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부부 모드
“퇴근합시다.”
전무실 문가에 기대선 현조가 비서 데스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전무님. <진저> 기도하 사장님께서 연락 부탁하셨습니다.”
현조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진저, 기도하 사장은 현조의 친구였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정욱을 더불어 유일한 친구였다. 도하는 이원푸드 사옥에서 5분 거리에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타고난 금수저지만 집안에 형제가 많았다. 덕분에 일찌감치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접은 녀석이었다. 취미 삼아 호프집을 차렸고, 재미로 시작한 장사가 갈수록 번창하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기도하 사장 연락은 무시해요.”
“늘 중요한 업무라고 하셔서요.”
중요한 업무는 무슨, 결혼식에 초대 안 했다고 이를 갈면서 며칠 전부터 연락이 쇄도했다. 연락을 무시하자 급기야 회사로 전화한 것이다.
“다 뻥입니다.”
현조가 구사하는 새로운 언어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연재는 자신에게 농담을 던지던 현조는 사소한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좀 강렬한 성격이라 친구가 없거든, 걔가.”
성격은 더러운데 나쁜 놈은 아니란 게 아이러니였다. 돈 벌면 항상 수익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는 사업가였다. 말 그대로 입이 거칠고, 성격이 괴짜 같아서 그렇지 착한 거로 치면 따라올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착한 것과 성격이 좋은 것은 별개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뒤지지 않으실 것 같은데…….”
혼잣말을 너무 크게 해 버렸다.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은데.”
그걸 들은 현조가 보란 듯이 대꾸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
대답하기도 전에 현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현조가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쳐다봤다.
“자꾸 재촉하는 것 같은데, 연재 씨 소개해 달라고.”
휴대전화를 들고 웃으며 흔드는 현조를 보면서 연재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갈게.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연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조금 전 자신과 통화했던 남자라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투박하고 거친, 야생 미가 넘치던 강렬한 목소리였다.
“그래, 함께 갈 거야.”
통화는 짧고 간결하게 끝났다. 전화를 끊은 현조가 연재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갑시다. 오늘은 술 좀 받을 것 같은데, 연재 씨가 날 잘 챙겨가요.”
“네, 그럴게요.”
연재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현조를 따라나섰다. 현조를 따라간 곳은 매우 익숙한 호프집이었다.
“어, 여기는…….”
어째서 현조와 우연처럼 자주 마주쳤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가 자주 마주치던 장소죠.”
“그럼 이곳이?”
현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재는 바짝 긴장했다. 현조의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묘한 설렘이 일었다.
“대충 장단만 맞춰 줘요. 내가 열심히 가드할 테니까.”
긴장한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녀석인데, 좀 괴팍할 겁니다.”
현조의 설명에 따르면 도하가 이원푸드 근처에 가게를 낸 이유가 있었다. 현조와 정욱은 같은 회사였고, 그런 친구들을 꾀어내 술을 마시는 방법은 하나였다. 근처에 술집을 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못 봤을까요?”
그렇게 자주 왔는데 어째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까?
“취미라 일을 안 하거든, 대부분 새벽에 출근해요.”
아, 언제나 12시 전에 집에 들어갔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던 건가.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곳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단골 술집에 이렇게 어색하게 입장하게 될 줄이야.
“지금부터 부부 모드.”
현조가 손을 내밀었다. 연재는 조심스럽게 현조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감싸오며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깎지를 끼웠다.
꽉 맞물린 손가락은 무척 단단했다. 남자의 손을 이렇게 잡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류현조. 여기다.”
수화기로 들었던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초 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날 것 같은 목소리가 제 옆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연재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룸에 들어가 있어. 정욱이는 곧 도착한다니까.”
어쩜 그리도 목소리에 충실한 이미지를 가졌는지, 지독하게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은 파마한 것인지 웨이브 져 있었고 그것을 질끈 묶고 있었다. 거기에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꼭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기도 했다.
외모만 놓고 봤을 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현조와 상반된 이미지였다.
“와이프?”
그런 남자가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워 불쑥 얼굴을 들이밀더니 물었다. 순간 연재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현조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뒷걸음질 치다 도망쳤을 비주얼이었다.
“얼굴 좀 치우지? 내 아내 놀라는 거 안 보여?”
“와이프라고? 분명, 어디서 봤는데…….”
도하가 이마를 찡그리더니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느라 애쓰는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연재예요.”
도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준이 말했던 단골. 그런데.”
두 번쯤 봤던 여자다. 처음엔 다른 남자와 다투던 때였고, 두 번째는 현조가 기다린다는 말에 일찍 출근했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얼핏 봤다. 그때도 분명 곁에 있던 남자는 현조가 아니었다.
이거 뭐야.
“결혼 따로, 연애 따로?”
고개를 천장으로 향한 도하가 환기구를 향해 훅-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입에서 뱉어진 담배 연기가 흡수되듯 환풍구로 빨려 들어갔다.
“어쩌다 저 자식 와이프가 됐나? 내가 본 남자는 다른 남자였는데.”
거친 언사에 잠시 당황했던 연재는 놀라서 주춤거렸다.
“몰아붙이지 마. 놀라는 거 안 보여?”
중간에서 현조가 중재했지만, 남자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듯했다.
“양다리? 저 바보는 그걸 알고도 결혼했을 테고?”
양다리라는 말에 코웃음을 친 건 현조였다.
“헛다리 집어치워. 네가 본 남자는 내 처남이야.”
현조의 말에 도하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던 도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유하게 웃었다.
“이런. 치정 아니었어?”
“네가 왜 연애를 못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술 갖다 줄 테니까. 안에 박혀 있어.”
현조가 웃으며 연재의 손을 잡아끌고 룸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하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혼잣말처럼 두 사람의 등 뒤에 툭 내뱉었다.
“재미있네.”
정욱이 했던 말이랑 달랐다.
“권정욱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지?”
도하의 혼잣말이었다. 다만 방금까지 표정이 지워진 도하의 얼굴은 냉담했다.
***
“어쩌다 넘어갔어요?”
도하가 연재의 잔에 맥주를 채워 주며 물었다. 그러면서 흘기듯 현조를 쳐다봤다.
“전무님이 워낙 매너가 좋으시고.”
대답하는 연재를 현조가 턱을 괴고 바라봤다.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이미 술이 들어간 후라 현조는 반쯤 눈이 풀려 있었다.
“성격도, 좋으시고, 인물도, 좋으시고.”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말하는 연재를 쳐다보던 도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여자다. 한 달 전 같이 술 마실 때도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던 현조였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했고, 상대는 비서였다.
거기에 비밀결혼.
병환 중인 외조부를 위해서라면 제 장기도 내놓을 녀석이다. 아니 목숨도 아끼지 않을 녀석이다. 답은 뻔했다.
비서와 짜고 치는 고스톱인 거다.
“진정성이 없네. 둘이 입은 맞췄어요?”
“네? 네에?”
당황하는 연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패를 먹였냐는 말을 했을 뿐인데, 입 맞추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는 것이 몹시도 깜찍했다.
“당연한 거 아냐? 결혼까지 했는데 입도 안 맞춰 봤겠어?”
현조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저희 아직 그거 안 했.”
“제대로 맞추든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면 손도 안 댈 녀석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물며 거짓 결혼이라면 답은 안 봐도 뻔했다.
도하가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사실은 내 미모에 넘어왔지. 우리 연재가.”
“미친.”
도하가 입을 다물고 말없이 현조의 잔을 채웠다. 현조는 연거푸 몇 잔을 더 빈속에 들이부었다. 그러더니 곧 소파에 상체를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뻗었네. 술도 약한 주제에. 왜 안 마셔요?”
“전, 아무래도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연재가 따라 놓은 잔을 옆으로 밀자 도하가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채운 잔을 연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잠든 줄 알았던 현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매너 좀 챙겨 봐. 내 아내 폐는 소중하다고, 이 자식아.”
탁- 라이터가 다시 닫히고 도하는 입에 문 담배를 어금니로 옮겨 잘근잘근 필터를 씹었다.
“아직 멀쩡하면 더 마셔. 지옥으로 보내 줄 테니까.”
도발에도 고요했다. 이번엔 정말 잠든 모양이었다.
도하가 쓰게 웃으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잔을 들어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은 도하가 연재를 향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표정이네.”
“네.”
하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현조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비밀을 섣불리 알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재는 앞에 있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버릇처럼 크, 하고 내려놨다.
“궁금하면 물어보든가.”
물어봐도 알려 줄 사람이 아니다. 저건 그러니까 다 말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어보면 확실하게 입 닫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차라리 정욱이라면 말해 주겠지, 그러나 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오래 상대하며 얻은 경험이었다.
“그럴게요. 나중에요.”
“나쁘지 않네.”
의미 모를 말을 내뱉고 다시 채운 잔을 한 번 더 입안으로 털어 넣는 도하를 보면서 연재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현조의 모친인 김선화 사장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류현조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를 둘러싼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알고 싶었다.
왜 그를 사랑하면 안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