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청혼만 남았네요
“보고해. 아니면, 그냥 들어가도 상관없나?”
사장실에 들어서자 비서 데스크에 앉아 있는 지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정욱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회의실이 아닌 장소에서 모친인 선화를 직접 만나는 일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정욱이 회장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사라졌다. 곧 다시 빠져나온 정욱이 문을 연 채로 섰다.
정욱을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선 현조는 처음 보는 집무실 내부를 눈으로 짧게 훑었다.
“왔으면 앉으렴.”
소파에 앉으면서 선화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20일 만에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이사회나 소집되어야 만나는 얼굴을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자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사적으로 만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상석에 휠체어가 멈춰 서자 현조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계약 체결 조건 정리한 보고섭니다. 계약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래, 수고했구나.”
보고서를 집어 든 선화가 계약서를 훑는 사이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조였다.
“서연재 씨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화는 대꾸 없이 보고서만 훑었다. 그런 차가운 면을 알고 있는 현조는 개의치 않고 제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건은 마음에 드셨을 것으로 압니다. 결혼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렴. 나쁘지 않더구나.”
“결혼식은 비밀리에 간단하게 진행할 계획입니다.”
선화가 참석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결혼식은 말 그대로 신부 측에 예의를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 필요한 장치였다.
양가 가족들만 모인 최소 규모의 결혼식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날 잡으면 이야기하렴.”
오겠다는 뜻을 비치는 선화를 보면서 현조는 잠시 놀랐다.
“두 번 있을 결혼도 아닌데 가 봐야 하지 않겠니.”
“회장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참석하는 의미가 있겠구나.”
널 위한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를 위한 쇼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런 뜻이었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제,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래.”
현조의 말을 끝으로 선화도 보고 있던 보고서에서 눈을 뗀 후,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일어날 줄 알았던 현조가 굳은 자세로 앉아 있자 선화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후로는 서연재 씨 만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어머니께서도 제 존재를 밝히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요.”
선화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계약서는 제가 처리했습니다. 더는 저를 믿어 달라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할 일이니 더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묵례했다. 시선 끝에 걸리는 휠체어를 외면하며 눈을 감고 돌아섰다.
바라는 것이 없는 관계일수록 평화롭다.
‘어머니 제발, 믿어 주세요.’
아프게 내뱉던 말을 이제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김 회장이 없는 곳에 더는 머물 이유가 없으니까.
다만 자신이 시작한 일에 연재를 끌어들인 이상, 연재만큼은 다치지 않도록 지킬 것이다.
연재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뜻에 따라 결혼의 존속 여부도 결정지을 생각이었다.
***
연재는 오전부터 바빴다.
신성한 주말, 토요일 오전부터 바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오늘이 바로 현조가 인사를 오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전날 바리바리 장을 봐 온 모친은 새벽부터 혼자 음식 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늦잠 자고 일어난 연재는 그 광경에 넋이 나갔다.
“대체 뭘 만들려고 이렇게 많이 사 온 거야?”
“우리 예비 사위님이 오실 텐데 정성이라도 듬뿍 담아야지.”
“엄마는 금손이라서 대충 만들어도 5성급이야. 대체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려고…….”
“미안하면 거기 앉아서 멸치 배 좀 따서 똥 좀 빼.”
국물용 멸치가 아가리를 벌린 채 뜬눈으로 단체로 쏘아보고 있었다. 연재는 식탁에 앉아 멸치를 한껏 노려보기 시작했다.
일대 백은 가볍게 넘는 숫자의 압박에 지레 포기하고 멸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정말 너희 회사 전무란 말이야?”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모친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선보러 내보냈던 딸이 그런 대단한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응.”
“안 되겠다. 나 청심환 좀 먹고 봐야겠다.”
“엄마!”
모친의 얼굴은 며칠 전부터 요상했다. 좋으면서도 걱정되는지 밤새 잠을 설친다고 했다. 그에 반해 부친은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 다 똑같은데 만나보고 판단하겠다는 말로 일갈하고는 그 후로 일절 입을 열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연준은 잔뜩 벼르고 있었다. 누나를 처분할 신이 주신 기회라고.
지금 연재네 집은 각자의 사정으로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편하게 생각해요. 전무님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야.”
그래, 똑같은 사람이다. 금수저라고 해서 핏줄이 금맥인 것도 아니고, 똑같이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물론 좀 잘생겼고, 돈도 좀 많고, 능력도 좀 뛰어나고, 사람 놀리는 스킬이 남다르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며칠 전 안전벨트 사건이 둥실 떠올랐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얼굴이 달아오르고 속이 뜨거워져서 얼른 머리를 내저었다.
“껍데기야 같지, 속이 어떤지 모르니 걱정인 거지. 아직 안 늦었어. 너 그 결혼 꼭 해야겠어?”
“응. 어차피 서로 결혼 급한 것도 맞고…….”
“급해도 그렇지, 보쌈해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알리지도 못하고 식구들끼리 결혼식 올리자는 게 말이 돼?”
어차피 알게 될 일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결혼이 치러지는 것인지 솔직하게 다 터놓고 이야기했다.
사실 연재는 결혼식을 굳이 올릴 필요가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알려지는 거 꺼린다고 했어.”
사내 연애인 것도 모자라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와 결혼이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처음엔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하던 모친도 지금은 받아들인 눈치였다.
물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점쟁이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일단 허락한 것이었다.
“모르겠다, 엄마는.”
그때부터 모친은 입을 닫고 음식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음식이 하나씩 완성되어 식탁에 올려지기 시작했고, 시간은 어느새 저녁 6시로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1시간 후면 현조가 도착할 것이다.
연재는 부엌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집 주소를 전송하고 돌아서자 답장이 날아왔다.
[지금 출발. 조금만 기다려요.]
별것 아닌 한 줄에 미소가 그려졌다. 현조의 외조부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던 결혼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의식한 것처럼 긴장되기 시작했다.
현조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45분쯤 지난 후였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연재는 현조의 자동차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담벼락 아래 멈춘 자동차 운전석이 열리고 흠잡을 곳 없이 잘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재가 그 앞에 다가가자 현조가 뒷좌석 문을 열고 준비한 것들을 꺼냈다.
“이게 다 뭐예요?”
“빈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까.”
현조의 손에 들린 것들은 한눈에 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양주와 싱싱한 과일 바구니였다.
“주세요. 무겁잖아요.”
“걱정되면 문만 열어 줄래요?”
연재가 얼른 앞장서서 대문을 밀었다. 아담한 마당에는 파릇한 채소도 심겨 있고, 아래에는 수돗가도 있었다. 그리고 담벼락 한쪽에는 관상용으로 보이는 항아리까지 옹기종기 있었다.
“집이 따뜻하네요.”
“시골에서 살던 습관이 남아서요. 저 항아리에 고추장이랑 된장 간장도 있어요.”
열아홉 살까지 시골에 살았다던 연재네 가족을 떠올리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앞장선 연재가 현관문을 열자 현조가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거실로 발을 내딛는데 안쪽에서 소란한 목소리가 마중 나왔다.
“어머,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연재 모친이 뛰듯이 다가와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냥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안방에서 나오던 연재 부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으로 들어와서 앉아요.”
“저녁 다 됐는데, 우선 식사부터 할까요?”
“예, 어머님 저도 마침 배고프던 참입니다.”
긴장했던 연재 모친도 어느새 긴장을 풀린 듯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현조의 싹싹함과 훤칠함에 마음이 한결 놓인 듯했다.
뒤이어 나온 연준까지 가족들 모두 식탁에 앉아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마쳤다. 정갈하게 음식을 비우는 현조는 또 한 번 연재 모친에게 큰 점수를 받았다.
“차 들어요.”
거실에 앉아 본격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나는 연재가 불행해지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어요.”
식사 내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부친의 말에 가라앉았다. 부러 식사하는 동안은 아무 말 하지 않던 부친이 걱정을 내비친 것이었다.
“제가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연재 씨가 힘들지 않도록 온 마음을 쓰겠습니다.”
“같이 일했으니 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 테고, 갑자기 결혼하겠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다른 가족들 역시 부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조가 조용히 대답했다.
“외조부께서 매우 편찮으십니다. 그런 이유로 결혼을 서둘렀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연재 씨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부디, 따님과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흘려들어야 하는데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의미 없을 말일 뿐인데 그가 하는 말에서 진심이 무엇일지 자꾸만 가늠하고 골라내고 있었다.
***
대리운전을 부르려다 연재가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앉은 현조에게서는 독한 과일주 냄새가 풀풀 풍겼다. 부친은 아끼며 보관하던 복분자주를 아낌없이 예비 사위에게 먹이셨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술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예비 매형, 우리 누나 데려가는 거 축하합니다.’
‘며칠 전 선 자리, 자네가 깽판 놨다던 인사 맞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안이 많이 기울어서……. 우리 연재 걱정되는데…….’
그렇게 한마디씩 덧붙이며 따라준 술을 모두 받아 마신 현조였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술잔이 늘었다. 그렇게 현조는 취했고, 부모님은 주사도 없다면서 흡족해하셨다.
걱정을 태산처럼 하던 모친은 현조를 만나고 난 후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전무님, 출발하겠습니다.”
“이제 준비 과정은 끝난 셈이군요.”
무척 홀가분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현조가 이야기했다. 마치 큰 산을 넘은 것 같은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전무님, 지금 굉장히 홀가분하게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요?”
“전무님?”
입에 밴 호칭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다른 건 노력하면 한 번에 되는데, 호칭만큼은 쉽지 않았다.
무의식이 자꾸 거부하는 듯했다.
“이름 부르는 게 많이 힘들면 ‘자기’라는 쉬운 말도 있습니다. 자기야.”
“현조 씨.”
현조가 씩 웃는다. 그는 정말 연기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배우를 해야 했는데, 저 얼굴 낭비해가며 사업가를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긴장했거든요, 나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셨을까? 부친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연준이 따라주는 술을 현조는 망설임 없이 마셨다.
그런 현조를 보면서 연재는 듬직함을 느꼈다. 만약 이 남자와의 관계가 진짜라면 기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청혼만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