저 자식. 하루 장사 안 한다고 망하지도 않고.”
대충 대답한 도하가 취해서 고꾸라진 현조를 가볍게 부축해 일으켰다.
“이 새끼 그쪽 전화는 죽어라 피하더니, 꼬꾸라지기 직전엔 그쪽만 찾던데?”
방금까지 괜찮은 사람일 거란 생각은 다시 수그러들었다. 거칠고 투박한 말투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꾸, 그쪽, 그쪽 하는 건 좀.
“저, 그쪽이 아니라 서연재입니다.”
“이름은 나도 알고.”
현조를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도하가 연재를 돌아봤다.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가.”
“그럼, 차라리 제수씨라는 호칭을.”
“아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전화기 좀 챙기지?”
아 씨, 알아들은 거 아니었어?
***
침대까지 겨우 옮겼다. 다행히 집 앞에 도착할 때쯤 현조가 정신이 돌아왔지만, 몸을 가누지는 못했다. 산 만 한 덩치를 거의 반은 업다시피 해서 간신히 옮겼다.
현조는 고개를 숙인 채 침대에 걸터앉았고, 연재는 지쳐서 목이 탔다.
“하아, 하아. 잠깐,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양말이든 외투든 일단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손목이 잡혀 몸이 끌려갔다. 당겨진 몸은 그대로 현조의 다리 위에 안겼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연재는 숨을 멈췄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연재는 한참 뒤에야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이런 말 되도록 안 하려고 했는데 술버릇 되게 나쁜 거 아세요?”
저번에도 술 마시고 끌어안아 놓고.
“좀, 놔주세요. 누구 때문에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지금 물 못 마시면 목이 타들어 갈 것…….”
툭.
따뜻한 물방울이 연재의 뺨에 떨어졌다.
연재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후드득.
뜨거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