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하나는 버렸어요
별채 앞에 도착하자 현조가 마루와 연결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경제지였다. 연재는 괜스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은 어색한 풍경이고, 어색한 상황이었다.
이 모든 풍경과 저 남자에게 적응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왔어요?”
“네.”
“재미없었을 텐데, 고마워요.”
산책을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현조가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연재를 불렀다.
“이리 와요.”
강아지를 부르는 듯이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에 홀린 듯 현조의 옆에 가 앉았다.
“연재 씨도 이상하죠?”
“네?”
“우리가 주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랬다. 평일 근무시간 외에 현조와 함께 있다는 것이, 그것도 이렇게 한 집에서 편안한 옷차림을 한 현조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딱 떨어지는 슈트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편안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현조도 무척 잘 어울렸다.
“TV 볼래요? 같이.”
연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조가 TV를 켰다. 결혼은 일상이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함께 TV를 보는 것처럼 소소하고 당연한 일상. 그러면서 평화로운.
“저거 봐요.”
동물이 주연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에 채널이 고정됐다. 연재의 놀라운 집중이 시작됐다. 현조는 그런 연재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키울래요?”
“그래도 돼요?”
“강아지? 고양이? 아니다, 키우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려나?”
연재가 현조를 흘끗 쳐다보다 슬며시 웃고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키우는 거 좋아한다. 그 재미 중 하나가 현조인 것도 사실이었다.
“마음에 들면 칭찬도 해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줘요.”
아무리 그래도 상사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좀.
“머리카락을 만지면 잠이 잘 온다잖아요.”
현조가 느른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연재 씨가 해 주면 좋겠어요.”
천진한 아이처럼 웃으며 이야기하는 현조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 머리카락이 몹시도 부드러워 보였다. 만지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기 전에, 침대에서.”
“……!”
“잠들 때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김 회장이 버리라던 서재 침대가 번뜩 생각났다.
“버렸어요. 아까, 김 실장님이 사람 시켜서.”
세상에, 그렇게 발 빠른 행동력이라니! 산책하는 사이에 그걸 해치웠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 이제…….”
“침대는 하나죠.”
맙소사.
***
“어디 가요?”
옷을 정리하는 사이 진희에게 전화가 왔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거실에 있던 현조가 먼저 물었다.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올게요.”
“그럼 같이 가요.”
친구 누구냐는 질문도 생략한 현조가 기다리란 말을 뱉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현조가 연재 앞에 섰다.
“연재 씨가 바늘, 나는 실.”
연재가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내 차로 움직이면 되겠죠?”
“진희 만날 건데, 음. 잠깐만요. 먼저 연락해 둘게요.”
남편이 있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 뭔가 듬직하면서 거추장스럽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휴대전화 액정을 두드렸다. 현조와 함께 가도 되겠냐 묻는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연준이도 함께 있어. 잘됐다.]
문자를 현조에게 보여 주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현조와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벨트부터 찾아 맸다. 그러자 곧 타박이 날아왔다.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네?”
“아닙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진희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야 했다. 연재는 근처 건물 이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연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현조가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현조가 입을 열었다.
“처남 연애하죠?”
“처남? 아, 네.”
저 남자는 그런 말이 어쩜 그렇게 입에 착착 달라붙는 걸까. 신기하다.
“같이 있다는 그 친구랑?”
“네, 결혼식에서 봤던 진희요.”
결혼식 전에 인사 시켜 주고 싶었지만 모두 바빴다. 워낙 서둘러 한 결혼이기도 했고, 정신없던 탓이다.
“인사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잘된 것 같아요.”
그 말에 현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차는 막힘없이 달렸고, 곧 카페 앞 주차장에 섰다.
“내려요.”
차에서 내려 나란히 카페로 들어섰다. 나란히 걷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연재는 곁에 서 걷고 있는 현조를 힐끗 쳐다봤다. 역시나 이 남자 때문이겠지.
“서연재!”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란히 앉아 있는 연준과 진희가 보였다. 테이블 곁에 다가가자 연준이 반기며 일어섰다.
“매형!”
움찔, 연재는 당연한 호칭에 당황했다.
“처남 잘 지냈어?”
“그럼요.”
“진희 씨도 잘 지냈죠?.”
“네, 덕분에요.”
어제가 결혼식이었는데, 고작 하루 사이에 너무 가족적인 거 아닌가.
“누나 데려가서 힘들지 않으세요?”
연재가 주먹을 콱 쥐었다. 그것을 본 사람은 오로지 연준뿐이었다. 연준이 어깨를 으쓱하자 연재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몰랐어? 연재 씨 없으면 나 이제 못살아.”
물을 마시던 진희가 목구멍에 걸린 듯 기침을 해 댔고, 연재는 현조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형, 보기보다 의리 있으시네요.”
“내가 좀 그래요.”
“매형 잠깐 저 좀 보시죠.”
대화가 한창 이어지던 중, 연준이 사뭇 심각한 얼굴로 현조를 불렀다.
“잠깐 다녀올게.”
“네.”
현조가 흔쾌히 따라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연재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차고, 모친에게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진희와 이런저런 결혼에 대한 판타지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족들에게 상냥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제 가족과 마주했을 때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그래서 인 것 같다. 연극이라도 현조가 보여 주는 모습들이 좋았다.
“좋아 보여.”
진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연재는 생각했다.
한편, 현조를 데리고 나간 연준이 고민을 토로했다.
“잘 안 돼?”
“어떻게 아셨어요?”
현조는 순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연재와 이렇게 닮아서야.
“누나한테 들었거든, 진희 씨랑 사귀는 중이라고.”
“그래서 말인데요. 매형은 우리 누나 어떻게 홀렸어요?”
와, 이 녀석 봐라. 단어 선별이 남달라. 현조가 연준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했다.
“뭐, 있겠어. 미인계지.”
***
밤이 찾아왔다.
침대는 하나고, 사람은 둘이다.
서재로 가려던 현조를 붙잡은 것은 문 여사였다. 문 여사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또 싸우시면 서재를 없애 버린다고 하셨답니다.’
진희를 만나고 돌아온 직후라 나란히 서서 듣고 있던 연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가 한 약속을 잘 지킨 현조는 아무 책임이 없었다. 문제를 만든 원흉이 자신이니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했다.
“침대가 크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이렇게 단둘이, 안방에 나란히 서서 침대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왜일까요.”
마치 킹사이즈 침대를 품평하듯 현조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말을 이었다.
“연재 씨랑 나란히 누울 생각을 하니까, 침대가 쓸데없이.”
“좁죠? 좁을 것 같죠? 제가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연재가 선수 쳤다. 현조의 말을 끝까지 들고 있기 힘들었다. 현조는 모든 면에서 과했다. 이렇게 잠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마저도 쓸데없이 멋있어서 긴장되는 탓이었다.
이렇게 긴장하며 두근대는 모습을 들킨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손해를 안 보는데.”
현조가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말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뭐, 연재 씨가 원하는 것 같으니까. 이불은 여기쯤 깔아주면 괜찮겠어요?”
연재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현조가 그런 연재를 보면서 피식, 웃더니 장롱으로 걸어갔다. 장롱문을 열고 하얀 이불을 꺼내려던 현조는 멈칫했다.
그러다 곧 몸을 돌렸다.
“이불이 더러우면 문 여사님이 의심할 텐데.”
현조는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연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쩌죠, 이불도 하나만 써야 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현조는 잡티 하나 없이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좀.”
그렇다고 네, 그렇죠. 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그렇게 짐승 아니니까.”
동요하나 없이 태연한 현조를 보며 애타는 것은 연재 혼자였다.
“아니면 짐승이 취향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자꾸 그러면 나 의식하게 될 것 같은데.”
그래, 자극하면 안 된다. 연재는 태연한 척 침대로 걸어가 주섬주섬 이불을 들춰 몸을 구겨 넣었다.
‘침대는 광활하게 넓고, 내 몸은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노력하면 절대 닿지 않을 수 있어.’
의식하지 말자. 의식하면 안 된다. 이쪽 끝과 저쪽 끝은 멀다. 아주 멀다.
일단 대화를 차단하고 최대한 혼자 있는 것처럼 느끼게끔 연재는 눈을 감고 입술도 꾹 닫았다. 작게 웅크린 몸은 조금만 잘 못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잠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끝에 누우면 떨어질 텐데.”
현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연재는 들리지 않는 척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현조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전등을 껐다. 그리고 연재의 반대편에서 이불을 들추더니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똑딱똑딱, 시간이 흘러갔다.
잠들기 위한 세뇌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재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었다. 잠깐 사이에 아침이라니, 그러다 곧 옆자리를 쳐다봤다.
“어?”
연재는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