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8)

내가 다 혼내 줄 테니까

비록 마주 보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코앞에 있는 옆모습은 지나치게 수려했고, 그에게서 나는 향기는 아찔했다.

더는 한계다. 연재는 눈을 질근 감고, 숨을 참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쓱-

그때 벨트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딸깍하고 채워졌다. 소리에 당황한 연재가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뜬 것을 후회했다.

고개를 돌린 현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숨을 참고 있는 연재의 얼굴은 터질 것 같았지만 그는 한껏 여유로웠다.

‘놀리는 건가? 놀리는 거겠지?’

숨을 참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내 옆자리에 태워서 해 주고 싶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화염이라도 뱉어낼 수 있을 만큼 연재의 볼이 붉었다.

‘제발 빨리 얼굴 좀 치워요.’

한껏 여유로운 현조를 원망하며, 연재는 속으로 애태웠다.

“운전 조심해요.”

코앞에서 나직하게 속삭인 현조가 정점을 찍듯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마친 현조가 만족한 듯 몸을 빼냈다. 3초, 세상의 시간은 3초였지만 연재에겐 멈춰진 시간이었다.

손은 다음에 잡겠다던 말이 이런 뜻이었나? 닿지 않았으니 스킨십이라 할 수도 없었다. 약속은 지켰으니 된 것 아니냐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 그럼, 대표님 안녕히 가세요.”

연재가 재빨리 운전석 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숨이 가쁜 나머지, 가슴을 몇 번인가 두드려야 했다.

저 사람은 분명 전생에 살생했을 것이다. 얼굴이 무기다. 사람을 기절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시동을 걸자마자 연재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귀엽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현조가 곧 자신의 차를 향해 돌아섰다.

큰일이다. 놀려먹는 재미에 빠져 버렸다.

언제나 단정한 얼굴로 보필하지만, 순간순간 빈틈이 많았다. 그런 빈틈에 파고들어 놀릴 때마다 연재는 움찔거렸다.

성공할 때마다 짜릿해서 전신으로 쾌감이 번지는 느낌이다.

“이러다 습관 되겠어.”

당장 일본 출장만 해도 그렇다. 몇 시간 당기자고 점심도 거르고 미팅 협상테이블에 앉아 열을 올렸었다. 어디 그뿐인가 첫날엔 습관처럼 전화를 걸었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키득거리다 연재의 말 한마디에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서연재 놀라게 해 주겠다고 3시간 일찍 출발해 놓고 비행기 안에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기가 막혔다.

“너무 몰입했어. 류현조.”

그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 도착할 시간 된 것 같은데, 왜 안 오십니까?

정욱이었다. 차에 탄 현조는 시간을 확인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 회사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밖이야.”

- 밖이라면, 입국하셨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진득한 한숨이 건너왔다. 간단히 무시한 현조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 연애라도 하십니까?

“연애는 무슨, 결혼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 잠깐 보시죠. 집으로 가겠습니다.

“늦었는데?”

-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현조는 차를 출발했다. 예감이 썩 좋지는 않았다. 굳이 찾아오겠다는 정욱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 알고 싶지 않은 이유일 테지만.

김 회장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보름 전, 다시 본가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한옥에서 자란 덕분에 불편함은 없었다. 한옥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정욱의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인사를 드리기엔 늦은 시간이었기에 안채가 아닌 별채로 곧바로 향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던 정욱이 일어섰다.

“무슨 일인데 야심한 밤에 찾아와?”

“서연재 씨랑 있었던 거야?”

정욱이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것은, 친구로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히 그 사실을 확인하자고 이 밤에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어머니께서 만나셨나?”

“확인하고 싶으셨나 봐.”

이로써 어떻게 인사시킬까 고민할 필요도 없어진 셈인가. 현조의 입가에 남아 있던 쓰디쓴 미소가 지워졌다.

“왜? 내가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을까 봐?”

“서연재 씨가 너를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

현조가 털썩 마루에 앉았다. 정원을 빙 둘러 심어놓은 정원수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하늘에 뜬 달이 작은 분수에 비쳐 반짝이는 빛을 반사했다.

“너라면 나 같은 걸 좋아하겠어?”

순간, 정욱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는 정욱의 얼굴은 한참 후에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네가 사장님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너무 많이 비약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걱정하지 마. 잊지 않았으니까.”

낮게 가라앉은 현조의 목소리가 분수대에 젖은 달빛처럼 처연하게 울렸다. 한꺼번에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것처럼 현조는 피곤함을 느꼈다.

“네가 잊지 않았다면, 된 거지.”

정욱의 대답을 듣고, 현조가 일어섰다. 댓돌 위에 구두를 가지런히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앉아 있던 정욱이 일어섰고, 두 사람은 마루 높이만큼 키 차이를 만들었다.

“그만 가 봐. 내가 좀 무리했더니 피곤하거든.”

“현조야.”

“나는 아직도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가끔 두렵다. 꼭 지금처럼.”

네가 누구를 생각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지 분명하게 알 것 같은 이런 순간들이 여전히 두렵다. 어머니도 너도, 나를 보면서 떠올릴 그 얼굴이 몹시도 아프다.

그런데도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롭다.

“어머니께 전해, 결혼이 필요해서 그 여자를 선택한 것뿐이라고.”

“…….”

“물론, 그 여자도 똑같은 이유라는 것은 만나 보셨으니 아실 테고.”

문 앞에 선 현조가 막 문을 열려고 하던 참이었다.

“사장님께서 계약서를 주셨어. 서연재 씨에게.”

문을 잡으려던 손이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현조가 정욱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네가 어떤 마음이고 서연재 씨가 어떤 마음이든, 이 결혼의 끝은 정해졌다는 뜻이야.”

끝내 믿지 못하는 선화가 야속했다. 아니, 끝내 용서할 생각이 없는 선화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현조는 그런 선화를 이해했다.

“괜한 신경 쓰이게 해 드렸네.”

“그러니까 현조야.”

“말려주지 그랬냐. 어머니 힘드시게.”

대꾸하지 못하는 정욱에게 다시금 시선을 한 번 더 준 현조가 돌아섰다.

“조심히 가라.”

현조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닫혀가는 문이 간격이 서서히 좁혀졌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자, 정욱은 참았던 긴 숨을 하늘을 향해 내뱉었다. 달이 밝은 하늘은 별이 하나도 없었다.

류현조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달이었다.

괴리에 빠져 생을 잡아먹힌 달이었다.

밤이 되어야만 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달이었다.

태양이 죽은 하늘을 지키는 달.

태양의 빛을 받아 생을 연명해야 하는 달.

태양이 없는 하늘에서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달.

그런 달이 외로움에 지쳐 가고 있다.

***

“전무님, 자료정리 마쳤습니다.”

말간 얼굴로 연재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현조의 입가가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런 현조를 내려다보던 연재는 불안했다. 남자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 비서.”

“네, 전무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고민하는 연재의 미간이 좁아졌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어차피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으니 농담일 테니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고?”

“믿음 아닐까요?”

“그런데 서 비서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장난이 아니었다. 낮은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의 표정도 눈빛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답해 봐요.”

대답해 보라 했지만,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상사로써 현조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통찰력도 있었고, 사업 수단도 좋았으며, 부하직원을 대하는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상사였다.

물론 상사로써 류현조에 대한 평가였다.

최근 사적으로 엮이면서 그 평가가 전부는 아니구나, 절실하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와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 같았다. 보이지 않는 유함이 그의 강직한 카리스마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강하지만, 부드럽고, 한없이 자유분방했다.

“믿습니다.”

“그럼 솔직해질 수 있겠군요. 다음부터는 나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거든 내게 말해요.”

“아…….”

김선화 사장을 만났었다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계약서에 관한 내용까지.

“서 비서를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일러바치란 소립니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연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럼 내가 다 혼내 줄 테니까. 나 믿고 다 말해요.”

연재는 이번에야말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남자의 농담 같은 한마디에, 근거 없는 믿음이 출처도 없이 생성되려 한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다.

“노력하겠습니다.”

“끝까지 알았다고는 안 하네요.”

토라지는 모습까지 싫지 않은 건 이제 이 남자의 페이스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웃음이 났다.

“언제 가면 됩니까?”

“토요일 저녁 식사 같이하시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친이 당장이라도 데려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지. 연재는 최대한 언어를 순화했다.

“어머님께 토요일에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네, 전무님. 더 지시하실 사항 없으십니까?”

“계약서, 가지고 와요.”

전부 다 들었구나. 연재는 말없이 뒤돌아 나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계약서를 꺼내 왔다. 현조에게 내밀자 그것을 받아 든 현조가 계약서를 꺼냈다.

“아무 데나 함부로 서명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입술을 깨물었다. 반은 홧김에 서명했지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그것을 현조가 보란 듯이 찢어 버렸다.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하는 그를 보면서 연재는 속에서부터 통쾌함이 밀려왔다.

“서 비서를 책임지는 사람은 납니다. 돈이 필요하면 내가 줄 거고, 서 비서가 해 달라는 건 내가 해 줄 겁니다.”

무언가 가슴에 얹혀 있던 체기가 확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다. 속이 다 후련했다.

“그리고 이 계약서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겁니다.”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에 갈 겁니다.”

“네, 전무님.”

현조가 사장실로 김선화 사장을 만나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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