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이고 들어 줘요
내비게이션을 조작하고 막 출발하는데 ‘청혼’이라는 단어가 귀에 콕 박혔다.
“서연재 씨.”
“네.”
속도 없이 더워지는 기분이란. 연재는 부러 앞 유리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으로만 대답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앞차의 후미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과 가로등 따위의 빌딩 숲을 밝히는 자잘한 빛뿐이었다.
눈을 따갑게 하는 불빛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귀 기울이고 들어 줘요.”
신호가 바뀌고 차가 움직였다. 연재도 속도를 높여 갔다. 신경은 온통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목소리에 쏠렸지만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다.
“시작할게요.”
무슨 소린가 싶어 옆을 흘깃 쳐다봤다. 차창에 팔꿈치를 짚고 머리를 받치고 있던 현조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곧 그의 목소리가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나랑 결혼해 줄래. 나와 평생을 함께할래…….”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반칙인데.
이렇게 홀리는 건 나쁜 건데.
눈을 따갑게 했던 빛이 뭉개졌다.
따뜻함에 둘러싸인 듯 온도가 달라졌다.
달콤하게 녹았다.
“나와 결혼해 줘요. 내가 평생, 아니, 함께하는 동안은 당신만.”
사랑할 수 없다 해도.
“생각할게요.”
뿌연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눈앞이 온통 흐려졌다.
영혼이 담긴 연기력에 연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진짜 연기에 소질 있으신 거 아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처럼 그렇게 말을 뱉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완벽한 연극에 목이 메는 순간이었다.
“내가 좀, 잘하죠.”
주고받는 농담에 의미를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도 아닌, 두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차 좀 잠깐 세워 줄래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연재가 비상등을 켜고 도로 한쪽으로 차를 붙였다. 늦은 밤, 왕복 1차선 도로는 한산했다.
차가 완전히 서자 현조가 손을 내밀었다.
“손 좀 빌려줄래요?”
현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가 흔드는 새끼손가락을 웃으면서 쳐다보던 연재의 눈이 커졌다. 그의 새끼손가락에 반짝이는 것은.
“새끼손가락에 맞으면 운명이라던데.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운명인지 시험해 볼까요?”
반지였다.
“이런 건 언제…….”
목이 잠겨서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왼손이 잡혔고, 그대로 딸려갔다. 그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연재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는 것은 연재 몫이라는 듯,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운명인가.”
연재가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것을 지켜보던 현조가 나직하게 뱉었다.
“내가 좀 취해서 그러니, 오늘만 눈감아 줘요.”
두근두근.
그가 다가왔다.
어쩌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입술이 스치듯 네 번째 손가락에 닿았다.
안타까움에 목이 말랐다.
***
뜬눈으로 지새웠다. 한숨도 못 잔 연재는 밤새 뒤척이며 네 번째 손가락을 만졌다. 스치듯 닿은 입술의 흔적이 남긴 열기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것인지 밤새 달리기를 해 댔다. 이러다 정말 숨차 죽는 거 아닌가.
“하아.”
자꾸 한숨만 새어 나왔다. 지난밤, 현조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는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대신, 우리 연재 씨 집에 다시 데려다줘. 꼬옥.’
몇 번인가 당부하던 현조를 정욱이 데려다 눕히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정욱이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사양했지만, 끝내 데려다주려는 정욱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혼 축하해요.’
정욱의 시선이 닿은 곳은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연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 앞에 내려준 정욱은 곧바로 돌아갔다.
네 번째 손가락과 현조의 입술이 닿았던 손가락에 온 신경이 쏠려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연재는 결국 더 누워 있는 것조차 포기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희를 만나러 가겠다고 아침도 거르고 추리닝 바람으로 차에 탔다.
“진희, 나 지금 갈게.”
- 나 지금 일어난 거 어떻게 알고? 맛있는 거 사 오면 문 열어 주우지이이.
“딱 기대하고 있어. 이진희 좋아하는 해장국 사 갈게.”
- 현관 앞에 딱 붙어서 기다리겠어요.
웃으며 전화를 끊은 연재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근처 해장국집에 들러 포장까지 마친 연재가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정말 문 앞에서 기다린 것처럼 진희가 문을 열었다.
해장국을 거나하게 먹은 두 사람은 커피를 들고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진희는 부러 일인용 소파 두 개를 창을 향해 놓았는데, 고층 오피스텔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 맛에 높은 데 사는 거겠지?”
“자, 이제 털어놔 봐.”
귀신처럼 알고 있는 친구였다. 연재는 수줍게 왼손을 뻗어 진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진희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너!”
“결혼해…….”
이른 아침 친구의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는 진희의 눈시울이 젖어 갔다.
***
3월. 벚꽃이 막 피어나는 봄, 결혼식이 있었다.
양가의 허락을 구한 후 한 달 만에 치러지는 결혼이었다. S 호텔에서 극비리에 치러진 결혼식은 초대된 손님은 없었다. 현조의 모친인 김선화 사장과 김 회장을 비롯해 연재의 가족들만 참석하는 자리였다.
거기에 정욱과 연재의 친구 진희만 참석한 그야말로 비밀리에 치러진 결혼식이었다.
결혼, 그다음은 이제 시작이었다.
신혼여행은 가지 않았다. 처음엔 출장을 핑계로 단 3일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다녀올까, 서로 눈치를 살폈지만, 진짜 결혼도 아닌데 신혼여행을 챙긴다는 것도 우스워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결혼식은 올렸고, 일단은 금요일 밤이었으니 주말 이틀 동안 둘이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짐은 이게 답니까?”
가져온 것이라고는 몸뚱이와 옷가지가 전부였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현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혼집은 한옥의 별채였는데, 안방은 새 침대와 장롱을 비롯해 화장대까지 전부 새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긴 안방입니다. 공식적으로 우리가 함께 사용할 방이죠.”
“침대가…….”
하나였다. 그러자 현조가 보란 듯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부잖습니까.”
부부라는 말이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이었나. 연재는 수줍음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현조가 무척이나 여유로운 탓에 더욱 부끄러운 것은 연재의 몫이었다.
“하지만.”
“잠버릇이 심하면 곤란한데.”
어쩜 저렇게도 태연하게 짓궂은 말을 하는지.
“난 코 안 골아요. 연재 씨는 코 곱니까?”
“아니요.”
“그럼 이를 간다거나.”
“절대요.”
“잠버릇은?”
“그건 조금.”
아니 그런데 정말 함께 잘 거야? 묻는 말에 대답은 하면서도 점점 걱정됐다.
“그런데 정말 이 방을 함께 사용해야 하나요? 그럼 제가 바닥에서.”
“곤란하겠죠. 난 서재에서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 사람이 정말.
“설마 서운한 겁니까?”
“절대요!”
방이 무척 넓기도 해서 순간적으로 믿어 버렸다. 혼자 자기엔 지나치게 넓어서 춥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주의할 점이라면.”
“욕실이 밖에 있습니다. 별채는 나 혼자 사용하던 곳이라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는데, 연재 씨가 있으니 특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옛날식 한옥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욕실이 안방에 딸려 있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루와 연결된 거실도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바깥에서 환히 보이는 구조였다.
안방과 서재 사이 구석에 있던 문이 욕실인 모양이었다.
“네,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피곤할 텐데 짐 풀고 쉬도록 해요.”
현조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연재가 현조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할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할아버지는 안채에서 생활하십니다.”
안채와 별채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안채와 별채의 거리만큼 정원이었는데, 작은 공원만큼이나 넓었다.
처음 김 회장께 인사를 올리기 위해 찾아왔던 날은 안채 앞에 주차했기 때문에 안쪽으로 이렇게 넓은 정원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집이 이렇게 넓다는 게 신기해요.”
“익숙해지면 지낼 만할 겁니다.”
무슨 조선 시대 배경으로 나오는 궁궐 같기도 했다. 연재는 새삼 부의 깊이를 느끼는 중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세입자 한 명 늘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래요. 아, 우리가 처음 한집에 살게 된 첫날밤이군요.”
첫날밤이란 말에 단박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며 연재가 얼른 받아쳤다.
“일단 할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주무십니다.”
어색한데, 더 어색해졌다.
“아.”
아픈 몸으로 결혼식까지 참석한 김 회장은 피곤함에 지쳐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기념으로 맥주 한잔 할래요?”
“좋아요.”
깊은 봄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마루에 앉아 술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하지만 조용한 집안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색한 긴장이 흘렀다.
“취하지 않아도, 취해도 똑같군요.”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던 연재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시던 캔을 쥐고 있는 모습도 광고에 나올 법하게 근사했다.
“맥주 한 캔밖에 안 드셨는데.”
이 사람이 진짜, 어디서 약을 팔아.
“취한 줄 알았어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짓고 있는 현조는 연재가 보기에도 굉장히 기분 좋아 보였다.
“꿈 같기도 합니다. 서연재 씨가 내가 좋아하는 이 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꾸듯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연재도 정말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멋스러운 집과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원, 그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 남자까지 너무 완벽하니까.
“이 집에 온 것을 환영해요. 함께 하는 동안 예쁘게 살도록 해요. 우리.”
추억으로 간직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