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고 고운 나쁜 손
“밖에서 소리 안 들렸습니까?”
가운을 걸친 현조가 머리를 털면서 나왔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정작 태연할 수 없는 것은 연재였다.
“아, 저. 그게, 현조 씨가 그 시간에 일어나 씻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원래는 자신보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같은 침대를 사용하고부터 부쩍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고 있었다. 첫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귀마개만 안 했어도 실수할 일은 없었을 텐데, 눈만 제대로 뜨고 들어갔어도……. 변명이 구차해서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귀가 무척 밝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보통사람보다 귀가 밝으면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못들을 수 있냐는 뜻이었다.
“역시, 그거였습니까?”
“그거라고 하시면……?”
알면서 뭘 묻느냐는 듯이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든 현조가 눈을 내리깔았다.
“보고 싶으면 말해요. 각오는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저 오만하게 반짝이는 눈빛은 훔쳐보는 취미를 가진 변태를 보는 눈빛이었다.
“오, 오해, 오해십니다!”
활활 타오르는 홍당무가 된 연재가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현조의 얼굴도 그제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빈속에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쓰린 나머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연재가 옆에서 자고 있었고, 언제 손을 뻗은 것인지 손가락 사이에 연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 때문에.’
제어가 안 됐다. 함께 잔 첫날도 내내 잠을 못 이룬 채 밤새 연재의 머리카락만 쓰다듬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도 무의식중에 연재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현조 자신이었다.
그렇게 몰래 만지다 걸리면 한순간에 짐승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무엇보다 참을 수 있다고 장담해 놓고.
현조는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머리카락 패티시였나…….’
연재가 깨기 전에 도망치듯 새벽부터 샤워한 것이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연재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한참 마무리 단계로 머리를 감고 있었다.
소중한 알몸을 그렇게 연재에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여 주고 말았다.
“뭐, 이 정도면 훌륭하지.”
봐도 무방해. 절대 꿀리지 않아. 정신승리를 위해 열심히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다.
***
김 회장은 검진 예약 때문에 아침도 걸렀다. 식사 후 산책하던 것도 역시나 걸렀다. 누워 있다는 김 회장의 안색을 살필 겸 안채에 간 연재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몇 마디 주고받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방에서 나와 잠깐 정원을 서성이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주차장에 서 있는 현조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 기억을 삭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책은 잘했습니까?”
말끝에 분명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것 같은데.
“요즘 일찍 출근하시네요.”
항상 현조보다 1시간 먼저 출근했었다. 하지만 결혼 후 현조는 늘 자신과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섰다.
“그럼 출근 잘해요.”
고작 인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네.”
대답하고 돌아서서 운전석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불쑥 현조의 팔이 튀어나와 운전석 문을 짚었다. 가로지른 팔 때문에 문을 열 수 없었다. 한숨을 팍,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 더 있으세요?”
“아침에.”
송곳 같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연재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잊어가는데 왜 또 이야길 꺼내고 난리야. 고개를 슬며시 모로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씨가 참 좋죠? 하늘이 깨끗.”
“어디까지 봤어요?”
댕강, 무를 썰 듯이 말이 싹둑 잘려나갔다.
그의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던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신체를 어디까지 보여 줬는지 고민하다 결국 물어보는 것을 택한 모양이다.
“그거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그 짧은 찰나에 봤으면 뭘 얼마나 자세히 봤다고. 솔직히 떡 벌어진 어깨랑 등 근육이 환상이었지. 거기다 아래로…….
“뭘 상상하는 겁니까?”
상상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앞, 뒤. 그것만 말해요.”
현조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그쳤다.
아침 먹은 후, 내내 고민했다. 머리 감던 중이었으니 뒤돌아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놀라서 몸을 돌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앞인지 뒤인지 생각하다 보니 억울하기도 했다.
“그게…….”
꼴깍. 연재가 침을 삼켰다. 눈을 데구르르 굴리면서 대답은 못 하는 것이 확실했다.
“앞이구나…….”
***
큰일을 겪은 현조는 제법 의연했다. 연재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려서 집무실을 노크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들어가 책상 앞에 섰다.
“전무님, 커피 드세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연재가 입을 열었다. 현조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 일정은?”
“9시 40분 임원 회의가 있습니다. 11시 창원기획 김 팀장님께서 1분기 영업성적과 하반기 홍보 영상 제작에 관한 보고가 있을 예정입니다. 소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권정욱 실장과 마케팅기획부 민중범 전무께서 참석할 예정입니다.”
한 템포 쉬고 오후 일정을 이야기하려던 연재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뭔가 의식적으로 현조가 시선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태연한 척했지만, 평소처럼 의연하긴 힘든 모양이었다.
“14시에 SJ대학병원 정기 검진 예약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후 일정은 없습니다.”
그제야 현조가 고개를 돌리더니 연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건강검진이 오늘이었나?”
“그렇습니다.”
현조의 외조부 검진일이었다. 1년에 한 번이던 정기 검진은 조금씩 그 기간이 짧아졌다. 6개월로 당겨지더니 지금은 3개월로 당겨졌다.
검진일에는 항상 현조가 함께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고마워.”
현조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언제부터 알아차리게 된 건지 정확하진 않다. 가끔 이렇게 잔잔한 미소를 짓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조의 미소는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서글픔이 묻어났다.
***
병원에 도착해서 김 회장이 검진을 받는 내내 현조는 꼼짝도 하지 않고 대기했다. 드러낼 수 없는 불안을 속에 눌러가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불안한 마음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저주다. 너는.’
치가 떨리는 저주라 했던가. 선화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의 말처럼 이 집안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원하지 않는 죽음을 묵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니?’
“괜찮으세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연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연재의 눈이 향한 곳은 제 주먹 쥔 손이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의식조차 없었다.
“검사 끝났어요. 병실로 올라가시면 된다고 하셨어요.”
“갑시다.”
가볍게 손을 털고 일어선 현조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걸어갔다.
VIP 병실에 도착하자 김 회장은 검사 후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착잡한 마음은 불안을 불러왔다. 현조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고 의사와 몇 마디 나눈 현조는 곧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술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마지막 말은 모든 희망을 꺾어 놓았다.
‘저주다. 너는.’
10년 전 그 말이, 귓가에 끊임없이 울렸다. 김 회장의 암이 재발했다. 암 덩어리는 이제 온몸에 퍼졌고 더는 가망이 없었다.
“류 전무님?”
멍한 채 넋을 놓아 버렸다. 의사가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현조는 정신을 차렸다.
“항암치료를 거부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본인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되도록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해 주세요.”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장기 곳곳으로 퍼진 암세포는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의사는 곧 병실에서 나갔다. 김 회장이 잠들어 있는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조는 망연자실한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
병원에서 돌아온 후 현조의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마루에 앉아 한곳을 바라보는 현조의 시선을 쫓았다. 시선의 끝에 걸린 것은 목련이었다. 언제 핀 것인지 하얀 목련이 아이 주먹만큼 탐스럽게 피었다.
순백의 꽃잎에 무슨 근심이 있겠냐 만은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한없이 처량했다.
“저랑 같이 마루에서 맥주 한잔하실래요?”
다정하게 다가온 연재가 물었다.
“그래.”
연재는 안주를 간단히 준비하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현조가 앉아 있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쟁반을 내려놓았다.
처음 이 집에 온 날도 그랬지만, 이 마루에 앉아 하늘과 바람을 벗 삼아 마시는 술맛은 참 좋았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별이 바람에 스치는 밤이었다.
초승달이 걸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연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하늘이 잘 보여서 좋아요.”
처마 끝을 따라 휘어진 곡선 끝에서 만나는 하늘이 멋들어졌다. 진희의 고층 오피스텔에서 내려다보는 세상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고층에서 바라보면 하늘을 등지는 느낌이라면, 이 한옥에서는 하늘도 아늑했다. 꼭 밤의 품에 안긴 것처럼. 달과 별이 새겨진 이불을 덮은 것처럼.
“나는 이 연극을 되도록 오래 하고 싶었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달콤함 대신, 슬픔이 묻어 있었다. 연재는 오늘 건강검진 결과가 어땠는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재가 고개를 돌려 현조를 바라봤다.
바라보던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식당한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물론 서연재라는 여자에게 느끼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잃고 싶지도 않았고.”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현조의 눈빛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나는 이 연극이 영원히 끝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너무 아픈 말이었다. 그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뼛속까지 와닿았다.
연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루를 짚고 있는 현조의 왼손 손등을 제 오른손으로 덮었다.
“저도…….”
이 연극이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하려던 연재는 숨을 죽였다. 어떤 말로도 그의 처참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보이지 않는 그의 눈물을 봐 버린 것 같아서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하군요. 손이.”
“그럼 더 오래 잡아 드릴게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외조부인 김 회장뿐이었다.
새로운 삶을 안겨 주고, 혼자가 아닌 삶을 선물해 준 사람.
은혜를 갚아도 다 갚을 수는 없는 큰 사람이었다. 그토록 간절한 사람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가슴 아팠다.
“그럼 바보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데.”
현조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연재를 바라보았다.
허탈한 웃음은 곧 사그라들었다. 지금은 억지로 웃지 않아도, 괜찮은 척 아픔을 덮어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게 기대도 된다는 의미예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정하게 말하는 연재를 바라봤다.
이렇게 손을 잡아 주고, 다정하게 말해 주는 너를 고마워해야 할까, 두려워해야 할까.
“연재 씨는 가끔, 나를.”
흔들어 놔. 아무렇지 않게, 파고들어서.
끝내 마치지 못한 말을 삼켰다.
바람이 분다. 침묵이 흐르는 고요함 속에 오롯하게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고요한 하늘에 뜬 달을 바람이 어루만졌다. 바람만이 소란했다. 침묵하는 모든 것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