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이틀
한 사람의 부재가 마치 지구가 텅 빈 것처럼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고작 이틀 못 봤다고 이렇게 허전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하는 현조가 자꾸 떠올랐다.
“미쳤나 봐.”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연재는 혼잣말을 중얼댔다. 현조가 없는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일까.
괜히 더 생각나서 괴롭기까지 했다.
“잘 알고 있네. 길에서 혼잣말하면 딱 그렇게 보이는 거.”
우수에 젖어 있던 연재의 가슴에 얼음물을 끼얹으며 연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추리닝에 운동화 차림인 걸 보니 오늘도 뛰다 온 모양이다.
“운동했어?”
“습관인데 안 하면 살 붙어. 누구처럼.”
“내가 살이 어디 있다고?”
“발끈하긴, 누나라고 안 했다.”
“너 진짜, 잘 만났다. 따라와.”
연재는 연준을 데리고 동네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골목을 조금만 따라 내려가면 편의점이었다. 요상 망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땐 역시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최고다.
“마셔.”
방금까지 뛰다 온 탓인지 연준도 달게 마셨다. 쌀쌀한 날씨에 속까지 시원해지자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연애는 잘되고?”
“뭐 그럭저럭. 누나 넌.”
“나? 뭐?”
“마성의 전무님이랑 결혼하는 거 아냐?”
“…….”
이 상황에 현조가 인사차 오면 게임 끝이겠지. 그럼 바로 상견례고 그다음 결혼이고.
“하지 말까?”
“하지 마, 그냥.”
왜냐고 묻지도 않는 연준을 연재가 째려봤다. 남 일이라고 아주 쉽지 그냥.
“이럴 땐 왜 그러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니야?”
“이유가 있겠지. 고민할 정도면 사랑도 아닌 거고.”
뼈를 때리는 말에 연재는 고민 없이 다음 캔을 땄다. 연달아 마시고 나자 찬바람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도망쳐.”
“응?”
“누나 인생이잖아. 누나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연재는 벌떡 일어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연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나 아무래도 동생 잘 둔 것 같아.”
“사랑해도 힘든 게 결혼이라더라.”
“사랑해서 힘든 게 아닐까?”
“사랑으로 극복 안 되는 거면 무엇으로도 극복 못 해. 결혼은 그런 거라고.”
“누가 그래?”
“엄마가.”
연재가 끌어안고 있던 연준의 머리를 놓고 소리쳤다.
“우리 엄마 맞아?”
씩씩대는 연재를 보면서 연준이 피식 웃으며 캔을 따더니 한 번에 비웠다.
“자꾸 궁금하고 확인하고 싶어.”
“뭘?”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들, 그거 진짜 다 뻥 인지, 진심인지.”
연준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제 몸뚱이만 한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다.
무엇보다 류현조를 직접 봤을 때 느낌은 여전히 생생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얕을지라도, 한눈에 괜찮은 느낌을 풍기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현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렇게 표정이 바뀌는 연재를 보면서 알 것 같았다.
“하겠네. 결국.”
연준은 혼자 고민하는 연재를 쳐다보다 맥주를 벌컥 마셨다.
인간에게 있어 때때로 자신을 아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오죽하면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너 자신을 알라고.
고민하는 중생을 바라보며 연준은 혀를 찼다.
***
퇴근 시간까지 전무실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연재는 퇴근 준비를 하고 가방을 챙겼다. 문득 컴퓨터 비밀번호를 바꿀 때가 된 것이 떠올라 새로운 비밀번호로 등록하고 컴퓨터를 껐다.
사무실 내부를 한 번 더 눈으로 점검하듯 훑고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 했는데.”
손잡이를 잡으려 했던 것처럼, 현조의 손이 허공에 떠 있다.
‘보고 싶으면 기다려요. 딱, 30분만.’
그렇게 30분 전에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연재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연재가 예약해 둔 티켓은 분명 밤 10시 도착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눈앞에 나타났다. 저녁 6시 46분에.
“전무님, 오늘 밤에 도착하시는 줄 알았는데.”
“농담이라고 생각했나 보네.”
연재는 눈을 몇 번인가 깜박거렸다. 이 남자는 가끔 마법도 쓰는 걸까? 허전하다, 생각했더니 정말 눈앞에 나타났다.
“도깨비?”
문 열면 나타나고, 문 열면 다른 세상으로 가고 막, 그러는 건 아니죠?
“응?”
“아니, 아니에요.”
“내가 더 잘생기지 않았어요?”
연재가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연재의 코앞에 다가온 현조가 씩 웃으며 연재의 품에 서류 뭉치를 안겼다.
“내일 오전 중으로 정리해서 보고해요. 서 비서.”
일거리를 잔뜩 안겨주는 상사의 얼굴이 왜인지 밉지 않았다. 연재는 서류 봉투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죠. 나 저녁 못 먹었는데.”
“어딜요?”
“도망가려다 걸린 서 비서가 저녁 사 준다는데, 아닙니까?”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에 안고 있던 서류 뭉치를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만 서랍에 넣고 오겠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고 서류를 집어넣은 연재가 곧 서랍을 잠그고 열쇠를 가방에 넣었다. 입가에 자꾸 웃음이 걸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
밥을 먹는 내내 연재는 현조의 표정을 살폈다. 자꾸 현조가 보내준 사진이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현조를 한 번씩 쳐다봐야 했다.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생긴 건 알지만, 그렇게 자꾸 보면 나도 좀 의식되거든.”
“죄송합니다.”
“나 없는 이틀이 굉장히 길고, 허전했어요?”
아니 좀 봤기로 서니 너무 멀리 나가신다.
“그 정도는.”
“왜? 난 그 정도였는데.”
자꾸 그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헷갈리는 것은 내 몫이다. 그러다 또, 선화의 말이 뇌리를 스쳐 갔다.
‘절대 사랑하지 말아요. 그 애를 사랑하면 서연재 씨가 불행해질 테니까.’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이 잘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다만 이 남자가 했던 많은 말들을 믿고 싶은 욕심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그것이 이 결혼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기도 했으니까.
“농담에 의미 부여하는 겁니까.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요.”
“내가 생각보다 연기를 잘합니까?”
“훌륭하십니다.”
연재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만큼, 딱 이만큼이 가장 좋은 거리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출장은 어떠셨어요?”
“가능성은 확실히 봤어요. 생각보다 호의적이었고, 음식 문화가 많이 높아졌다는 생각도 들고. 적어도 소담에서 수출하는 김치를 비롯해 한식은 우리 음식의 격을 높여 줄 거라고 자부합니다.”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하는지, 연재는 다시금 현조의 현란한 말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남자에게 그늘이란 것이 정말 존재할까?
그래서일까, 현조를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어떤 작은 연민도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완벽한 현조를 보고 있노라면 약자는 분명 김선화 사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의 피해자 역시, 현조보다 더 괴로운 쪽은 김선화 사장일 테니까.
“가족들에게 언제 소개해 줄 겁니까?”
연재가 파스타 면을 돌돌 말다가 고개를 들고 현조를 바라봤다. 태연한 시선에 맞닿았고, 평온한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이야기한 것 같은데, 시간이 촉박하다고.”
“죄송해요. 오늘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날 잡아서 알려 드릴게요.”
“하루라도 빨리 한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만.”
가벼운 농담인 줄 알면서 심장이 움찔거렸다.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우러진 시선 때문이었다.
“저도 그래요.”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지. 서연재, 잘했어. 농담 한마디 받아치고 뜬금없는 자부심이 샘솟았다.
“그러지 말아요.”
현조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다 곧, 부드러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심장에 해롭거든요.”
농담에 농담을 더하는 눈빛이 필요 이상 달콤해서 심장에 무리가 온 연재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뛰는 심장을 달래야 했다.
“언어 쪽은 많이 개발된 것 같으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다음 단계요?”
“손잡아도 됩니까?”
아니 무슨 단둘이 있는데 손을 잡겠다고.
“싫으면 손을 감추고, 좋으면 그대로 있어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물 잔을 쥐고 있던 연재의 손을 향해 현조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연재는 망설였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빼내면 그만인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손이 안 움직여.’
커다란 손이 점점 다가왔다. 느리지만 확신을 가진 듯 망설임 없는 간결한 동작이었다.
마침내 다가온 손이 지척에서 멈췄다.
“역시, 손은 다음에 잡는 편이 좋겠군요.”
다가올 때와 다르게 순식간에 멀어졌다. 연재는 얼떨떨했다. 괜히 머쓱해서 물 잔만 만지작댔다.
“식사 끝난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날까요?”
***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공교롭게도 자동차도 나란히 주차해 둔 상태였다.
“전무님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운전 조심하세요.”
“서연재 씨.”
운전석을 열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현조가 불러 세웠다.
“운전 좋아해요?”
“네. 뭐, 편하니까요.”
사실 시끄러운 장소를 견디는 게 곤혹스러워서 운전하는 것이었다. 출퇴근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다 결국 포기하고 차를 샀다.
“곤란하네.”
곤란하다니 또 뭐가요? 눈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운전 조심해요.”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운전석을 열고 시트에 앉아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당겨도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재는 힘을 줘서 문을 당겼지만, 현조가 문이 닫히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탓이었다.
“또 무슨 하실 말씀 남으셨어요?”
불쑥 현조의 상체가 운전석으로 밀고 들어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연재는 숨을 참았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 같은 거리를 두고 현조의 옆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숨을 내쉬면 그대로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놀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