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과 연극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애와 결혼하겠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런 애? 아들을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잖아? 연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족을 떠올렸다. 연재의 미간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며 서서히 일그러졌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무감하며 냉담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사랑하나요? 그런 애를?”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는 김 사장의 얼굴이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감정이 느껴지는 단어를 뱉는 것 같았다.
연재는 얼마 전 만났던 김 회장을 떠올렸다. 분명, 김 회장의 딸이 김선화 사장일 텐데 분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현조를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랐다.
“만에 하나라도 첫눈에 반해, 그 애를 사랑한다면 나는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잘못 들은 걸까? 연재는 자신이 귀를 의심했다. 처음부터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은 했었다. 반대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하던 반대와 너무 달랐다.
선화의 표정은 반대하는 부모가 보여 주는 화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도도한 시선은 불쾌한 쪽에 가까웠다.
“대답해요.”
다그치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연재는 연극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대표님께서 결혼이 급하셨고 저도 결혼이 급해서 서두른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먼저.”
연극은 무슨, 체질에 맞지 않으니 별수 없다. 입이 알아서 움직였다. 솔직함이 죄라면 중죄를 짓고 있다고 해도 별수 없었다. 타고난 성격은 못 고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화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연재는 눈을 의심했다.
“회장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서연재 씨를 설득한 모양이네. 괜찮겠어요?”
선화의 목소리는 오히려 부드러웠다. 사업을 하면 가면이 여러 개 필요하다던데 일종의 이미지 관리인가? 아니면 사랑은 아니라는 말이 가 닿은 걸까?
아무리 붙임성이 좋은 연재라도 선화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은 하나예요.”
마른 침을 꼴깍 삼킨 연재가 선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이젠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이미 사람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분위기에 기가 눌렸다.
“절대 사랑하지 말아요. 그 애를 사랑하면 서연재 씨가 불행해질 테니까.”
아들을 사랑하지 말라면서 결혼을 허락하고, 아들이 아닌 상대방을 걱정한다. 연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을 승낙받지 못한 것보다, 이쪽이 더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서연재 씨를.”
“그건…….”
“회장님께서 매우 편찮으신 건 알고 있을 거예요. 회장님 마음 편하게 해 드리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충분히 보상하죠.”
보상이란 말을 듣는 순간, 상황은 깨끗하게 정리됐다. 현조가 말하던 연극, 지금 선화가 말하는 보상까지.
이상하고 복잡한 것들 속에서 확실한 사실 하나를 도출해 냈다.
이 결혼이 ‘가짜’라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아마 현조도 내가 이야기하는 뜻을 충분히 알 테니까. 서연재 씨는 그렇게 따라 주면 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3년을 비서로 봐 온 연재는 영리하지만, 필요 이상 정직했다. 그 올곧음을 빌미로 발목 잡을 것이다.
정욱을 통해 추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맞선을 보러 다니다 만났다고 했다. 딱히, 서로 감정이 있어서 결혼을 추진한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부친인 김 회장을 위해 현조가 연극을 하는 것이라면. 그래, 거기까지는 봐줄 생각이다. 부친을 위해서라면 참아 줄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눈감아 주면 될 것이다.
“서연재 씨 부친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대출이 잡혔더군요. 그 금액의 다섯 배를 지급하도록 하죠.”
기가 막히니까 말이 안 나왔다. 재벌과 결혼이란 것을 하면 이런 이득이 있구나. 이혼하면 부자가 되겠네.
허탈해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높은 분 앞이라 꾸역꾸역 눌러 참았다.
“사장님.”
“말해요.”
“정말 주실 건가요?”
아주 잠깐 얼굴색이 바뀌는 선화를 보며 연재는 통쾌함을 느꼈다. 기왕 밟힐 거면 꿈틀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장난 같니?”
일순 핏줄을 타고 도는 피가 일시에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지렁이는 꿈틀해 봤자 지렁이일 뿐이다. 밟히면 소리조차 없이 죽어 나가는.
“권 실장이 돌아오면 계약서를 줄 거예요. 이러면 장난이 아닌 게 되겠죠?”
실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현조가 닮지 않은 것에 감사할 만큼.
“차라리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일개 비서라지만, 아무리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딸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결혼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누누이 말하던 부친의 말이 지금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결혼을 가벼이 생각한 대가라고 생각하자. 그래, 여기까지만.
“그건 어려워요.”
유턴 표시가 없는 고속도로를 끝없이 질주해야 하는 기분이 이럴까. 한번 들어선 이상 후진도 유턴도 불가능한 고속도로다. 더 무서운 건, 중간에 빠져나가는 길도 없다는 것.
“회장님께서 서연재 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셔서 곤란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과 사지 말걸. 쓸데없이 열심인 성격이 문제다. 연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봐도 고속도로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하다못해 중간에 연료가 떨어지면 급유차가 달려와 보충을 해 줄지언정 설 수는 없었다. 길이 끝날 때까지 전력으로 달려야 했다.
“저는 전무님과 결혼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발악을 했다. 꿈틀꿈틀.
“현조가 왜 결혼하는지 잊었어요?”
젠장, 꿈틀거릴수록 밟히기만 할 뿐이었다.
“나가 봐요.”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짓눌려 압사당할 것 같았다. 간신히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막혔던 숨이 그제야 터지듯이 한숨이 쏟아졌다. 몇 번 심호흡하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상사로서 존경했던 김선화 사장은 현조의 모친으로 만나고 난 후 실망이 밀려왔다. 김 회장의 뒤를 잇는 존경받는 기업인. 그런 김선화 사장을 모신다는 자부심 또한 컸다.
하지만 오늘 선화에게 느낀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늪이고, 멈출 수 없는 고속도로라면 일단 달린다. 최선을 다해 달려주겠다. 그 결승점에서 아주 홀딱 벗겨 먹어 주겠어. 남의 집 대출금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연재 선배. 거기서 뭐 해요?”
사장 집무실 앞에 서서 꼼짝을 하지 않자 지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냐. 각오 좀 다지느라고.”
“무슨 각오를 그렇게 인상 써 가면서 다지세요.”
“내가? 설마.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갈게. 수고해.”
양심이 따끔거려서 연재는 재빨리 사장실을 벗어났다.
***
- 나 없다고 보고 싶어 하면 곤란해요.
“전무님, 아직 하루도 안 지났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청량한 웃음소리에 귀가 즐거웠다. 방금 사장실에 불려갔다 오지 않았다면 이 웃음이 가식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조건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연재는 괜스레 전화선을 꼬아 가며 복잡한 심경을 감췄다.
- 안 보고 싶어요?
“일본 날씨는 어떤가요?”
- 말 돌리네, 난 구름이 서 비서 얼굴로 보이는데?
모든 사기꾼은 말을 잘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렇게 청산유수처럼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거였다.
나쁜 남자.
“그 구름 찍어서 보여 주세요.”
- 내 말 못 믿어요?
“네.”
- 그렇단 말이지, 기다려요.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톡 창을 열었다.
파랗기만 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손가락 하트가 둥실 떠 있는 사진이었다. 연극을 위한 연기인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보니 사기꾼이 아니라 절도범에 가깝다.
자꾸, 사람 마음을 야금야금 훔친다.
“연재 씨 뭐해요?”
골똘히 사신을 들여다보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지자 놓치는 것도 많아졌다.
“실장님, 오셨어요.”
“잠깐 이야기 좀 할래요?”
휴대전화를 뒤집어 책상에 내려놓은 연재가 영업용 미소로 무장했다. 그리고 보았다. 정욱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충분히 읽어 보고 천천히 고민해 봐요.”
정욱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들고 연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제 손가락을 찍어서 보낸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계약서를 받고 보니 또다시 만감이 교차했다.
사기꾼과 절도범에게 홀리면 이런 대가를 받게 되는 건가 보다.
“꼭 이렇게 하셔야 되는 건가요?”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필요해요. 연재 씨가 현조와 결혼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의 결혼과 다른 절차가 필요하고요.”
절차라는 말에 기운이 빠졌다. 계약서를 쓰고 진행하는 결혼이라니 참으로 우스운 철자였다.
“전무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상의한다고 달라지는 일이라면 처음부터 진행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기분은 달라지겠죠. 제 기분.”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이쪽 세계는 대부분 이런 계약서 한 장쯤은 대수롭지 않게 작성하고 시작합니다.”
그래, 그 대수롭지 않은 계약서 봐 준다.
연재는 보란 듯이 정욱 앞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연재 씨 입장 이해해요. 하지만 현조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다시금 계약서 조항을 살폈다. 그러다 연재는 같은 문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 혼인은 김이원 회장의 사망 후, 한 달 이내에 잔금을 지급하고 철회한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정욱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현조의 동의도 이루어진 부분이고.”
“동의했다는 말인가요?”
“연재 씨를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거짓말. 현조는 처음부터 혼인 신고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현조 역시 처음부터 김선화 사장과 손을 잡고 꾸민 일이거나, 이 계약서의 존재 자체를 현조는 모르고 있거나.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계약서는 전무님과 저를 배려한 계약이란 건가요?”
“맞아요.”
이게 어떻게 현조를 위한 일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깟 결혼 못 하겠다고 집어 던지면 그만인데, 제아무리 회장님이라도 싫다고 하면 그만인데.
연재는 엎어 놓은 휴대전화에 시선을 던졌다.
문제는 이 남자의 진심을 알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이 남자가 보여 주는 서슴없는 행동과 설레는 말의 정체가 정말 연극일 뿐인지. 그가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숨어 있는지도 궁금했다.
이 몹쓸 호기심과 연민이 필요 없어질 계약서에 이름을 새겨 넣게 했다.